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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띄는 전시] 프랑스 국립 베르사이유 특별전
영광과 화려함, 덧없음이 뒤섞인 ‘베르사이유 궁전’의 은밀한 속내, 이 겨울 서울에서 만날 수 있다. 루이 14세부터 루이 16세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절대왕정의 정점이 된 시절의 유물이 서울을 찾았다. “도시 정비부터 사람들의 옷차림까지 루이 14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볼테르의 말처럼 프랑스와 전 유럽의 문화를 선도한 베르사이유의 흔적이 펼쳐진다. <베르사이유의 장미>에 열광했던 이라면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 앞에서 탄성을 지를 것이다. <귀족의 은밀한 사생활>을 통해 16~18세기 귀족의 일상을 탐구했던 이지은 씨가 이 전시를 기념하며 베르사이유 궁 안의 사적인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왕실 초상화 속에 숨은 영욕의 이야기를 함께 들여다보시라.


왕실의 공식 초상화는 그림으로서의 의미를 넘어, 왕실의 권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당대 최고의 실력을 지닌 궁정 화가들이 그림의 크기, 액자 장식까지 계산해서 그렸다.
1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공식 초상화다.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 르브룅, ‘로브 아 파니에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 1785년 이후. ⓒ Photo RMN-GNC media, Seoul, 2010
2 이 사람이 바로 태양왕 루이 14세다. 클로드 르페브르 아틀리에, ‘루이 14세의 초상’, 1670~1675년경. ⓒ Photo RMN-GNC media, Seoul, 2010


신이 내린 왕, 루이 14세에게 영광을!
세계사가 고등학교 필수 과목이던 세대에게 ‘왕’ 하면 으레 떠오르는 인물은 태양왕이라는 별칭을 가진 루이 14세다. 배낭여행을 필수 통과의례쯤으로 여기는 세대에게도 루이 14세는 친숙한 인물이다. 베르사이유 성은 유럽 여행 코스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명승지니 말이다. 루이 14세가 세상을 떠난 것은 1715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무려 3세기 전의 인물인데도 우리는 그를 베르사이유 성을 건설한 절대 권력으로 기억하고 있다. 왕실 화가였던 이야생트 리고가 루이14세의 초상화를 그릴 무렵 그는 64세였다. 그러나 담비털 망토를 입은 그림 속 왕은 정력적인 40대 얼굴이다. 그 나이에 이미 윗니가 하나밖에 남지 않았던 데다 항문 누관 수술에, 평생 과식으로 인한 소화불량, 편두통에 장염까지 달고 살았다는 의료 기록을 남긴 왕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외모다. 왕홀(지팡이)을 비롯해 왕관, 사법권의 상징인 정의의 손에다 샤를마뉴의 검까지 찬 그의 모습이 어찌나 인상적인지 이 그림은 왕실 초상화의 모델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을 효과적으로 과시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18세기 유럽 군주에게 이 초상화는 이상적 견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빨간 굽이 달린 구두와 파마 머리 가발을 유럽에 유행시킨 루이 14세는 탄생부터 요란했다. 루이 13세와 안 도트리치가 무려 22년의 결혼 생활 끝에 얻은 귀한 왕자인 그는 태어나자마자 ‘신이 주신 루이’라는 별칭을 얻었고, 프랑스 전역의 성당에서 10만 개의 종을 울리며 그 탄생을 축하했다. 루이 14세의 어린 시절은 내란과 사촌들의 권력욕, 대영주들의 반란, 정치적 협잡과 술수가 난무하는 한 편의 대하 드라마였다. 흔히 루이 14세의 특징이라고 여기는 품성의 뿌리는 바로 어린 시절에서 비롯된다. 서류 한 장까지 스스로 서명해야 직성이 풀리는 완벽함, 아첨하는 이들에 대한 비웃음, 식탐 그리고 뛰어난 쇼맨십까지 말이다. 왕으로서 자의식이 강했던 루이 14세가 오로지 왕을 위한 신도시를 건설하겠다고 나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아버지 루이 13세의 사냥용 별장은 그의 면밀한 도시 계획을 거쳐 유럽 제일의 성으로 거듭났는데, 이것이 바로 베르사이유 궁이다. 처음 확장 계획을 세웠을 때만 해도 이게 오늘날의 베르사이유 궁전처럼 영욕의 장소가 될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전통적으로 프랑스 왕은 우리나라의 왕처럼 한 성에서만 머물며 나라를 다스리는 정주형 왕이 아니라, 끊임없이 성과 성을 옮겨 다니며 여행 중에 나라를 통치하던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계절마다 서너 궁전을 돌면서 업무를 보는 왕에 익숙한 당시의 백성들에게 왕이 머무는, 왕만을 위한 도시라는 베르사이유 궁전의 콘셉트는 혁명적인 아이디어였다. 루이 14세를 필두로 한 왕가가 자자손손 본궁으로 삼은 루브르 성을 버리고 베르사이유 성으로 이주한 것은 1682년. 그러나 그 당시에도 베르사이유 성은 공사 중이었다. 궁의 기본 증·개축 공사에만 45년, 그 이후에도 100년 동안 늘 공사 중이던 베르사이유 성은 당시에도 이름난 관광지였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왕은 아버지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언제든지 아버지가 사는 곳을 방문해 그가 생활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당연한 권리였기 때문이다. 베르사이유 성 입구의 가게에서 검과 모자를 빌리면 베르사이유 성을 구경할 수 있었던지라 17세기에 이미 베르사이유 관광 책자가 등장했을 정도다. 호사스러운 내부, 가장 유명한 장인과 예술가의 작품을 망라한 컬렉션을 구경하기 위해 전 유럽에서 관광객이 몰려들었음은 물론이다.


