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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혼 가족_인터뷰] 홍미영 부평구청장, 사업가 송종식 씨 부부 “그 상처를 사랑하기 위해 당신과 함께합니다”
두 딸을 가진 여자와 세 딸을 가진 남자가 부부가 되기까지는, 이혼의 아픔을 딛고 새로운 가족을 꾸리기까지는 수많은 허들을 넘어야 했습니다. 결혼 후에 새롭게 생겨나는 관계의 주름까지도 포용하면서 5년여를 함께 산 이 부부는 이제 ‘진짜 행복’이 무언지 말할 수 있게 됐습니다.


사랑하고 결혼하며 우리는 무엇을 얻고 잃는가. 결혼은 ‘꾀꼬리를 죽여 가죽을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가죽 조금 얻자고 꾀꼬리의 황홀한 자태와 청명한 노랫소리를 버리다니, 어리석기 그지없는 장사라는 말이다. 이 부부는 이 ‘어리석은 장사’를 기쁘게 택했다. 그것도 두 번째로. 인천시 부평구청장 홍미영 씨와 사업가 송종식 씨는 함께 생의 숨은 꿈들을 얻고, 또 조금씩 상실해가는 평범한 부부로 살고 있다. 이제 돋보기를 쓴 서로를 안쓰러워하는 50대 부부로, 측은지심이 커지는 만큼 호흡 주기도 비슷해지는 부부로 살고 있다. 물론 이렇게 부부로 살기까지 이들이 한 땀 한 땀 새긴 시간은 길었다. 직접 쓴 ‘결혼 다짐문’에 그 시간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지난날 우리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상처가 없는 것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이며 우리의 상처는 진화의 징표입니다. 당신을 바라보며 세상이 외롭지 않음을 알게 되었고, 당신을 통해 세상이 더 크게 사랑해야 할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그 상처를 사랑하기 위해 당신과 함께합니다.”

두 딸을 가진 홍미영 씨와 세 딸을 가진 송종식 씨는 각자 이혼의 상처를 안고 있었다. 홍미영 씨는 40대 중반까지만 해도 자신의 인생에 이혼과 재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다. 하지만 “이렇게 살다가는 내가 죽지” 싶은 벼랑을 만났고 이혼했다. 마음고생이 몸으로 나타나 급성갑상선질환을 앓고 한 달 만에 10kg이 빠졌다. 그녀는 이혼이 곧 주홍글씨인 남성 중심의 정치판에서 일하는 정치인이었고, 더구나 가부장주의자들의 표적이 되는 진보적 여성 운동가였다(이혼 전에도 몇몇 남성 정치인이 구청장 후보를 희망하는 그녀를 향해 ‘이혼한 사람이 무슨 구청장이냐’라며 헛소문을 퍼뜨렸다. 그녀는 결혼에 이상이 없다는 호적등본까지 복사해 다녔다). 송종식 씨는 이혼하고 8년 동안 홀아비 생활을 하고 있었다. 5년 이상 지인들이 그의 이혼 사실을 모를 정도로 상처를 숨기고 살았다. 홍미영씨가 이혼 1년 후쯤 17대 총선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에 인연의 끈이 이어졌다(원래 그 이전부터 시의원 활동과 노무현 대통령 선거를 위해 같이 활동한 동지였다). 당시 송종식 씨는 정치를 그만둔 상태였지만 홍미영 씨의 국회의원 선거를 돕는 조력자로, 국회에 입성한 후엔 후원회장으로 버팀목이 돼주었다. 그녀가 국회의원 초년병의 길을 잘 걸어가게 하느라 늘 노심초사하는 송종식 씨를 보면서 그녀는 ‘한 번 실패한 내 인생도 다시 도전할 수 있을까?’란 희망을 품게 됐다. 함께한 시간이 쌓이면서 두 사람은 오래 익은 술 같은 평생 친구로, 쓴맛도 서로 씹어 나누는 부부로 살기를 소망하게 됐다.


(왼쪽) 행복한 결혼을 소망하며 직접 쓰고 결혼식 때 낭독한 ‘결혼 다짐문’. 
(오른쪽) 홍미영 씨와 두 딸, 송종식 씨와 세 딸이 모여 새로운 복합 가정을 이루었다.


