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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냐고 묻거든]도예가 이종능 씨 흙처럼, 불처럼 살아 행복하신가요?
대한민국 도자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유형이라는 평가를 받는, 원시시대 토기를 닮은 도자기 ‘토흔’의 작가 이종능 씨. 도예를 전공하지도, 어느 장르나 계파에도 속하지도 않아 우리에게 덜 알려진, 오히려 일본 컬렉터들에게 더 알려진 도예가다. 11월 16일부터 일본에서 큰 전시를 앞둔 그가 가마에 불 지피던 날, 그를 만나러 갔다. 어디에서 이토록 뜨거운 생명을 만날 수 있을까.


지구상 어떤 곳의 흙과도 다른 우리 흙의 본성을 도자기에 담고 싶다는 도예가 이종능 씨. 그래서 그의 작품 이름도 ‘토흔’, 곧 흙의 흔적이다. 질감과 형태에서 흙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훨훨, 훨, 훠어얼. 불이여 타올라라. 장작 가마에 불을 지핀다. 본봉에 먼저 불을 지피고, 본봉이 끝나면 옆에서 불을 때는 봉들로 옮겨가며 불을 지핀다. 강원도산 50~60년생 소나무가 제 몸을 던지며 타오른다. 불이 춤을 춘다. 시뻘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불이 노래를 부른다. 탕, 탕, 불티를 날리면서 불이 노래를 부른다. 이 순간 도예가 이종능은 불의 춤, 불의 노래를 관장하는 헤파이토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불의 신)다. 불과의 씨름은 장장 50시간 동안 계속될 것이다. “가마에 불 때기 전에는 생각을 없앱니다. 기대할 권리는 내게 없는 것 같아요. 단지 기다릴 밖에요. 이 마음이 가마 속에 있는 도자기에게 전달되겠지요. 내가 편안하면 그 안에 있는 도자기도 편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일 년에 한 번, 이 도자기 가마에 불을 지피기 위해 그는 불면의 밤낮을 보냈다. 1300℃의 장작불이 자신을 태워 무 無의 세계로 돌아가듯 그도 자신을 무 無의 상태로 태워버릴 기세다. 원시의 토기처럼 흙냄새를 다 씻지 않은 그의 도자기 ‘토흔’은 이렇게 무의 세계를 갈망하는 두 존재가 창조한 것이다. 흙의 본질을 생각하게하는 토흔. 아무런 기교 없이 흙 자체가 예술이 되는 도자기, 그래서 바로 ‘무의 예술’인 토흔. 그가 왜 그리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란 노래를 좋아하는지 어렴풋이 알겠다. “한 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빛나는 불꽃으로 타올라야지….” 이 비장한 가사에 왠일인지 마음의 그늘이 개인다.


소설가 최인호 선생은 그를 두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어린애처럼 천진한 사람”이라 했다. 그는 ‘흙과 불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라고 화답했다.

그는 박수근의 납작 지붕 그림처럼 야트막한 산에 안긴 납작한 황토집에 살고 있다. 조선의 흙을 고스란히 도자기에 담아내겠다는 꿈을 안고 경기도 광주 퇴촌에 들어앉은 지 20여 년째다. 그의 흙 이야기를 풀어내려면 그 구불구불한 인생길과 그 안에 담긴 도자 인생을 좀 찬찬히 둘러봐야 한다. 바리데기 공주가 아버지 살릴 약물을 구하러 가던 구만 리 길처럼 돌고 돌아 도착한 그의 도자 인생을.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았을뿐더러 남과 똑같아지는 걸 두려워한 그는 경영학도였던 대학교 2학년 때 ‘삶을 경영하기 위해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게 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종이 위에 하고 싶은 일을 가득 적어놓고 하나씩 지워나가다 보니 맨마지막 남은 것이 ‘도공’이었다. 그때부터 전국의 도자기 가마와 옛 가마터를 찾아다녔다. 지리산 일대에 흩어진 분청사기 파편을 수집해 그 태토를 연구했다. 조상들이 빚던 청자나 백자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신열이 올랐다. 졸업 무렵부터는 아예 경기도 이천의 도자기 가마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대부분의 가마에서는 청자, 백자, 분청을 굽고 있었다. 박물관에 있는 청자나 백자와 얼마나 비슷하게 만들어내느냐 하는 것이 그 작품의 수준으로 평가받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게 원래 내가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대요. 우리가 과거의 청자, 백자, 분청에 가치를 두는 건 선조들이 자신의 삶과 시대의 독창성을 담았기 때문이었죠. 선조들의 예술성 위에 내 삶과 이 시대의 독창성을 담은 도자기를 빚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어요.”