3 ‘거울의 방’ 전경. ⓒ Photo RMN-GNC media, Seoul, 2010
4 에티엔 알레그랭, ‘궁전 북쪽 화단의 전경’, 1688. ⓒ Photo RMN-GNC media, Seoul, 2010



(왼쪽) 왕실 초상화는 걸리는 위치도 계산되었는데 인물의 눈높이가 감상자의 시선보다 높게 걸려야 했다. 초상화 속의 기둥이나 커튼, 단상 같은 요소는 왕의 권위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다. 이 초상화는 루이 14세의 초상화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 이야생트 리고 아틀리에, ‘루이 14세의 초상’. ⓒ Photo RMN-GNC media, Seoul, 2010

1 왕홀 다윗 왕의 지팡이에서 유래된것으로 부르봉 왕가의 왕들이 공식행사에 왕관과 함께 반드시 지녔다.
2 왕관 왕의 힘을 상징한다.
3 흰 담비털 망토 왕과 왕비가 궁정의 공식 예식에만 입었던 귀한 대례복.
4 대관식용 검 부르봉 왕가의 샤를마뉴 대제가 과거 카페 왕조 및 카롤링고 왕조를 통합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샤를마뉴 대제의 전통을 잇는다는 ‘왕가의 정통성’이 담겨 있다.
5 정의의 손 상아로 세 개의 손가락을 조각한 ‘정의의 손’은 왕의 사법권을 상징한다. 각각의
손가락은 ‘왕’ ‘이성’ ‘자비’를 상징.
6 하이힐 각선미에 자신 있던 루이 14세가 신고 있는 하이힐은 17세기 ‘프랑스 스타일’을 완성하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요소였다.
7 백합 문양 부르봉 왕가의 상징이자 ‘순결’의 상징. 왕은 신과 인간의 중개자 역할을 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영민한 왕이던 루이 14세는 세련되게 권력을 과시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헤라클레스나 주피터 같은 그리스 신의 모습으로 묘사한 벽화로 궁전을 장식하고, 은으로 만든 가구를 비롯해 자신의 영광을 드높일 예술 작품으로 궁전을 꾸몄다. 루이 14세는 이러한 선전용 예술품 제작을 후원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나서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발레를 좋아해 공연을 기획하고 자신의 상징인 태양 모양의 모자를 쓰고 출연해 춤을 추기도 했다. 사치와 권력의 세계이던 베르사이유 궁을 무대로 화려한 삶을 연출했던 그에게는 일상생활이 곧 한바탕 연극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는 이 무대를 바탕으로 72년하고도 100일 동안 온 프랑스를 꼼짝 못하게 손아귀에 넣고 모든 사람을 줄 세워 신분에 맞는 배역을 정해주는 절대 권력자의 역할을 죽을 때까지 성공적으로 해냈다.