장애물을 넘기까지
부부가 되기까지 두 가족이 겪은 난관은 많고 많았다.“초혼 때는 양가 부모 눈치 보느라, 재혼 때는 양쪽 자식 눈치 보느라 결혼에 도달하기 힘들다고 하죠. 처음엔 딸들이 우리 결혼을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재혼 자체를 반대한다기보다 아버지가 정치하며 고생하는 걸 봐온 데다, 8년을 홀아비로 살며 외로웠는데 정치하는 분이 새어머니라니 여러모로 걱정스러웠던 모양이에요. 아버지를 뒷바라지해주는 그런 분이 필요하다는 거였죠. 시간이 좀 흐르고 가족 상담을 받으면서 딸들이 ‘그동안 아버지가 우리 때문에 정말 수고했다. 더 잘되기를 바라는 건 자식의 의무다. 새어머니는 빈민 운동·여성 운동을 한 사람이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지극하니 어렵게 자란 우리들의 엄마 역할도 잘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됐죠.”
“저는 아이들보다 사회적 시선이 더 걸림돌이었습니다. 아직 여자의 이혼을 제대로 용납하지 않는 대한민국 사회이니까요. ‘이혼했으면 애들 키우면서 장한 어머니로 수절해야지, 감히 재혼?’ 이런 수군거림이 많았어요. 게다가 여성 국회의원의 재혼이라니, 부정적으로 활용해 먹기 참 좋은 소재잖아요.” 이런 난관을 두 손 부여잡고 헤쳐나간 두 사람은 마침내 부부가 됐다. 당시 국회의원이던 홍미영 씨는 재혼 과정을 <여성신문>에 ‘홍미영의 재혼일기’ 칼럼으로 연재했다. “정치인이 사생활을 드러내는 건 득보다 실이 많지만, 우리 부부의 경험을 여러 사람과 나누면 새 출발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용기를 냈어요. 재혼의 삶을 드러내놓고 밝은 데서 이야기하면 ‘재혼 가정은 보호가 필요한 가정, 쉬쉬 해야 하는 비정상 가정’이라 생각하는 인식에도 변화를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요.” 앞서 걷는 사람이 세상의 땅에 길을 내는 법이다.

결혼 전 그들은 가족 상담과 ME(Marriage Encounter, 부부 관계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 서로 친밀하게 대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 교육이라는 준비 과정을 거쳤다. “재혼은 이혼 후에 하든, 사별 후에 하든 상처를 가진 두 가족이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모았어요. 또 피를 나누지도, 세월을 나누지도 않은 두 가족이 결합하는 것이므로 더더욱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가족 상담 전문가를 소개받아 ‘원래 남편 가족’끼리, ‘원래 아내 가족’끼리, 다 같이 7~8회의 상담을 받았어요. 상담자는 제가 전남편에 대한 배신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더군요. 1시간 30분 동안 대화한 후 전남편을 용서하고 제 자존심을 높이라는 숙제를 받았습니다. 놀라운 건 제가 제 딸들과 친정에 대해 당당하지 못하다는 상담자의 진단이었어요. 여성 운동을 해온 저조차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모로 일이 많은 그의 가족을 먼저 신경 쓰느라 그에게 제 딸들과 친정 식구를 동등하게 대해달라는 요구를 미처 못한 거죠. 평소 과묵한 그는 상담에서 이혼 당시의 분노, 홀아비로 살던 시절의 어려움을 털어놓으며 그 상처를 훌훌 벗어던지는 것 같았어요. 자신의 딸들과 함께 상담하면서는 묵은 갈등을 덜어내더라고요. ‘정치하는 새엄마’에 대한 딸들의 이해도 끌어냈고요.”

두 사람이 2박 3일 동안 참여한 ME 교육에서는 서로에게 편지 쓰고 대화하는 법을 배웠다. 이 교육을 거치면서 두 사람은 초혼 때보다 두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는 재혼에 대해 희망을 갖게 됐다. “거친 숲 속을 아무 준비 없이 걷는 것보다 낫이든, 막대기든 풀숲을 헤치는 도구를 들고 가는 게 좋잖아요. ME는 그런 도구가 되어줬어요.” 2006년 3월, 그들은 혼인식을 치렀다. 양쪽 막내딸이 화동이 되고 홍미영 씨의 큰딸이 축하의 글을 읽었다.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결혼이 될 수 있겠지요. 저는 두 분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로의 삶에 열의와 자신감을 가진 두 분이니까요. 그리고 서로의 삶을 축복하고 지지해줄 수 있는 두 분이니까요. 30년 후에도 의좋은 부부로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앞으로의 길, 늘 씩씩하고 행복하세요.” 서른 살 넘은 큰딸은 감동스러운 글로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해주었다.

