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복서 박현성 씨의 인생 역정 돈키호테의 꿈
복싱 국가 대표, ‘밤의 황제’를 거쳐 아킬레스건이 끊기는 사고 후 전신 화상까지 입은 박현성 씨는 고통의 삶에 자신을 내팽개치지 않았다. 1급 장애를 이겨내고 이종 격투기 선수로, 입식 타격기 선수로, 복싱 지도자로 링을 오가던 그는 요즘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다. 그 꿈은 희망이라는 옷을 입은 채다.


그는 이 사각의 링이 바로 세상의 축소판 같다고, 복서는 눈물 대신 땀으로 운다고 했다.

겨울이 오기 전 얼지 않기 위해 오히려 옷을 벗는 겨울나무, 몸에 남은 물기를 치밀하 게 빼버리는 겨울나무. 죽지 않기 위해 자신을 내려놓는 그 몸짓에서 삶의 역설을 배운다. 헐벗은 겨울나무의 가지가 흔들리던 오후, 그의 눈빛은 형형했다. 그와 악수하는 데, 손대는 게 밀가루 인형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한 발은 붕대로 휘감은 채 목 발을 짚고 선 그는 회복기 환자의 낯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몸의 93%에 화상을 입은 지 17년이 지났는데도 뼈를 감싸는 피부 조직이 계속 괴사해 그는 얼마 전 그 피부 조 직을 걷어내고 인조 피부로 배양하는 수술을 받았다. 아직 병원에 치료받으러도 가야 하고 또 ‘열심히’ 쉬어야 하지만, 곧 있을 아마추어 여자 복싱 국가 대표 선발전에 출전시킬 제자들과 훈련에 몰두 중이다.

그가 만든 ‘권도 拳道’라는 무술 협회의 네 번째 회합도 앞두고 있다. “사각의 링을 잘 들여다보세요. 내게는 이 사각 공간이 세상의 축소판 같아요. 링에 오르면 달아날 곳도, 숨을 곳도 없죠. 지면 모든 걸 잃는 거죠. 링에 서면 내 몸에선 눈물과 피가 튀기지만 관객들은 그걸 보며 즐거워하죠. 그래서 링에 오르면 고독해요. 내 삶이 딱 이런 모습이었어요. 하지만 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더 치열하게 링을 붙잡는 이유도 그것 때문 아닌가 싶습니다. 달아날 곳도, 숨을 곳도 없는 이 링에 설때 비로소 내가 살아 있는 것 같기 때문에.” 통렬한 산화를 겪으며 살 아온 남자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죽지 않고 살아났으니 이제 제대로 살아야겄다” 과거의 그는 세상과의 불화에 시달린 사람이었다. 젊은 날, 그는 주먹만이 삶을 세우는 무기라고 믿었다. 학교 폭력 사건에 연루돼 “잘못을 용서해주는 대신 복싱을 하라”는 체육 교사의 말에 처음 글러브를 낀 중2의 소년 박현성이 그 시작이었다. 3개월 운동한 후 1983년 소년체전에서의 우승과 ‘체육 명문’ 대전체고로의 스카우트, 세계청소 년선수권 우승과 고3 되던 해 얻은 국가 대표 자격, 역시 체육 명문 한체대 입학과 전국체전 우승, 88올림픽 대표 선발전 준우승, 1988년 프로로 전향해 ‘한국 프로복싱의 대모’ 심영자 씨가 운영하는 최대의 복싱 흥행 회사 ‘88프로모션’ 입단, 데뷔 직후 거둔 5전 전승…. 이게 그의 ‘주먹’ 인생의 양지였다면 그 뒤 로는 홍역 같은 음지의 세월이 이어졌다.
88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준우승한 해 여름 돈의 유혹을 못이겨 충남 대천에서 시작한 건달 생활, 조직 돈 5백만 원을 빌려 썼다가 들어선 어둠의 세계, 밤의 황제로 나이트클럽·성인 오락실·해수욕장 이권 사업 등을 주무르던 조직의 보스, 옥살이…. 그의 청춘은 그렇게 흘러갔다. 주먹만이 비인간적이고 불평등한 세상에 대항하는 최선의 무기라고 믿은 시절이었다.

