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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갤러리]사진작가 권부문 개인전 <산수와 낙산> 산수와 낙산, 와유와 무한
‘만물에 깃들어 있던 잃어버린 빛을 되돌리기 위한 치유로서의 이미지’, 사진작가 권부문은 이것에 도달하기 위해 살아 있다. 그 명징함에 정수리가 서늘해진다.


Untitled #2236, Hongcheon, 2010, Laserchrome Print, 135.6x257.2cm

북극, 설악, 돌에게, 구름 위에서. 그동안 권부문이 찍은 사진들이다. 이 사진들은 작가를 풍경 사진작가로 범주화하게 해준다. 그러면서도 그 풍경의 의미와 범주가 예사롭지 않다.
이를테면 북극 오지를 탐험하면서 빙산과 빙하를 찍은 일련의 사진에서 작가는 풍경을 극단까지 밀어붙여 비현실적 비전을 이끌어낸다. 주지하다시피 북극은 유한에서 무한을 꿈꾼 낭만주의자들의 이상향이었고, 현실 세계 너머로 도피를 감행하게 해주는 상징적 좌표였으며, 죽음의 메타포였다(롤랑 바르트 역시 사진의 본질을 죽음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북극을 탐험한다는 것은 유한한 삶과 무한한 세계, 현실적 삶과 내세의 경계 위에 서는 것을 의미하며, 작가의 북극 사진은 눈이 시리도록 파란 그리고 투명한 그 경계 위의 색깔을 감지해낸다. 그리고 또 다른 결정적인 사실 하나를 덧붙이자면 파란색은 낭만주의의 상징 색이었고, 그 색은 죽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죽음은 현실에 오염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순수하다. 작가의 북극 사진은 그 순수한 영토에 발을 들여놓고 있다는 어떤 의외성과 알 수 없는 낯섬 앞에 서게 만든다.

그리고 설악의 속살을 드러낸다거나, 가장 흔한 돌에서 사물 초상화의 개념을 감지해낸다거나, 비행기 시점과 같은 시점을 그 극한까지 끌어올려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지운다. 말하자면 하늘 바다라고 하는, 어쩌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유의 풍경을, 비전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풍경은 일종의 개념으로, 자연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자연이 저절로 주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풍경은 인문학적 소산이다. 자연을 자신의 안쪽으로 불러들여 재차 게워낸 것이며, 주관적이고 개인적이 면서 사사로운 비전이 덧붙은 것이 풍경이다. 한마디로 풍경은 해석된 자연이다. 현실과의 감쪽같은 닮은꼴 탓에 사진은 영락없는 현실 자체인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사진의 특수성을 말해 주는 계기들이 여럿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차이로는 프레임의 유무를 보면 된다. 이를테면 보통의 시각 경험은 결코 프레임을 통해서 이루어지지가 않는다. 프레임은 세계의 특정 부분을 한정하는 것이며, 자연의 어떤 속성을 부각하는 장치다. 세계에, 자연에, 현실에 주체가 개입하고 간섭하게 해주는 인공적이면서 미학적인 매개 장치인 것.

(왼쪽) Untitled #3271, Seorak 2010, C-Print, 305.6x124.6cm


Naksan #8160, 2010, Laserchrome Print, 237.2x167.2cm


Naksan #4270, 2010, Laserchrome Print, 155.6x195.6cm



그렇다면 권부문은 이 매개 장치를 통해 자연을 어떻게 풍경으로 전환하고, 그로부터 어떤 인문학적 소양을 끄집어내는가. 이번 전시의 주제는 ‘산수와 낙산’이다. 산수는 장르 개념이고 낙산은 지명이다.

편의상 구분해본 것이지만, 사실 산수 역시 실재하는 어떤 지점을 찍은 것이란 점에서 지명과 통한다. 산수와 낙산이란 지명은 이번 전시의 두 축인 셈인데, 산수를 통해 특유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지명을 통해 그때 그곳에 내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 미학적 경험과 함께 존재의 증명이 수행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존재의 증명은 사진의 또 다른 본질이다).

주지하다시피 산수는 수묵화의 전통적이고 전형적 장르다. 산수 시리즈를 통해 작가는 마치 수묵화와도 같은 깊고 심원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겨울에 특히 잘 드러난다. 겨울의 자연은 한층 더 산수답다. 겨울에 산은 헐벗고 나무도 헐벗고 색깔도 헐벗는다. 그래서 무채색 일색인 겨울 산은 성글고 그 골기가 더 잘 드러나 보인다. 여기에 눈이라도 내리면 검은 나무와 흰 눈의 대비가 뚜렷해지고, 골짜기 사이에 흐르는 희뿌연 눈발이 그 대비를 더욱 두드러지게 하면서 원근을 만든다. 이렇게 겨울 산은 첩첩이 중첩돼 쌓이면서 수직 구조를 강조하고, 화면 안쪽으로 열린 것 같은 깊숙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리고 작가의 시점은 낙산 시리즈의 경우 산에서 바다로, 올려다 보던 것에서 멀리 내다보는 것으로 옮아온다. 산수 시리즈에서 수직 구도와 함께 적막감을 강조하고 있다면, 낙산 시리즈에서는 옆으로 무한정 연장된 것 같은 수평 구도와 함께 막막함을 떠올리게 한다. 막막함이 적막감을 집어삼키고, 가없음이 숭고한 골기를 끌 어안는다. 가없다는 것, 끝없다는 것, 무한정 연장돼 있다는 것, 그것의 성질은 삼킴이며, 끌어안음이며, 포용력 속에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내다보는가. 멀리 내다보이는 그것 또는 그곳은 밤이며, 어둠이며, 심연이며, 죽음이며, 무한이다. 무한한 어떤 지경 위에 내가 서 있다는 것, 그것은 세계가 지워지고 재편되는 경험이다. 그 지경 안쪽으로부터 마치 시간의 전령인 양, 무한한 세계의 화신인 양 눈발들이 표표히 건너오고 있다.