지병처럼 갈망을 달고 다니던 1989년, 그는 훌쩍 봇짐을 싸고는 일본으로, 대만으로, 태국으로 떠돌았다. 4년간 남방문화의 흐름을 추적했다. 다시 중국, 몽골, 실크로드의 이름난 가마를 찾아다니며 북방문화권의 태토와 가마 구조가 각각 어떻게 다른지 연구했다. 조선의 흙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여러 나라를 방랑하며 그 나라의 흙을 배운 시간이었다. “일본의 흙이 돌가루처럼 끈기가 떨어지고 손끝에서 버성긴다면 중국의 흙은 지나치게 끈기가 강해 자꾸 손을 밀쳐내는 것 같았어요. 우리 흙을 만질 때에야 비로소 이물감 없이 흙과 합쳐지는 느낌이었지요. 가장 아름다운 건 자연 그대로이거나 자연의 숨결이 살아있는 거잖아요. 내가 만들고 싶은 그릇도 결국 지구상 어떤 곳과도 다른 우리 흙의 본성을 그릇에 담아내는 것, 그래서 자연 그대로 아름다운 도자기였어요. 1300℃의 불길 속에서도 흙의 본성을 잃지 않는 도자기.” 1993년 귀국 후 그는 퇴촌 절골마을에 자리를 잡고 손수 흙 가마를 지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그의 ‘토흔’이다. 그는 이 강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깨끗하게 웃었다. 들꽃처럼.
(왼쪽) 거친 표면, 비대칭, 소박미로 대표되는 ‘토흔’.


1300℃의 불과 씨름 중이다. 그의 아내는 ‘이런 순간엔 그의 눈이 딴 세상에 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도예가 이종능은 빠지고 흙이 절로 빚은 도자기. 그의 아내는 그가 작업할 때 보면 손은 움직이고 있는데 눈은 딴 세상에 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흙이 시키는 대로 ‘절로 절로’ 도자기를 빚고 있는 것이다. 흙이 절로 빚은 도자기를 위해 그는 한 달에 한번 꼴로 직접 지리산과 문경에서 흙을 캐온다. 한번에 300~500kg씩 가져온 흙을 물에 씻고, 햇볕에 말리고, 공기를 넣어 숨을 쉬게한 후 태토를 만든다. 소나무와 과일나무를 태운 재로 그만의 유약을 만들고, 불쏘시개는 화력이 좋은 강원도산 소나무를 쓴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가마에 불을 지피는데 ‘작품’이라 부를 만한 걸 한 점도 못 건지는 때도 있다. 그래서 20여 년의 작업 기간에 비해 작품 수가 많지 않다. 그마저도 주로 일본 컬렉터들이 찾아간다.

토흔은 대한민국 도자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유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청자, 분청, 백자 등과 같은 ‘장르’에 끼워 넣기 애매한, 굳이 비교하자면 색감과 형태 등이 원시시대의 토기를 닮은 도자기다. 유약없이 투박하고 거칠게 구운 표면, 불에 그을린 듯 어두운 색감, 비대칭의 울퉁불퉁한 모양에서 원시와 모성이 느껴진다(비대칭, 미완성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시인 문정희 선생이 이번 호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에 쓴 글을 참고하길. 토흔의 비대칭미와 미완성미는 문정희 선생이 말하는 ‘곡즉전’과 통한다). 흙이 ‘절로’ 빚어내는 ‘토흔’을 두고 한 평론가는 ‘무지 無知’라는 절묘한 표현을 썼다. “그의 도자기에서는 무지가 보인다. 시답잖은 앎(知)의 기교가 없는, 흙의 기를 그대로 순박하게 빨아들인 도자기.”(영상학 박사 정근원 씨)

이 ‘무지의 예술’은 그의 성정을 빼닮았다. 두 번 만나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 그는 아이 같아서 더 어른 같은 사람이다. 매일 먹는 밥이 여름처럼 뜨겁고, 들이켜는 물이 겨울처럼 차갑다는 사실에 눈물 지을 줄 아는 사람. 시답잖은 지 知를 넘어선 무지의 사람. 그리고 예술가인 ‘척’하지 않는 자연인. ‘척’하지 않으며 살기란 얼마나 힘든가. 그와 친분을 나누는 작가 최인호 선생은 그에 대해 이런 글을 썼다. “나는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곤 한다. 이것은 참으로 평범하지만 강렬한 인상이다. 오늘날 거의 모든 문화가 거짓에 오염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산은 어린애처럼 천진하다. 타고난 천성 탓도 있겠지만 그가 흙을 만지는 도예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흙과 불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란 그의 말은 내게있어 하나의 충격이었다.” 거칠거칠한 그의 야성이 척박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것일 테다.


