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우리 문화 들여다보기] 조상들이 생각한 아기 탄생의 비밀 2
“금처럼 빛나고 옥처럼 아름다운 아기가 되어라”

보다 현명하고 건강한 아기를 낳고자 하는 것은 모든 산모의 바람이다. 혹시 태중의 내 아기가 뒤처지는 건 아닌가 싶어 검증되지 않은 태교를 허겁지겁 따라 하는 경우도 많다. 요즘은 태아 조기 영어 교육부터 시작해 태교 음악, 태교 미술 등 온갖 유별난 태교법이 유행하고 있다. 아기에 대한 관심은 잉태되는 그 순간부터 시작한다. 어머니의 태중에 아기가 들어서면 어엿한 한 인간으로 여겨 말과 행동을 조심한다. 이것이 태내 교육, 즉 태교의 참 의미이다. 아기는 성정과 언행이 어머니를 닮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태교를 했을까. 태교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 말 포은 圃隱 정몽주 鄭夢周의 어머니 이씨가 남긴 <태중훈문 胎中訓文>이다. 그는 “선현의 행적을 더듬고 그에 관한 책을 독서하며, 나도 그와 같은 위인을 낳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보통 인간이 행하기 힘든 행동을 해야 한다”며 태교의 중요성을 말했다. <규범 閨範>을 지은 해평 윤씨는 “자식을 가르친다는 것은 자손을 가르쳐 깨우친다는 것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모태 母胎에서 10개월 동안 있기 때문에 그 용모ㆍ성품이 어머니와 비슷하니 성인이 태교를 말하는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림)
이수정, ‘골똘히 생각하다’, 캔버스에 유채, 100×100cm, 2010


아이가 똑똑하지 못한 것은 아버지 탓?
흔히 태교는 어머니만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어머니의 태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아버지의 태교이다. 1800년에 쓰인 우리나라 태교의 지침서라 할 수 있는 <태교신기 胎敎新記>에서 사주당 師朱堂 이씨는 아이가 똑똑하지 못한 것은 아버지의 태교가 부족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잉태시 부친의 청결한 마음가짐은 모친의 열 달 못지않게 중요하다. 부부는 날마다 공경으로 서로 대하고 예의를 잃거나 흐트러짐이 없어야 하며, 몸에 병이 있거나 집안에 근신해야 할 일이 있으면 그 기간은 부부가 합방을 금하고, 헛된 욕망이나 요망스럽고 간악한 기운이 몸에 붙지 않게 하는 것이 자식을 가진 부친의 도리이다. 고로 아기가 똑똑하지 못한 것은 부친의 탓이다.” 조선 최고의 명의인 구암 龜巖 허준 許浚도 <동의보감 東醫寶鑑> 에서 “태어날 아이의 성품은 물론, 한 가정의 길흉화복조차도 아버지의 마음가짐에 좌우된다”고 하며 아버지의 태교를 강조했다. 옛날 명문가에서는 내훈이나 계녀서 戒女書를 두고 태교를 행했다. 상류층 부인들은 고귀한 기품을 지닌 물품을 가까이 두고 어루만지면서 그 기품이 태중의 아기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귀인의 초상화나 모습이 온전하고 바른 사람, 옥처럼 아름답고 빛나는 것, 성현이 훈계한 글, 봉황이나 공작 따위가 그것이다.


태아도 어엿한 한 인간이다
조선시대 왕비도 훌륭한 아기를 낳기 위해 태교를 했다. 바람직한 태교의 모델로는 태임 太任과 태사 太라는 중국 여인이 꼽혔다. 유학자들로부터 성인으로 추앙받는 문왕과 무왕의 어머니인 태임과 태사는 임신하는 순간부터 정결한 생각만 하고 부정한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불결한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고, 음란한 장소와 소리를 멀리했다. 이렇게 태교를 실천하여 문왕과 무왕처럼 훌륭한 자식을 낳았다고 한다. 서양과 우리의 나이 계산법의 차이에서도 태교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다. 서양에서는 태어난 후 1년이 지나야 비로소 한 살이 되지만, 우리는 어머니 복중에서 보내는 10개월도 아기의 나이에 포함하여 태어나면 바로 한 살을 먹게 된다. 이처럼 뱃속의 태아도 어엿한 한 인간으로 여겼기에 태교를 중시한 것이다.


