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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가족 이야기] 우리 집은 크리스마스 파티 대신 동지파티
크리스마스, 핼러윈, 밸런타인데이는 빠짐없이 챙기면서 우리의 절기 동지는 달력에나 적힌 ‘죽은 명절’로 여기셨나요? 유래가 오래된 이 절기는 다가오는 새해에 모든 질병·재화·악귀에서 벗어나기를, 1년 동안 무탈하기를 바라던 귀한 날이었습니다. 그 소망을 나에게서 가족으로, 이웃으로, 임금으로 넓혀나가던 이 ‘넉넉한’ 명절을 이제 우리도 가족과 함께 기념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올해부터 우리 가족의 12월엔 크리스마스 파티 대신 동지 파티입니다.

생명이 다시 시작되는 경사스러운 날, 동지
흔히 세시 풍속을 옛날 일처럼 생각하지만, 결코 옛날 일만이 아니다. 요즈음에도 한 해를 지내며 수많은 명절을 휴일로 정해놓고 각각의 명절에 맞는 행사를 즐긴다. 그 가운데에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명절 또는 전통적 명절이 있지만 서양의 것을 무턱대고 흉내 내는 경우도 많다. 더구나 요즈음 새로 생겨나는 절일 풍속은 우려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심지어는 교묘한 상술과 결합된 국적 없는 ‘OO 데이’ 같은 명절이 만들어지고 있다. 명절은 단순히 놀고 먹고 즐기는 날이 아니다. 세계의 각 민족은 세시의 절일이 되면,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며 내적 깊이를 다진다. 또 온 가족, 온 마을 주민, 온 국민이 하나가 되는 축제의 날이기도 하다. 예전의 우리에게는 좋은 명절이 많았다. 그 가운데에는 완전히 잊힌 날도 있지만, 아직 우리 생활에 남아 있는 날도 있다. 지금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되면 텔레비전을 보며 보신각 타종을 기다리거나, 세계 각국에서 새해를 맞는 풍경을 감동스럽게 보고 있다. 요란하게 축포를 쏘아대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섣달 그믐날 폭죽을 터뜨리며 거리를 몰려다니던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제야를 맞아 차분히 한 해를 돌아보며 지은 제야시 除夜詩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즉 놀고 먹는 것은 서방 것을 쫓아 하지만, 깊이 있게 자신을 성찰하던 우리의 전통은 내팽개친 것이다. 우리의 명절은 우리 삶이 반영되어 있고, 지혜가 담겨 있으며, 교훈이 숨 쉬고 있다. 우리 삶의 방식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삶의 의미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명절이 지금은 필요 없는 행사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갖는 의미는 지금도 유효하다. 그래서 명절의 세시 풍속은 바뀔 수 있지만, 그 정신은 되살려야 하는 것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 우리에게는 동지 冬至라는 좋은 명절이 기다리고 있다. 동짓날 옛사람들이 행하던 세시 풍속 안에는 어떤 정신이 깃들어 있는지 살펴본다.

동지는 1년 가운데 태양의 활동이 가장 미미한 날로, 음기가 가장 성한 때다. 그런데 음기가 가장 성한 이때는 거꾸로 말하면 양기가 다시 시작되는 때이기도 하다. 따라서 옛사람들은 이날에 “일양 一陽이생한다”고 하며 경사스러운 날로 여겼다. 또 민간에서는 동지를 ‘아세 亞歲’라고 하는데, 이는 정월 초하룻날에 버금가는 날이라는 뜻이다. 동지를 이렇게 부르는 까닭은 1년의 기후가 동지에 한 번 변하여 다시 시작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즉 여름을 지나면서부터 짧아지기 시작한 해가 동지에 이르러 가장 짧아졌다가 다시 길어지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이 동짓날 읊은 시에서 매화(모든 꽃 중에 가장 먼저 피는 꽃)를 노래한 것, ‘한 선이 더하여진다’라고 읊은 것은 모두 동짓날이 양이 생기기 시작하는 날, 생명이 다시 시작되는 날이라는걸 의미한다.

