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우리 문화 들여다보기]세종에게서 배우는 인간의 도리 모름지기 인간은, 군주는 이러해야 하므로
예로부터 현명한 군주를 만나면 백성이 편하고, 반대로 우둔한 군주를 만나면 나라가 어지러워 고생이 많았다. 세종은 신격화의 포장을 한 겹 벗겨낸다 해도 재임 시 백성으로부터 가장 존경받은 왕, 후대에 가장 모범이 되는 왕이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세종에게서 모름지기 군주가, 아니 인간이 갖추어야 할 품성과 도리를 배워야 할 때다.


이 대가 수성을 못 하면 그 왕조는 단명한다 조선 27명의 왕 중 가장 뛰어난 군주를 꼽으라 하면 난 서슴없이 세종을 이야기한다. 흔히 창업보다 수성 守成이 더 어렵다고 한다. 이 대가 수성을 못 하면 그 왕조는 단명으로 끝난다. 중국의 여러 왕조를 봐도 알 수 있다. 조선이 500년이란 왕업을 이어온 것은 영민하고 결단력 있는 2대 군주 태종과 그의 아들 세종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태종이 탄탄한 기초를 만들었다면 그 위에 반듯한 집을 지은 것은 세종이다.

왕위 다툼으로 골육상쟁을 겪은 태종은 세자를 폐하고 새로 책봉하는 대사를 지연시키면 여러 사람이 다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대저 이 같은 큰일은 시간을 끌면 반드시 사람을 상하게 한다”며 전광석화처럼 세종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세종은 태종 18년(1418년) 6월 왕세자로 책봉되고, 두 달 만인 8월 22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세종은 위아래가 소통하는 공론 정치를 통해 정치, 국방,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업적을 쌓아가면서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했다.

한데 세종은 걸출한 성군이었으나, 가정적으로는 누구보다 불행한 임금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왕이 된 그해에 아버지 태종에 의해 장인이요 당시 영의정이던 심온과 처 작은아버지 심정이 죽임을 당하고, 심온의 처와 일가족 모두가 종이 되었다. 또 문종의 첫 세자빈 김씨(세종의 며느리)는 너무 우둔하여 쫓겨났고, 둘째 세자빈 봉씨마저도 궁녀와 눈이 맞아 동성애를 하다가 들통이 나 폐출되었다. 이처럼 세종은 두 며느리를 폐하는 사건으로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또 나름대로 풍수에 일가견이 있던 세종은 자신의 무덤과 며느리인 문종 비 권씨의 무덤을 쓰고 나서 피바람을 맞아야 했다. 열여덟 명이나 되는 아들 가운데서 장자인 문종은 즉위한 지 겨우 2년 만에 승하했다. 그의 아들 단종은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 영월 땅으로 유배되어 어린 나이에 원통하게 죽어야 했다. 또 육종영 六宗英이라 일컫는 안평대군, 금성대군, 화의군,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 등 여섯 명의 아들도 비명에 가는 변고를 당했다. 이러한 변고로 영릉 자리가 길지가 아니니 다른 곳으로 이장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됐고, 이윽고 예종 때 여주로 천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끝까지 형 양녕대군을 살린 세종 세종은 형제에 대한 우애가 지극했다. 형 양녕을 높이 받들고 사랑하여 자주 대궐로 맞아들여 술을 대접하는가 하면, 사냥을 좋아하는 양녕을 위해 세종은 친히 성 밖으로 나가 함께 사냥하곤 했다. 태종과 세조는 혁명 과정에서 동생들과 대신들을 많이 죽였지만,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양녕의 목숨을 끝까지 보전해주었다. 이것이 태종과 세종, 세조로 이어지는 삼 대가 서로 다른 점이다. 양녕의 아들 이개가 장성해서 순평군에 봉해지자 신료들은 벼슬을 주지 말고 아버지를 따라서 지방에 안치하라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세종은 “양녕은 종사 宗社(종묘와 사직)에 죄를 얻은 까닭에 외방으로 추방되었지만 그 아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며 이를 물리치고, 조카 이개를 성 밖에 살게 하여 언제라도 볼 수 있도록 했다.