세기의 연인, 루이 15세와 마담 퐁파두르
베르사이유라는 현란한 연극 무대를 루이 14세에게 이어받은 인물은 증손자인 루이 15세다. 루이 15세는 루이 14세에 비해 복잡다단한 인물이었다. 대영주를 촛불 드는 시종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그였지만, 자식 문제만큼은 요령부득이었다. 왕세자를 비롯해 손자, 증손자까지 횡사하는 불운이 겹쳤기 때문에 루이 15세는 부모 없이 유모의 손에서 자랐다. 그는 루이 14세의 증손자라는 이름에 모자라지 않을만큼 정력적인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자폐적이라 할 만큼 내성적인데다 냉소적이었다. 일례로 루이 15세는 종종 “내가 죽으면”으로 시작하는 유언 같은 말을 해서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측근들이 “폐하는 영원히 건강하실 것입니다”라고 제지하려 해도 차가운 목소리로“그대는 왜 내가 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그럴 리가 있느냐?”라고 싸늘하게 반문했다니, 성격을 짐작해볼 만하다.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는 이러한 남편의 까탈스러움을 감당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왕비를 대신해 루이 15세의 불안을 다독인 사람은 대귀족에게 부르주아 출신이라는 경멸을 받은 마담 퐁파두르였다.

(왼쪽) 루이 15세의 평생의 연인 마담 퐁파두르의 초상이다. 장 마르크 나티에,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의 모습으로 표현된 퐁파두르 부인’, 1746. ⓒ Photo RMN-GNC media, Seoul, 2010

그녀가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라는 공식 명칭을 받고 왕의 후궁으로 베르사이유 궁에 들어간 것은 24세 때의 일이다. 화가 장 마르크 나티에가 남긴 초상화는 막 피어난 장미처럼 싱싱한 시절의 퐁파두르를 보여준다.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의 모습으로 표현된 그녀는 이때부터 20년간 권력의 심장부에 있었다. 흔히 퐁파두르 부인을 야심에 가득 찬 악녀로 묘사하곤 하지만, 사실 그녀는 오직 루이 15세 한 사람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성들의 증·개축과 리모델링 작업, 세브르 왕실 도자기 제조창의 건립 등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루이 15세만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는 루이 15세가 위험 인물로 분류하던 볼테르나 루소 같은 지성인들과 거리낌 없이 교류했고, <백과 전서>나 <법의 정신> 같은 18세기 대표 저작을 읽었다. 프랑수아 부셰를 비롯한 화가들과도 친분을 쌓아 미술 후원가, 수집가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한 남자에게 헌정한 삶이 과연 그녀를 행복하게 했을까? 그녀는 외동딸이 죽었을 때조차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왕실 공식 접견에서 웃음을 보여야 했으며, 조롱과 살해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실제로 그녀는 베르사이유 궁에 들어간 지 5년 만에 그림에서 보여주는 미모를 잃었다. 편두통, 신경증, 불감증에 시달리던 이 여인은 47세 때 세상을 떠났고, 평생의 연인 루이 15세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10년 뒤, 루이 15세는 죽음이 임박하자 퐁파두르나 뒤바리 부인 같은 후궁을 두고 육신의 향락을 즐긴 죄를 자책하며 신 앞에 참회했다. 그로써 퐁파두르와 루이 15세와의 관계는 혼외 간음이나 다를 바 없는 죄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가 참회해야 할 것은 후궁을 두어 육신의 기쁨을 추구한 죄일까? 그를 대신해 여론의 돌을 맞은 여인을 오히려 지상에서 가장 큰 죄인으로 남게한 그의 어두운 마음이 아닐까?

(오른쪽) 1 피에르 구티에르, ‘두 마리의 날개 달린 스핑크스 장식이 있는 장작 받침쇠’, 1777년경. ⓒ Photo RMN-GNC media, Seoul, 2010 
2 고블랭 왕립 제조소, ‘프랑스 왕실 문장이 들어 있는 새로운 휘장 (두 번째 모델)’, 1732~1740년경. ⓒ Photo RMN-GNC media, Seoul, 2010