동짓날에는 많은 세시 풍속이 행해졌는데, 우선 중국에 동지사 冬至使를 파견했다. 그 목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황제에게서 이듬해의 달력을 받아오는 일이다. 이렇게 가지고 온 달력에 기준해 관상감에서 새해 달력을 만들어 임금께 올렸고, 임금은 달력을 다시 관원과 관청에 내려주었다. “그러므로 서울의 옛 풍속이, 단옷날의 부채는 관원이 아전에게 나누어주고 동짓날의 달력은 아전이 관원에게 바친다. 이것을 ‘하선동력 夏扇冬曆’이라 한다. 그러면 관원은 그 달력을 자기 출신 고향의 친지, 묘지기, 농토 관리인에게 나누어준다.”(홍석모, <동국세시기> 중) 동지 달력에 대한 기록을 시로 가장 먼저 읊은 사람은 이규보인데, 그는 “하늘에 해와 달과 별이 있어 그 운행을 살피면 계절과 절기가 변하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꼭 달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굳이 이렇게 달력을 드리는 것은 상대방의 장수를 축하하기 위한 것”(시 ‘하낭중에게 동지력을 보내면서’ 중)이라고 했다.

민간에서 행하던 일로는 팥죽을 쑤어 먹는 것이 가장 대표적이었다. 팥과 찹쌀을 끓여 죽을 만들어 사당에 먼저 올리고, 그릇에 담아 각 방과 마루, 장독대 등 집 안 구석구석에 놓아두었다가 식구들이 둘러앉아 먹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무슨 까닭으로 동지에 팥죽을 쑤어 먹었을까? 중
국 양나라 때 종름 宗 이란 이는 <형초세시기 荊楚歲時記>에 “공공씨에게 못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동지에 죽어 역귀가 되었다. 그는 붉은팥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동짓날 팥죽을 쑤어 물리친다”라고 썼다. 민간신앙에 근거해 풀이해보면, 팥죽은 붉은팥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 빛이 붉을 수밖에 없는데, 붉은색은 역귀가 싫어하는 색이므로 팥죽을 먹음으로써 한 해동안 역귀의 접근을 막아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는 믿음이 담겨 있다고 하겠다. 먹기 전에 집 안팎의 여러 곳에 놓는 것은 집안의 악귀를 모조리 쫓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팥죽을 끓여 먹는 일만큼 성하지는 않았지만 동지가 되면 집안 어른에게 버선을 지어 올리던 풍습이 있었다. 이익의 <성호사설>에 이런 자료가 전한다. “부인들은 해마다 동지가 되면 시부모에게 신과 버선을 드렸으니, 이는 장지 長至(동지부터 해가 점점 길어지므로 그같이 장수를 늘이라는 뜻)를 밟고 다니라는 뜻이다. (중략) 국가에서 동짓날 신과 버선을 임금께 바치는 것은 수복을 누리라는 것이다.” 이 밖에도 동짓날에는 여러 가지 세시 풍속이 행해졌다. <몽화록>에서 말하기를 “서울에서는 겨울을 가장 중히 여겨서 새 옷으로 갈아입고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며, 관청에서는 자물쇠를 열어놓기를 정월 초하룻날과 같이 한다”라고 했다. <연감유함>에는 “동짓날 밤 자시에 머리를 천이백 번 빗어서 양기를 도우면, 한 해가 가도록 오장이 유통되는데, 이를 이름 하여 신선세두법 神仙洗頭法이라 한다”고 쓰여 있다. 또 동짓날에 보약을 지어 먹는 풍습도 있었는데, 임동권은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중 ‘동지’ 편에서 이렇게 정리했다. “동짓날 궁 안에 있는 내의원에서는 소의 다리를 고아, 여기에 백강 白薑(말린 생강), 정향 丁香, 계심桂心(계피의 겉껍질을 벗긴 속의 노란 부분), 청밀 淸蜜(꿀) 등을 넣어서 약을 만들어 올렸다. 이 약은 악귀를 물리치고 추위에 몸을 보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한다.” 동지에 팥죽을 끓여 먹던 일도, 버선을 드리는 일도 결국 가족의 무병장수와 수복을 축원하는 뜻이 담긴 좋은 풍습이다.


캘리그래피 강병인 그림 소담 주경숙(화가)

기획 <행복> 편집부 디자인 조경미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