세종조의 명장 김종서가 세종에게 양녕의 불찰에 대해 자주 말하곤 했다. 하루는 세종이 김종서를 불러 타일렀다. “경이 양녕을 비난하는 말을 자주 하는 것은 나의 본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만일 차례로 말한다면 이 자리는 진실로 나의 형 양녕의 것인데, 오늘날 내가 대신해서 온 나라의 봉양을 받고 있다. 더군다나 일반 백성이라도 형제 사이에는 잘못을 덮어주고 잘한 것은 드러내주며, 불행히도 혹 죄에 걸리면 뇌물도 쓰고 애걸도 하여 모면하게 하는 것이 사람의 지극한 정의인데, 하물며 내가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도리어 백성만도 못 하게 형 하나를 감싸줄 수가 없겠는가. 경은 이 뜻을 잘 알아서 여러 사람에게 타이르라. 장차 서울의 집으로 청하여 항상 만나봄으로써 우애의 도리를 다하겠다.” 이후 김종서는 양녕의 불찰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오히려 앞장서서 세종의 의중을 다른 신료들에게 알렸다. 세종은 양녕을 정치적으로 배제시키려는 신료들의 처사에 대해 자신의 가정일로 국한시켜 형을 보살폈다. 이들의 우애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세종은 위아래가 소통하는 공론 정치를 통해 정치, 국방,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업적을 쌓아가면서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한 성군이다.

굳센 의지의 군주 세종은 옳다고 여기는 일에 대해서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반대하는 신하들을 합리적으로 설득하면서 의지를 관철해나갔다. 이것이 세종의 공론 정치다. 공론 정치야 말로 요즈음 흔히 말하는 소통의 정치라 할 수 있다. 다음 이야기는 세종의 그런 성격을 잘 보여준다.

세종 23년(1441) 12월 3일, 세종이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흥천사(지금의 덕수궁 뒤쪽에 세운 원찰)의 사리탑을 수리하고 경찬회를 베풀고자 했다. 그러자 당대의 명유 名儒, 대소 신료, 유생들이 수십 일간이나 상소를 올려 이를 반대했다. 반대가 극심하자, 세종은 “불탑이 기울어져 위태로우면 수리해 고치는 것은 예전에도 있던 사실이고, 수리해 고친 후 경찬회를 여는 것도 예전에 있었던 일이다. 내가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며, 또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폐하는 데 비할 것이 아닌데도 대간과 모든 선비가 하나같이 통곡할 만하다고 하는데, 과연 이것이 통곡할 만한 일이겠느냐. 경들이 이의 부당함을 간한 지 오래였고, 나는 간함을 거절한 임금이다. 세번 간하여 듣지 아니하면 벼슬을 버리고 간다고 하는데, 경들은 어찌 가지 않는가”라며 빗발치는 반대 상소를 물리치고 경찬회를 베풀었다. 그렇다. 옛날에 충과 효를 가를 때 부모에게 세번 간해서 듣지 않으면 울면서 따르는 게 효요, 신하가 임금에게 세 번 간해 듣지 않으면 자리를 내놓는 것이 충이라 했다. 또 세종은 “비구니가 궁중에 드나들면서 공주로 하여금 머리를 깎게 해도 금지하지 못한 것은 나의 과실이다. 대저 임금의 허물을 얽고 짜는 것은 소인배의 짓이다. 그 부모들은 집에서 염불하고 경을 읽어도 그 아들이 간하여 그치게 하지 못하면서, 조정에 와서는 남이 상소함을 가지고 허물을 탓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라며,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서는 비록 자신의 권위가 손상되더라도 솔직하게 의사를 밝히고 관철시켜나갔다. 요즈음은 어떤가. 그것이 비록 옳은 일일지라도 조금만 비판이 있으면 제대로 설득해보지도 않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며 꼬리 감추기에 바쁘다. 그저 자신의 인기와 순간의 비판을 벗어날 수 있다면 말 바꾸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지 않는가. 손바닥 뒤집듯 말이 다른 오늘날의 위정자들에게 지쳐 있는 우리에게 세종의 이러한 태도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늘날 세종과 같은 굳센 의지의 군주를 기대한다면 과욕일까.