(왼쪽) Untitled #1799, Seorak, 2010, C-Print, 305.6x158.6cm

산수의 전통적 미덕은 와유다. 내가 그림 속에 들어가서 노니는 것. 실제로 노닌다기보다는 그 경지를 암시한 것. 그리고 낙산은 무한한 세계에 직면해 있다는 존재의 증명을 암시한다. 작가의 풍경 사진은 큰 편이다. 마냥 큰 것이 아니라, 산수의 와유와 낙산의 무한을 담아낼 만큼 크다. 그래서 그 큰 사진(풍경) 앞에서 우리는 사실 사진(풍경) 속에 들어가 있다고 느낀다.


권부문에 관하여 ‘부문 Boomoon’이라는 낯선 이름. 그를 알게 된 건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할 용기도, 그렇다고 현재에 만족하지도 못한 채 우왕좌왕하던 때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인생이 막막하던 서른 즈음, 세상의 한 귀퉁이라도 제대로 바라보고 싶다는 열망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바로 그때 사진가 권부문의 작품집을 들춰보게됐다. 돌, 구름, 바다 의 모습을 담은 세 권의 작품집. 한 권의 책 속에서 그가 주목하는 사물은 하나였는데, 그 하나의 사물을 같은 장소에서 끈기 있게 지켜본 자의 시선은 참으로 깊고 명료했다. 가령 ‘벼랑 끝에 놓인 거대한 돌덩어리’가 그랬다. 태초를 묻게 하는 자연물 앞에 마음이 고요해지는 느낌. 존재감. 부동과 침묵의 세계. 돌은 그렇게 거기 있었다. 내게 다가온것은 사진이 아니라 한 인간의 사유였다. 뜻을 굳건하게 세운자의 고요하고 묵직한 사유, 그 압도적인 언어.
사진작가로 이름난 동시대의 무리속에 권부문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부와 명예를 좇는 대신 스스로를 세상과 차단하고 신선이나 유목민처럼 지구를 떠돌았다. 그가 보낸 고행의 시간은 수전 손태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명상의 영역, 정신적 원숙함을 위한 준비, 말할 권리를 얻기까지의 시련”이다. 그 오랜 시간을 통해 그가 바라본 것은 사물과 현상.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물과 현상에 깃든 빛, 즉 ‘자기 광명 自己光明’이다. 권부문의 작품집 <낙산>에 실린 구라이시 시노의 글을 가만히 들여다 보라. “예전에, 선에는 ‘현성 現成’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것은 눈앞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 또는 가공 되지 않은 살아 있는 모습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을 말한다. 사진 장치는 원래 허식 없이 무구 無垢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즉 ‘현성’이라는 궁극의 이상을 재현하는데 적합하였다.” 그가 왜 사진이라는 형식을 택했는가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빛과 자아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시노는 13세기 일본의 선승 도원의 말을 인용해 이 부분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한다. “밝고 밝은 광명이 삼라만상에 있다. 삼라만상의 광명은 모든 수목, 뿌리와 가지와 잎뿐 아니라, 꽃과 열매의 광명이다.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인간도, 천신도에 광명이 있고, 수라도에 광명이 있다.” 그렇다. 권부문은 ‘자기광명 自己光明 (사람에게는 본래의 자성으로서 광명이 갖춰져 있다는 것)’의 경지를 꿈꾸고 있다. 만물에게 또 사람에게 깃들어 있는 빛, 그것을 보려 하지 않고는 결코 절대적 자아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지를 통해 깨우친다. 눈발이 세차게 휘몰아치는 겨울 바다를 그저 풍경으로만 봐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아름다운 풍경 너머에는 죽음을 연상 시킬 만큼 혹독한 자기 세계가 존재한다. 또한 그것은 눈이 어두운 자에게 빛이 된다.
“이 사진은 나 자신과의 조용한 대화를 위한 것이다. 수직 화면, 그리고 화면 아래쪽에 절대적으로 비어 있는 ‘무대’는 ‘사진가-보는 자’가 바로 이 순간, 절대적 구역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마주함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동시에 ‘관객’ 측에 있는 무대는 열려 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거울인 것이다. 나는 ‘풍경으로서의 나’를 마주 본다. 무섭고 고독한 거울이다. 유일한 거울이 거기에 있다. 풍경은 하나, 나도 하나, 그 외에는 없다. 아무것도 이 풍경을 대신할 수 없다. 누구도 나를 대신하거나 대변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하루하루 지속되는 삶을 걸고, 용기와 각오를 얻기 위해 벌거숭이인 채로 그냥 바라 본다. 어떠한 함의도 없이 혹은 모든 함의를 안고서.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다. 도움은 오직 빛으로 나타난다”. 다시 한 번 빌려온 구라이시 시노의 문장은 권부문의 사유를 가장 잘 드러낸다.

*권부문 작가의 개인전 <산수와 낙산>은 2011년 1월 12일부터 2월 27일까지 학고재 갤러리 전관에서 열린다. 그와 더불어 또 하나의 반가운 소식이 있다. 그의 방대한 작품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웹사이트 ‘부문닷넷(www.boomoon.net)’이 곧 오픈할 예정 이다. 세상에 공개한 몇몇 연작 시리즈 외에 권부문의 사진 역사를 관통하는 주요 작품이 20여개의 카테고리로 나뉘어 소개된다.



문의 학고재 갤러리(02-720-1524)

구성 정세영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