순산을 위한 비방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과거에 출산은 산모와 아기의 생사를 가르는 긴박한 순간이었다. 출산이 얼마나 위험했으면 산실에 들어가는 산모가 신발을 돌아보며 “다시 살아 저것을 신을 수 있을까”라며 탄식했을까. 사정이 이렇다 보니 보다 쉽고 편안하게 출산하기 위한 방책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난산의 경우 우리 조상이 가장 선호한 방도 중 하나가 부적을 태워 그 재를 마시는 것이었다. 궁중에서는 왕비가 해산할 자리에 올라앉은 후 순산을 기원하기 위해 산실 벽에 붙인 최생부 催生符를 떼어서 바늘 끝에 꿰어 촛불에 태운 다음 그 재를 따뜻한 물에 타서 마셨다. 또한 분만을 쉽게 하기 위해 산모에게 남편의 허리 끈을 둘러주거나 남편의 옷을 덮어주기도 했고, 남편의 이름을 쓴 종이를 임산부의 발바닥에 붙여주기도 했다. 또 순산한 산모나 다산한 부인, 쌍둥이를 낳은 부인의 치마를 입혀주거나, 이들을 불러와 산모의 배를 문지르도록 했다. 이외에도 ‘아주까리기름(피자마유)에 미끄러지듯이’ 순산하라는 뜻으로 산방에 피자마대를 세우기도 하고, 느릅나무 지팡이나 털어낸 참깻단을 산방 네 구석에 놓거나 도끼를 산모 자리에 놓기도 했다. 그도 아니면 방 빗자루를 거꾸로 세워 순산을 기원했다. 한편 ‘달걀 빠지듯이’ 아기를 쑥 낳으라는 의미로 날달걀이나 참기름을 산모에게 먹이기도 했다. 강화도에서는 조산 기나 유산 기가 보이면 송사리를 생으로 먹였다. 송사리는 물을 거꾸로 잘 타고 올라가기 때문에 그것처럼 아이가 붙으라는 의미였다. 또 호박 줄기처럼 잘 붙으라는 뜻에서 꼬불꼬불한 호박 줄기를 달여서 먹이거나, 대문 빗장을 톱질해 그 가루를 먹이기도 했다. 또한 아이가 어머니 몸속에서 답답할까봐 집 안의 아궁이, 솥뚜껑, 서랍, 대문 등 문이란 문은 모두 열어 놓았다. 여기에다 불 지핀 아궁이에 부채질을 해서 연기를 빨리 빼거나 쥐구멍을 터줬다. 이 밖에 구멍 뚫린 치마에 오이를 내려뜨리며 “헌 치마에 외 빠지듯 순산시켜주시오”라고 읊조리기도 하고, 우물에 가서 물동이에 물을 가득 채운 다음 쏟아버리기도 했다. 


삼칠일과 백일 아기 출생 3일부터 세이레, 즉 21일까지의 기간을 삼칠일속 三七日俗이라 한다. 아기가 태어난 지 7일이 되면 ‘한이레’, 14일이 되면 ‘두이레’, 21일이 되면 ‘세이레’라고 해 아기와 산모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의례와 금기를 행한다. 아기를 출산하면 산모에게는 삼신상에 놓았던 쌀과 미역을 내려다 밥을 짓고 미역국을 끓여준다. 이를 ‘첫국밥’이라 한다. 특히 미역국은 지혈을 촉진하고 소화가 잘되며 피를 맑게 하는 데 특효가 있어 산모의 건강을 회복시키는 영양제로 쓰였다. 미역국은 대체로 세이레(21일) 또는 일곱이레(49일)까지 먹는다. 산모는 하루에 6끼를 먹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우면 4끼를 먹었다. 산후에 쓸 미역은 사가지고 올 때 절대로 접지 않는데, 아기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이다. 미역을 접으면 ‘명 命 자른다’고 한다. 출생한 지 3일이 되면 처음으로 산모와 아기를 목욕시킨다. 산모는 쑥물로, 아기는 따뜻한 물이나 복숭아나무나 매화 뿌리를 삶은 물로 몸의 오염을 씻어낸다. 복숭아나무를 아기 목욕물로 쓰는 것은 복숭아나무가 다산력과 잡귀를 물리치는 힘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씻길 때는 씻는 대로 살이 붙는다 하여 첫날에는 머리로부터 아래로 씻기고, 그 다음 날은 아래부터 위로 씻겨 올라간다. 그래야 살이 골고루 붙는다고 믿었다.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입는 배내옷이다. 첫 목욕을 시킨 뒤 바로 입히거나 사흘 뒤에 입히는데, 이를 ‘배냇저고리’ ‘배내옷’이라고 부른다. 이 옷은 바늘로 꿰매며 단추를 달지 않고, 긴 끈을 붙여 가슴에 한 바퀴 돌려 맨다. 단추 대신 긴 끈을 쓰는 것은 아기의 수명이 그만큼 길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것을 이레 안에 입힌다 하여 ‘이레안’‘일안저고리’라 한다. 포대기는 반드시 해산 전에 만들어두는데, 아기가 태어난 뒤에는 부정을 탄다고 여긴 때문이다. 첫 아기의 포대기는 친정에서 해준다. 아기 물품을 살 때 값을 깎지 않는 것이 불문율로 여겨지는 것은 아기의 복을 깎는 것이라 여긴 때문이다. 배냇저고리는 형이 입던 것을 동생이 물려 입기도 한다. 첫아들이 입은 것은 재수가 좋다고 하여 재판하러 갈 때나 시험 보러 갈 때처럼 어떤 일을 풀어야 할 때 윗옷에 등바대로 꿰매 입고 나가기도 한다. 한편 왕실이나 부잣집에서는 매 7일마다 수수떡을 만들어서 앞뒷문에 차려놓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이를 ‘인 人부심한다’고 했다. 수수팥떡 외에 소를 넣지 않은 만두를 빚어 문 앞에 놓아서 오가는 사람에게 풀어 먹이기도 했다. 수수떡의 붉은 빛깔은 잡귀를 물리치고, 빈 만두는 아이의 도량이 넓어지라는 뜻을 담고 있다. 산후 21일째가 되는 세이레에는 삼신에게 흰밥과 미역국을 올리고 금줄을 걷는다. 세이레가 되면 일체의 부정이 가시고 해산에 따른 제반 금기가 해제된다. 따라서 이날 비로소 이웃이나 일가친척에게 산실을 개방하고 산모는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림)
이수정, ‘인연이 닿아 있기를’, 캔버스에 유채, 100×100cm, 2010