한 권의 책을 1100번 읽다 역대 어느 군주도 세종만큼 글을 많이 읽지는 못했다.경서는 물론이고, 예악 禮樂 등을 널리 알아 그 박식함이 어느 신하도 따를 자가 없었다. 세종은 만년에 기력이 쇠약해 비록 조회는 보지 않았으나, 학문에 관한 일만큼은 더욱 유의하여 유신에게 여러 책을 편찬하게 했다. <고려사> <치평요람> <역대병요> <오례의삼강행실> 등이 세종의 지시로 편찬한 책들이다. 몸이 쇠약한데도 하루에 수십 권의 책을 열람하기도 했다. 세종은 천성이 학문을 좋아해 세자로 있을 때는 반드시 100번씩 채워 책을 읽었다. 특히 <춘추좌전 春秋左傳>과 <초사楚辭> 같은 것은 다시 100번을 더 읽었다고 한다. 세종이 세자로 있을 때 하도 글을 많이 읽어 몸이 쇠약해지자, 걱정이 된 태종이 내시로 하여금 책을 모두 거두어 가지고 오게 했다. 그때 <구소수간 歐蘇手簡>(송나라의 글 잘한 구양수와 소식이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책) 한 권이 병풍 사이에 빠져 남아 있었다. 세종은 이 책을 1100번이나 읽었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적게는 100번, 많으면 200번, 심지어는 1100번을 읽었다는 세종의 독서량은 왕조 실록이나 야사에 기록된 엄연한 사실이다.

그래도 혹여 이런 기록들이 군왕에 대한 신하들의 예우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심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죽으면 당연히 명나라에 부고를 보내 알리지만 왕비의 경우는 그런 규정이 없었다. 이렇다 할 원칙이 없다 보니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알릴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때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일을 꼼꼼히 따져 행한 세종은 부인인 왕비가 먼저 죽자 이를 명나라에 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신하들과 상의했지만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명나라에 왕비의 상을 알리기로 하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그런데 국상 기간 동안 세종이 글을 읽다가 왕비의 경우는 부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세종은 급히 사람을 보내 부고 시청사로 간 사신을 불러오게 했다. 그런 뒤 세종은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리던 황희, 맹사성, 김종서 등 대신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질책했다. “제발 책 좀 읽으시오. 이게 무슨 나라 망신이오.” 이런 일화는 세종이 책을 100번씩 읽었다는 사실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세종 때 한글을 만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엄청난 독서량으로 해박하기 이를 데 없던 군주, 세종이기에 해낼 수 있었던 일이다. 한 나라의 지도자 자리에 오른 사람은 그 누구보다 책을 가까이해야 함을 우리는 이 영특한 군주를 통해서 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한 나라를 올바르게 이끌고 비전을 제시하는 일은 속 빈 머리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지도자 자리에 오른 사람은 그 누구보다 책을 가까이해야 함을 이 영특한 군주를 통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세종의 용인술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다. 이는 한 나라나 조직이 잘되고 못되는 것 모두가 사람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음을 강조한 말이다. 세종은 1438년 다음과 같은 영을 전국에 내려 인재를 모았다. “각 지방의 관찰사들은 학식이 많거나 덕과 행실과 재주가 뛰어난 인물이 있으면 추천하라.” 이를 도천법이라 한다. 숨어 있는 인재를 찾아내어 쓰기 위해 세종이 펼친 제도다. 세종은 과거 이외에 집현전에서 인재를 기르고, 도천법으로 숨어 있는 인재를 뽑아 나라의 동량으로 양성했다.

