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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놀이의 문화사 노세 노세 정월에 노세

지구온난화라는 말이 무색하게 유별난 한파가 기세를 떨친 겨울이다. 연일 한파와 대설주의보 속에서 섣달을 보냈고, 소한과 대한의 냉혹한 맛을 피부 깊숙이 체험했다. 그러나 제아무리 추위와 바람으로 무장한 동장군이라도 음력 정월에는 서서히 물러날 채비를 하는 법이다. 따스한 기온과 꽃향기를 대동한 봄 처녀가 오시는 길을 그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옛 세시 풍속 속의 음력 정월은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계절이자 삼라만상이 땅속에서 기지개를 켜는 시절, 즉 새로운 시작과 준비의 월력이었다. 현대의 양력 1월은 여전히 한파가 계속되는 겨울의 한복판으로 지난해의 연속으로 생각되는 반면, 과거의 음력 정월은 봄을 향한 소리 없는 아우성이 느껴지던 그런 새해였다.

그래서인지 전통 사회의 음력 정월에는 세시 풍속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다. 가히 ‘전통적 세시 풍속의 계절’이라 할 만하다. 세시 풍속은 일정한 시기에 관습적으로 되풀이하는 문화로,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전통 놀이다. 현대의 놀이는 계절과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고도 할 수 있지만, 과거의 전통 놀이는 환경친화적, 자연 순응적이기에 어떤 계절과 날씨인가가 중요했다. 다시 말하면 전통 놀이가 계절의 변화에 따른 삶의 패턴, 생활의 주기성과 밀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줄다리기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볏짚으로 만든 줄이 있어야 하므로, 줄다리기를 하는 시기는 가을걷이를 끝내고 바쁜 농사철이 지난 때가 알맞다. 이처럼 우리의 전통 놀이는 자연 변화와 생업 환경을 존중하면서 계절 순환적인 세시 풍속의 원리 속에서 배치되었다.

음력 정월의 대표적 세시 풍속일로는 설날, 입춘, 대보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정월 대보름은 ‘놀이의 향연’ ‘놀이의 박람회’라 할 만큼 다채로운 놀이와 행사가 펼쳐졌다. 놀이의 시각에서 보면 전통 사회에서 가장 즐겁고 재미있는 날은 설날보다 정월 대보름이었다. 설날은 새해 첫날로서 ‘근신’과 ‘조심’을 화두로 하여 친족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 행사가 많다. 세배, 차례, 덕담 등 설날에 하는 세시 풍속을 떠올려보면 그렇다. 반면에 정월 대보름은 ‘개방’과 ‘소통’의 날로서 마을과 고을 단위로 하는 공동체 행사가 많았다. 당연히 정월 대보름 행사에는 참여하는 사람도 많아지고, 놀이의 규모나 범위도 커지게 마련이다.

옛 문헌을 통해 정월 대보름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자. <동국세시기>는 조선 순조 때의 유학자 홍석모가 지은 책으로, 세시 풍속의 교과서라 할 정도로 많이 인용되는 책이다. 이 책에서 정월 대보름, 즉 상원 上元에 하는 세시 풍속을 찾아보면 연놀이, 연싸움, 달맞이, 다리밟기, 편싸움, 줄다리기, 놋다리밟기 등 수많은 놀이가 열거되어 있다. 이런 놀이는 집 안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마당과 광장에서하는 이른바 열린 공동체 놀이다.

1959년 청계천 복개 공사로 철거되어 장충단 공원으로 옮겨갔지만, 원래 청계천에 있던 수표교는 한양에서 ‘노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그야말로 ‘노는 광장’이었다. 정월 대보름이 다가오면 수표교에는 장안 사람들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무엇을 보기 위해서 그 많은 사람이 찾아왔을까? 바로 ‘연싸움’이었다. 청계천을 따라 위아래로 수많은 연싸움이 벌어졌는데, 이 볼거리가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스펙터클한 모습을 띤 것 같다. 그러나 수표교에서 만나는 대보름의 진정한 볼거리는 답교놀이라고 부르는 ‘다리밟기’였다. 답교놀이는 ‘다리(橋)’를 밟아 튼튼하게 하면 한 해 동안 ‘다리(脚)’에 병이 나지 않는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영국의 인류학자 프레이저의 표현을 빌리면 유감주술적 행위인 것이다. 다리밟기는 수표교 외에도 청계천의 광통교에서도 성행하여 정월 대보름에는 청계천 다리밟기 행렬이 밤새도록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정월 대보름이 옛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각광받은 것은 풍년을 기원하는 농사력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전통 사회에서 달은 생산과 풍요의 여성을 상징하는 바, 새해의 첫 보름달은 여성성이 극대화한 날로서 풍농과 풍작을 기원하는 여러 가지 기풍 祈豊 행사가 벌어지는 것이다. 농업 사회가 퇴보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정월 대보름이 약화되고, 연휴 정책 속에서 설과 추석이라는 두 명절만이 강화되는 현상을 보인다. 전통적 세시 풍속도 대보름날보다는 설날에 집중되었다. 그래서 설날에 고궁이나 박물관을 찾으면 갖가지 전통 놀이를 할 수 있도록 놀이마당을 펼쳐두었다. 연날리기, 윷놀이, 투호, 굴렁쇠 굴리기등이 설날의 놀이마당을 꾸미는 단골 놀이다. 가끔씩 쌍륙놀이, 승경도놀이 등 전통 사회에서 행한 집 안의 놀이도 등장하고 있다.