그러던 1993년, 그는 상대 파벌의 기습으로 아킬레스건이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진 삶에, 매일 술 먹고, 사고 치고, 재수 없으면 구치소에 다녀오는 악순환의 삶에 진력난 그는 그 사고 후 분신자살을 시도했다. 몸의 93%에 입은 3도 화상, 식물인간부터 시작해 계속된 4년 동안의 투병 생활, “제발 죽여달라”로 시작되곤 하던 병상 난동, 엉덩이 일부를 제외하면 살이 없다고 하는 편이 맞을 정도로 엉망이 된 몸, 대수술만 27번을 거치며 하루당 병실비 50만원, 1년 5개월의 병원비 5억원을 감당하느라 아버지가 남겨준 큰 유산을 거덜 낸 그의 가족. 이게 그가 들려준 투박한 과거의 첫 자락이다.

(왼쪽) 신체 대부분의 살갗이 화상으로 짓이겨져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극심한 고통이 밀려오고, 땀구멍이 거의 남아 있지 않는데도 그는 링을 떠나지 않았다.

모든 꿈을 꺼버린 듯 주저앉아 방황하던 그를 건져 올린 건 아내였다. 고등학교 때 미팅으로 만난 ‘엄지’(아내 정정임 씨를 그는 줄곧 ‘엄지’라는 별명으로 불렀다)는 숱한 난관에도 줄곧 그의 곁을 지켰고, 화상으로 1급 장애인이 됐을 때도 그를 떠나지 않았다. 구슬픈 육체를 비관하며 마음의 울화를 술로 풀던 그 옆에서 엄지는 분식 가게를 차려 라면을 팔며 ‘생존’의 세계를 꾸렸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그의 입에서 터져나온 말 “엄지야, 나 살아야겄다. 이제 제대로 살아야겄다. 니가 나를 죽지 않고 살려놨으니 일어나도록 만드는 것도 니 손으로 해야 되지 않겄냐. 다시 걸을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헐테니 니가 나를 좀 도와야겄다.”

단단한 대못 같은 이 사나이의 행진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다리에 수십개의 핀을 박는 아킬레스건 수술도 대성공했고, “화상으로 근육 형성이 안 될 것이니 다 나아도 목발을 짚거나 절뚝거리는 후유증이 남을 것”이라는 의사의 염려에도 그는 피나는 재활 끝에 정상인처럼 걷게 됐다(담당 의사는 ‘기적’이라며 의학계에 이 임상 과정을 보고했다). 화상으로 사라진 땀구멍이 생겨나기도 했고, 10분의 1 정도밖에 안남아 있던 정상 입술이 세포 증식을 하더니 반쯤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물고기 비늘처럼 서로 연결돼버린데다 구부러지지도 않던 왼손도 복싱을 다시 시작하면서 손가락 사이가 떨어지고 타격하기 좋게 구부러졌다. “모든 게 엄지의 공이죠. 내게 마누라는 공기 같고 물 같은 존재예요. 평상시에 공기에 감사합니까?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 끼고 있어야 아…!라고 느끼는 것처럼 엄지는 그런 존재죠. 나는 이제 죽을 용기가 없어요. 왜냐고요? 마누라와 자식들 때문이죠. 그동안 고생시킨 마누라가 이제 나 때문에 웃는거 보면 용서받는 것 같아요.” 줄곧 감정의 침입이라곤 없는 표정으로 말하던 그는 아내 이야기에서 마침내 발열하며 웃었다.


(왼쪽) 화상으로 발가락이 뭉개진 그는 복서로서는 가장 치명적인 핸디캡을 갖고 있다. 특수 제작한 복싱 슈즈를 신지 않으면 링 위에서 중심을 잡기조차 어렵다. 그런데도 그는 링 위에서 한 번도 기권하지 않아 ‘불사조’라는 별명을 얻었다.
(오른쪽) 그가 ‘공기이자 물이자 그릇’이라 말하는 아내 정정임 씨.