1 지리산과 문경에서 캐온 흙으로 도자기를 빚고, 소나무를 태운 재유에 담근다. 중지가 문드러지는 부상을 입은 후 도자기는 손이 아닌 가슴으로 빚는다는 걸 알았다.
2 스스로 ‘도쿄 대첩’이라 부르는 일본 전시 준비에 한창이다.

그가 도자기 위에 그리는 그림에서도 무지의 맛이 난다. 붓 대신 손가락으로 흙을 매만져서 그려내는, 쇳가루로 색을 내는 그 그림에는 들풀, 바보 학, 소와 아이가 뛰논다. 특히 소를 즐겨 그리는데 그가 어릴 때 쇠꼴 베어다주던 바로 그 소다. 소도, 소를 베고 누운 아이도 모두 웃고 있다. 잠자는 소조차 웃고 있다. 그야말로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운 존재다. 그는 토흔 외에 달 항아리와 진사도 빚는다. 그가 빚은 달 항아리는 맏며느리처럼 후덕한 것, 막내딸처럼 새초롬한 것까지 해외에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2007년에는 국악 월드 뮤직 그룹 ‘들소리’와 함께 영국의 대영박물관에서 달 항아리 특별전도 열었다. 진사 작품은 그의 작품 중 드물게 화려하다. 불의 흔적이 만들어낸 옥색과 자주색의 대비가 대단히 힘 있다.

“18년 전쯤 일본에서 도자기를 연구할 때 가마 위에 쌓은 장작이 무너지면서 오른손 중지가 문드러졌어요. 지금도 그 손가락은 뭉툭하게 잘린 상태죠. 그러나 손가락 부상의 절망은 잠시였어요. 손가락을 다치고서야 비로소 도자기는 손 기술이 아닌 가슴으로 빚는다는걸 깨달았어요. 그 사고가 없었다면 되레 꾀를 부리는 기술만 늘었을거예요.” 그렇게 손 기술이 아닌 가슴으로 빚게 된 그의 도자기들. 꿈과 이상이 붉은 이 남자는 도쿄에서 큰 규모의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11월 16일부터 주일 한국문화원 갤러리 미(MI)에서 열릴 <토흔 나들이전>이 그것이다. 스스로 ‘도쿄 대첩’이라 부르는 이번 전시를 통해 토흔과 백자 달 항아리, 진사 등 70여 점을 선보일 계획이다. 토흔, 곧 우리 흙의 흔적을 일본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탓이다. 일본 전시가 끝나면 중국과 미국으로 해마다 움직일 계획이다. “나는 윗대의 사람들이 내게 이런저런 것들을 물려주었다고 믿고 있어요. 단지 피를 통해서만이 아니에요. 감정의 맥박이라는 보이지 않는 동맥을 따라 내게 전달되어오는 무엇이 있어요. 거기에 내 이야길 더하면 사람들에게 아주 미미한 파동의 충격이라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청청한 눈빛과 함께 빛나는 그의 꿈. 그가 다시 불과 맞선다. 겨릅대처럼 마른 몸으로 저 센 불과 맞선다. 어깨를 덩실거리고 엉덩이를 둥싯거리는 춤사위 같다. 슬픔조차도 이날은 함께 춤을 춰줄 것 같다. 아직도 불타고 있는 남자, 이 가마불이 꺼지더라도 머지않아 그는 또다시 끔찍하게, 치열하게 타오를것이다. 이쯤에서 그가 좋아하는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다시 흥얼거리지 않을 수 없다.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한 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빛나는 불꽃으로 타올라야지….”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 이종능 씨와 <행복>의 인연은 꽤 각별합니다. <행복> 2010 년 4월호 ‘늦둥이 가족’ 특집에 그는 마흔아홉의 나이에 첫아이를 낳은 늦둥이 아빠로 등 장했습니다. 행복한 늦둥이 아빠의 일상을 보여주느라 그의 도자기 이야기는 접어두어야 했고, 그의 흙빛 도자기에 매료된 기자는 못내 아쉬웠습니다. 지난 6월 <행복>이 준비한 인도 둥게스와리의 극빈층 아동 돕기 바자회에 그는 추정가 1천만 원 이상의 달 항아리 작품을 기증했습니다. 이번 일본 개인전의 사전 준비를 위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그는 아 들 지우 또래인 둥게스와리 아이들의 분유 구입을 위해 써달라며 국제전화로 작품 기증 의 뜻을 전했지요. 그렇게 바늘땀처럼 촘촘히 이어진 <행복>과의 연은 이번 기사를 통해 더 촘촘해질 것 같습니다. 그의 작품은 www.tohheun.com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글 최혜경 기자 사진 하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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