루이 16세와 베르사이유의 장미
그 이미지만으로 보았을 때 프랑스 왕 중 가장 억울한 왕은 단연 루이 16세다. 프랑스 혁명 이후 유포된 악의적 선전 탓에 그는 이케다 리요코의 <베르사이유의 장미> 같은 만화책에서마저도 뚱뚱한 데다 무신경하고 무능력한 남자로 그려지니 말이다. 그러나 실제 루이 16세는 부르봉 왕가에서는 드물게 지적인 인물이었다. 지리에 밝았으며 5개 국어를 구사한 인물인 루이 16세에게 그의 요란한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았다. 장 바티스트 앙드레 고티에 다고티가 그린 궁정 대례복을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녀의 화려한 취향을 보여준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쇤부른 궁에서 여덟 형제에 둘러싸여 고이 자란 그녀는 귀여운 공주 역할을 하는 일 외에는 재주가 없는 소녀였다. 매사에 즉흥적이고 오페라·무도회·게임 등을 좋아하는 철부지에다 몸매를 관리하기 위해 닭 가슴살과 아브레이 마을에서 가져온 물만 마시는 그녀, 끈기 있게 자물쇠를 연구하며 밤 11시면 시계처럼 잠자리에 드는 루이 16세는 극과 극처럼 달랐다. 세브르 왕립 도자기 제조소에서 만든 흉상처럼 그녀는 파인 드레스에 세련된 머리 모양을 자랑하는 세기의 패셔니스타이기도 했으니 기계를 분리하느라 손이 까맣게 되는 루이 16세를 이해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자유로운 가풍을 유지한 합스부르크 왕가에 비해 베르사이유는 촘촘히 조직된 궁정 사회의 표본이었다. 수많은 규범은 왕가가 귀족에게 권위를 유지하는 필수 덕목이었으나, 그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한 앙투아네트 왕비에게는 쇠사슬이나 다름없었다.

(왼쪽) 마리 앙투아네트의 아이들.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 르브룅, ‘마담 루아얄이라고 불린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드 프랑스와 그녀의 남동생인 왕세자 루이 조제프 자비에 프랑수아’, 1784. ⓒ Photo RMN-GNC media, Seoul, 2010

베르사이유의 안주인임에도 베르사이유를 버리고 싶어 했던 그녀는 곧 뒤바리 부인의 별궁이었던 프티 트리아농을 자신의 궁으로 삼았다. 전원 생활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트리아농 궁의 정원에 오리와 닭,소를 키웠다. 대귀족들 대신 일개 부르주아에 불과한 의상 디자이너인 베르탱을 아침마다 불러 드레스를 골랐고, 측근으로만 구성된 연회를 열었다. 프랑스 역사상 어떤 왕비도 앙투아네트처럼 자신의 취향으로 궁정을 만들어본 적도, 가진 적도 없었다. 당대인들이 그토록 앙투아네트를 조롱한 데에는 왕비로서 지켜야 할 의무와 권위를 버리고 궁에 틀어박혀 비밀스러운 생활을 영위하는 왕비의 고집을 이해할수도,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여인으로서 앙투아네트는 섬세한 취향을 가진 인물이며, 가족적 생활을 꿈꾸는 평범한 엄마이자 부인이었다. 그녀의 가장 큰 불행은 그녀가 꿈꾸는 이상을 절대 이룰 수 없는 한 나라의 왕비였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단두대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그 삶이 애잔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녀가 그토록 사랑한 아이들 때문이다. 앙투아네트가 가장 좋아한 화가인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 르브룅의 초상화 속 왕자와 공주는 행복해 보이지만, 실제로 그림 속 왕세자인 루이는 혁명 이후 11세의 나이로 죽었다.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도 불확실한 소리 없는 죽음이었다. 사람은 가도 그들이 간 자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루이14세도, 15세도, 앙투아네트마저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들을 추억할 수 있다. 그들이 남긴 베르사이유라는 궁과 그 돌 사이사이마다 남아 있는 손자취와 발자취를 통해서 말이다.


(오른쪽) 니콜라-키니베르 폴리오, ‘퐁파두르 부인의 처소를 위해 제작된 의자’, 1757~1760년경. ⓒ Photo RMN-GNC media, Seoul, 2010

*<프랑스 국립 베르사이유 특별전>은 2011년 3월 6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립니다.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많은 양이 유실되어 그 희소성 면에서도 독보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베르사이유의 국보급 유물 84점을 선보입니다. 문의 02-325-1077, www.versailles2010.co.kr

글 이지은(오브제 아트 감정사) 자료 제공 (주)지엔씨미디어 담당 최혜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