사각의 링이 가르쳐준 인생
이윽고 그의 삶은 급커브를 튼것처럼 희망으로 내달렸다. 고초의 세월 끝에 인생을 환히 깨달은 사람만이 아는, 더 빛나는 희망. 1997년 그는 전국체전 충남 코치로 종합 우승 2회, 준우승 1회라는 성적을 올리며 복싱 지도자로 변신했다. 이후 영화 <주먹이 운다>의 실제 모델 서철 선수(교도소 출신 복서로 2000년 부산체전 헤비급 준우 승을 거뒀다), 한국판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 불리는 여성 복서 민현미 선수 등을 배출했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정공법으로 세상과 ‘맞장 떴다’. 2003년 그는 15년 만에 링에 올랐다. 복싱이 아닌 이종 격투기 파이터로. 띠동갑쯤 되는 선수들을 상대로 한 그의 경기는 감동적이었다. “날 아는 사람들이 그 경기 모습은 내 인생과 비슷하다고 이야기했죠. 비록 상대편의 일방적인 우세였지만 기술이 걸릴 때마다 죽었다가 살아나니 흥미진진했죠.” 심판 전원 일치 판정패를 당했지만 관중들은 “박현성!”을 외쳤고, 그는 ‘피닉스 phoenix(수백 년 동안 살다가 스스로를 불태운 뒤 그 재 속에서 되살아난다는 전설 속의 불사 조)’라는 별명도 얻었다. 이어 마흔을 앞둔 나이에 입식 타격기(코마)에 도전해 상위권에 입상하며 선수 생활을 계속했다. 특수 제작한 복싱 슈즈를 신지 않으면 링 위에서 중심을 잡기 힘든 상태인데도(화상으로 발가락이 뭉개졌기 때문에),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사우나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되는데도(피부 조직이 손상돼 피부가 숨을 못 쉬므로) 그는 끊임없이 도전했다.

“복싱은 나를 강하게 만들어줬고, 나를 자만하게 만들었고, 나를 낭떠러지로 밀었죠. ‘이놈의 주먹질만 안 배웠다면 내 인생이 바뀌었을 텐데’라고 후회하느냐고요? 아니요. 복싱은 다시 나를 걷게 했고, 불사조처럼 일어서게 만들었죠. 복싱은 삶의 모습과 똑같아요. 주저앉았다가도 다시 종이 울리면 새로운 라운드를 시작하는. 과거의 나를 반성은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거죠. 내가 다시 링에 오른 건 과거의 나처럼 나약한 사람들을 좀 잡아주고 싶어서, 사람들의 죽어 있는 마음을 깨워주고 싶어서이기도 해요.” 숱한 낮과 밤을 살이 패어지게 살아본 사람만이 이 남자처럼 목숨을 걸 수 있는 법이다. 그 용기로, 열기로 가득 찬 인생 앞에 마음이 꺾인다.


박현성 관장과 이혜미 선수가 아마추어 여자 복싱 국가 대표 선발전 준비에 한창이다. 취재 일주일 후 그는 이혜미 선수의 준우승 소식을 알려왔다. 이제 다음 목표는 2012 런던올림픽 국가 대표 선발전이라고 한다.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는 사람의 뒷모습은 언제나 쫓긴다. 그는 지금 제자 이혜미 선수와 박주영 선수를 2012년 런던올림픽 국가 대표로 만드는 꿈에 사로 잡혀 있다. 그 꿈을 위해 냉골의 도장 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날이 늘고 있다. 비록 집에 가서는 무릎으로, 엉덩이로 돌아다닐 정도로 통증이 극심하지만 자신의 땀을 후대의 양분으로 내어주는게 마땅하다고 생각한다(과거에 그가 입식 타격기 토너먼트에 도전한 이유도 제대로 된 입식 격투를 먼저 경험해 제자들에게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관비도 받지 않고 있다. 취재 일주일 후 열린 2011 아마추어 여자 복싱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 제자 박주영 선수는 우승, 이혜미 선수는 준우승을 거뒀다. 그는 복싱에 격투기 기술을 접목한 권도를 만들고(화상으로 잘 쥐어지지 않는 왼손을 활용하기 위해 만든 기술에서 비롯된 새로운 무술) 특허까지 냈다.