세종은 인물을 쓰는 데에도 남달랐다. 태종의 절대적 신임을 받은 황희는 54세 되던 해에 왕세자 문제로 태종과 견해를 달리해 미움을 산 적이 있다. 당시 태종은 세자 양녕대군이 바르지 못한 행실 때문에 물의를 일으키자 세자를 폐하는 문제를 황희와 상의하곤 했다. 하루는 황희를 불러 양녕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황희는 세자가 나이도 어리고, 또 그의 과실이란 사냥을 좋아한 데서 비롯된 것인 만큼 나라의 국저 國儲(임금의 맏아들) 세자를 경솔히 움직일 것이 아니라며 양녕을 두둔했다. 사실 황희는 경솔히 세자를 바꾸는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태종은 황희가 양녕의 외척인 민씨 세력과 가까운 양녕대군의 편에 붙어 뒷날을 도모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이 일로 태종은 황희의 충직성을 의심해 공조판서로 좌천시켰다가 곧이어 평안도 순무사로 내보냈다. 2년 후 양녕대군이 폐위되고 충녕대군(세종)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태종은 황희를 남원으로 귀양 보내 어머니를 모시고 살도록 했다. 그 후 임금 자리를 세종에게 물려준 태종은 세종에게 “황희의 전날 일은 어쩌다가 그릇된 것이니, 이 사람을 끝내 버릴 수는 없다. 나라를 다스리려면 황 공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며, 다시 불러올려 예조판서에 제수했다. 그러나 세종은 비록 부왕의 뜻에 따라 황희를 다시 등용했지만, 태종이 승하한 뒤 양녕의 세자 폐위를 반대한 황희에 대해 일말의 의구심이 없을 리가 만무했다. 그러니 그의 인품과 능력에 대해서도 완전히 신뢰할 수만은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세종은 황희를 예조판서로 제수했다가 판서보다 한 단계 낮은 관찰사로, 그것도 벽지인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했다.

황희는 오로지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해 강원도민의 구휼에 힘쓰고, 행정 능력을 십분 발휘해 세종의 신임을 얻었다. 그렇게 1년간 강원도 관찰사로 재임한 후 한양으로 올라올 수 있었던 황희는 64세 때에 이르러서야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며, 5년 뒤인 69세에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이로부터 87세까지 19년 동안 영의정을 재임했다. 이처럼 세종은 사람을 쓸 때 신중을 기하되, 일단 그 능력과 됨됨이가 인정되면 절대적인 신임으로 밀어주어 그의 철학을 맘껏 펼칠 수 있게 한 것이다.

군주란 작은 것을 버릴지라도 큰 뜻을 끝까지 관철시키는 철학,역사관, 미래를 통찰하는 혜안이 있어야 함을 세종을 통해 배운다.

살펴본 것처럼 세종은 모름지기 군주는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훌륭한 정면 교사다. 군주란 비록 작은 것을 버릴지라도 큰 뜻을 끝까지 관철시키는 철학 내지는 통치관, 역사관, 미래를 통찰하는 혜안이 있어야 한다. 임금이 입는 곤룡포에 도끼를 그려 넣은 것도 바로 군주는 그런 결단력이 있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역사를 훑어보노라면 나약한 군주가 통치한 시대에는 백성이 엄청난 고난을 감수해야 했다.

<행복> 2009년 10월호부터 ‘우리 문화 들여다보기’를 통해 전통문화와 그 안에 흐르 는 정신을 옛이야기 들려주듯 자분자분 풀어낸 정종수 관장. 그는 매달 흥미로운 글을 통해 단지 옛것이라 하기엔 너무 귀중하고 배울 바가 많은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을 북 돋워주었습니다. 아쉽게도 ‘우리 문화 들여다보기’ 칼럼은 이번 호를 끝으로 막을 내리 지만 전통문화에 대한 <행복>의 애정과 관심은 계속될 것입니다.
글 정종수(국립고궁박물관 관장) 담당 최혜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