결혼은 행복한 항복이다
행복하든 불행하든 결혼은 상대를 반려자인 동시에 족쇄로, 위안인 동시에 부담으로 만들어버린다. 삶의 뜨거운 물집을 가져본 두 사람은 이걸 너무 잘 안다. 그래서 결혼과 자신을 둘 다 존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들이 결혼 다짐문에 쓴 글 ‘우리 두 사람은 서로가 없어도 잘 살 수 있지만 더 잘 살기 위해 함께 살 것을 선택했습니다’처럼. “‘너 없이는 못 살아’ 하면서 결혼했는데 조금 있으면 ‘너 때문에 못 살아’ 하잖아요. 그래서 저와 남편은 ‘너 없이는 못 살아’가 아니라 ‘너랑 있으면 더 잘 살 것 같애’란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해요. 또 ME 교육을 받으며 크게 감동한 문장이 있는데 ‘사랑하는 것은 결심이다’란 거였어요. 사회 활동할 때는 뜻이 참 잘 맞았는데 일상생활할 때는 안 맞는 것들이 많잖아요. 저는 신발을 휙 벗어 놓는데 아내는 매번 쫓아 들어오면서 잔소리를 하는 것처럼.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그런 사소한 일 때문에 마지막 물 한 방울이 떨어진 듯 넘쳐버릴 수 있어요. ‘잔소리 좀 그만해! 우린 안 맞아’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그래서 결혼 후의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이고 결심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약점까지도 사랑하겠다고 결심하는 것. ‘혼인한 독신 생활은 하지 말자’도 결혼하고 서로가 순간적으로 밉고 서운할 때 자주 되뇐 말이에요.” 송종식 씨의 이 이야기에 밑줄 긋고 싶다면 주저하지 마시길.

(왼쪽) 그들에게도 하루하루 무릎 관절이 물러지는 노년의 삶이 오겠지만 이렇게 두 손 잡고 씩씩하게 걸어갈 생각이다.

“재혼한 여자는 무의식중에 ‘팥쥐 엄마 콤플렉스’를, 남자는 ‘콩쥐 아빠 콤플렉스’를 갖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손자랑 노래를 부르는데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이런 노랫말이 나와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라는 노랫말. 글쎄, 제가 그 부분을 빼고 부르더라니까요. 스스로 위축되거나 눈치 보는 거죠. ‘혹시 내가 팥쥐 엄마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혹은 ‘의식적으로 새로 생긴 아들딸에게 더 신경 쓰느라 친자식에게 무심한 건 아닐까’ 갈팡질팡할 수도 있죠. 아마도 많은 재혼 부부가 이걸 경험할 거예요. 여기에도 묘약은 없어요. 또 계부모, 의붓형제는 서로 남이라는 걸 인정해야 할 것 같아요. 인위적으로 혈육처럼 살라고 강요하다 보니까 부모도, 자식도 더 힘든 것 아닐까요. 남이라는 걸 인정하면 자연스레 시간과 공을 더 들여 노력하자고 결심하게 돼요. 피가 안 섞인 남이지만 비슷한 상처가 있거나 그 상처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 돕고 사는 게 재혼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뻔한 이야기 같지만 ‘역지사지’를 가슴에 새기면서 노력하는 것밖에는 왕도가 없지요.” 공무 때문에 바쁘다며 아침밥을 차려주지 않는 아내에게 송종식 씨는 간절한 이유를 담아 아침밥을 먹게 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사랑하고 결혼하며 우리는 무엇을 얻고 잃는가. 어쩌면 부부의 행복은 항복이 아닐까. 송종식 씨의 편지처럼 무릎 굽혀서 얻어지는 행복. 행복, 행복, 행복한 항복. 여러분도 이들처럼 함께 늙어갈 약속 티켓을 쥐고 있는 아내에게, 남편에게 행복하게 항복하시기를.

* 더 많은 정보는 <행복이 가득한 집> 1월호 150p를 참조하세요.

글 최혜경 기자 사진 하성욱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