정월에 집 안에서 즐기던 전통 놀이를 하고 싶다면 판놀이가 제격이다. 판놀이는 주사위나 윤목을 던져서 나온 수만큼 판 위에서 말을 움직이는 놀이다. 명절에 제일 많이 하는 판놀이는 바로 ‘윷놀이’다. 설날에 식구가 모였을 때 아이들을 생각해 화투판을 벌이는 것보다 윷놀이판을 벌이는 편이 훨씬 유익할 듯하다. 전통 판놀이는 에듀테인먼트로서도 유익한 효과가 있다. 요즘 놀이판에서 뜨는 개념이 에듀테인먼트, 즉 교육과 오락을 결합한 즐기면서 학습하는 방식이다. 조선시대 양반가에서 아이들에게 관직명을 알려주기 위해 행한 ‘승경도놀이’가 대표적 에듀테인먼트형 놀이다. 이처럼 유희의 욕구와 교육 목적을 적절히 병합할 수 있는 판놀이를 즐긴다면 정월의 명절이 더할 나위 없이 흥겨운 날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호모루덴스의 입장에서 살피면, 노는 방식에 왕도가 있을 리가 없다. 저마다의 방식에 맞게, 궁극적으로 가족이 행복할 수 있는 놀이를 택하면 된다. 다만, 정월의 설날과 대보름은 우리나라의 전통 명절임을 생각해 옛 조상들의 전통 놀이를 즐기면서 가족의 행복을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


휘영청 밝은 대보름 밤의 불놀이
정월 대보름에는 불의 향연이라 할 만큼 다양한 불놀이 행사가 펼쳐진다. 달집태우기, 쥐불놀이, 횃불싸움 등 불놀이의 대개가 대보름에 행해졌다. 달집태우기는 정월 대보름 무렵에 솔가지, 짚단, 나뭇더미를 쌓아 달집을 만들고, 달이 떠오르면 불을 놓아 풍년을 기원하는 풍속이다. 한반도 이남을 중심으로 한 벼농사 지역에서 볼수 있는 기풍 의례이며, 아울러 불의 힘을 통해 액을 쫓는 액막이 의식이다. 또한 달집태우기는 대보름의 달맞이 행사와 같이 진행하면서 달과 불의 조화를 맛볼 수 있는 놀이다.

달집태우기에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속설이 전해진다. 달집에 먼저 불을 놓는 사람은 장가를 가고, 아들을 낳는 등 운수가 좋다고 해 서로 점화를 하려고 성화다. 두루마기와 저고리의 동정을 달집 태울 때 넣거나, 생년월일과 성명을 연에 써서 태우면 액을 면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달집의 불에 콩을 볶아 먹으면 이가 튼튼해지고 부스럼이 나지 않는다는 주술적 믿음도 전해진다. 지금도 지방 곳곳에서 달집태우기가 행해지는데, 특히 전남 승주군 월동면 송산마을에 가면 그 장관을 만날 수 있다. 이 마을은 1948년 여순 사건 때를 제외하고는 달집 태우기를 중단한 적이 없는 마을이다.

<동국세시기>에서는 충청도 풍속에 주민이 떼를 지어 횃불놀이를 하면서 논과 밭두렁의 마른풀을 태우는 쥐불놀이가 있다고 쓰여 있다. 쥐불놀이는 해충을 죽이고 쥐들을 쫓기 위해서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보름 밤에 논과 밭의 두렁을 타고 번지는 불길은 장관을 이루었다. 이와 같이 대보름은 불놀이로 넘실대는 명절이었다. 달과 불은 음과 양의 이미지로 대비되는 면이 있지만, 대보름의 불놀이를 통해서 변증법적 만남을 이룬 것이다.

유승훈(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우리 놀이의 문화사>저자, 문학박사)

담당 최혜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