권도학교와 국기원 같은 ‘권도원’을 만드는 꿈도 키우고 있다. 물론 그 꿈에는 아내 정 정임 씨가 함께한다.“사실 남편이 집에 1백 원을 가져다주면 나는 그걸 5백 원으로 써야 하는 상황이죠. 하지만 꿈이 투철한 사람이랑 살다 보니 그의 꿈과 뜻을 따라 가게 되더라고요. 늘어나는건 부채고, 갚는건 제 몫이지만 난관에 부딪혀도 이 사람의 목표가 절대 변하질 않으니까. 설마 오늘만 있으랴, 그런 마음이에요.” 슬픔과 기쁨과 영광의 물방울을 모두 나눠 마신, 이 평범하지 않은 지아비와 지어미.

삶이 부패하는 건 매일매일 습관처럼 살아내기 때문일 것이다. 결코 꿈을 버리지 않는 이 남자의 마음속 ‘청년’은 앞으로 일상에도, 고난의 시간에도 매몰되지 않을 것이다. 몸에 있는 물기를 치밀하게 빼버리는 겨울나무, 마침내 봄이 오면 종환처럼 꽃망울을 터뜨리는 나무를 그에게서 본다. 고초의 세월 끝에 인생을 환히 깨달은 사람이 피운 ‘꿈’이라는 꽃나무를.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싸워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돈키호테> 중에서)’. 돈키호테는 과대망상증 환자죠. 그런 그가 산초라는 부하와 함께 기사 수업을 하는 행태를 읽으며 나를 대비하곤 했습니다. 불사조 피닉스도 어찌 보면 과대망상에 빠져 산초 같은 우리 아이들(제자들)과 링이란 제국을 여행하고 있으니까요.
내가 살아가는 삶은 왜 그리도 고장 난 시계처럼 자꾸만 멈춰 서는 것일까요?
내가 타인의 도움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1급 장애자라서 그런 건가요?
풍차를 적으로 오인해 싸움을 하는 돈키호테처럼 내가 보고, 만지고, 느낀 그 모든 것이 풍차 같은 환상이란 말입니까? 음…, 아닐 겁니다. 햄릿보다는 난 바보 같은 돈키호테가 되고 싶고, 현실적인 사람보다는 이상주의자적인 사람이고 싶습니다. 난 몽환가이며, 상상가입니다. 내가 꿈꾸는 세상은 아무도 가보거나 본 적이 없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그런 곳입니다. 그 미지의 길에 이제 막 들어섰는데 내 발걸음이 무겁더라도 다리가 잘리지 않도록, 내 의지가 포기하지 않도록, 내 두 눈이 길을 잃지 않도록 조금만 더 내 정신이 또렷해지길….” _그의 인터넷 카페(cafe.daum.net/21cboxing)에 그가 쓴 글.


박현성 씨와의 인연은 <행복> 2010년 3월호 표지 작가인 성태훈 씨 덕분에 이어졌다. 이들은 영등포구 양평동의 같은 건물 세입자로 사소한 다툼 이후 친구가 됐다. 한 사람은 복서로, 한 사람은 동양화가로 살지만 서로를 알게 된 게 ‘행복’이라 말하는 지기지우 知己之友다. “박 관장은 투박하지만 척박하지 않은 야성의 사나이입니다. 게다가 책을 참 많이 봐요. 겉모습은 조폭인데 사실은 세상사에 해박하고 글도 잘 쓰는 사나이죠. 이 친구가 제 작품을 참 좋아해요. 운동만 하던 이 친구는 나를 통해 예술의 세상을, 물감 냄새에 코 박고 살던 나는 이 친구를 통해 패기 넘치는 세상을 보게 됐으니 더 행복하죠.”
글 최혜경 기자 사진 하성욱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