아이의 첫 생일, 돌
1552년 경북 성주에 사는 양반 이문건은 일기책에 돌날 손자의 돌잡이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다. “손자 숙길이의 돌날이다. 일찌감치 가서 보았는데, 방 중간에 자리를 깔고 옥책, 붓과 먹, 벼루, 활, 도장, 토환 土環, 쌀, 떡 등의 여러 물건을 차리고 숙길이를 동쪽 벽에 앉혀 놓아 세로로 그것들을 보도록 했다. 그러자 숙길이가 엉금엉금 기어 음식이 차려진 자리에 와서 쳐다보다가 오른손으로 필묵을 쥐고 한참 동안 가지고 놀았다. 또 토환을 집어 만지작거리기를 오랫동안 했다. 또 활을 집어서 놀다가 다시 창 앞으로 가서 섰다. 다시 쌀 그릇 옆에 앉더니 손으로 쌀을 쥐고 다시 앞으로 가 도장을 잡고 놀았는데, 한참 동안이나 잡고는 버릴 줄을 몰랐다. 또 옥책을 펼치고 책을 읽는 시늉을 하였다. 또 쌀알을 집어 입에 넣고 씹다가 다시 실을 잡고 흔들었다.” 어쩌면 이렇게 오늘날의 돌날 풍습과 똑같을까. 우리나라의 돌잔치 풍습이 오래전부터 이어져왔음을 알 수 있다. 돌이란 태어난 지 만 1년이 되는 날로, 다른 말로 초도일 初度日, 수일 日, 시주 試周, 주년 周年, 주일 周日이라고 부른다. 아기가 태어나 한철을 무사히 났다 하여 축하해주는 것이 백일이라면, 돌은 아기가 1년 사시사철 동안 위험한 고비를 무사히 넘겼음을 축복하는 잔치다. 때문에 돌은 백일잔치보다 훨씬 성대하게 치른다.

첫돌을 맞은 아기에게는 색동옷을 입혀 단장하는데, 이를 ‘돌빔’이라 한다. 사내아이에게는 분홍 색동저고리와 남색 바지에 마고자나 두루마기를 입힌 후 금박이나 은박을 찍은 전복 戰服을 입힌다. ‘돌띠’라 하여 붉은 실띠를 길게 하여 한 바퀴 돌려 매고 복건을 씌우며, 타래버선을 신기고 돌 주머니를 채워준다. 딸에게는 색동저고리에 분홍치마를 입히고 조바위를 씌우고 타래버선을 신기며 돌 주머니를 달아준다. 돌띠를 매주는 것은 장수를 기원하는 것이고, 돌 주머니를 채워주는 것은 아기에게 복이 가득 채워지기를 바라는 뜻이다. 돌잔치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돌잡이(돌상을 차리고 아이가 마음대로 골라잡게 해 무엇을 잡는지 보고 아기의 장래를 점치는 것)다. 아이가 활이나 화살을 잡으면 훌륭한 무인이 될 것이라 봤고, 붓, 먹, 책 등을 잡으면 학자나 문장가가 될 것이라 하며, 떡을 잡으면 먹을 복이 많을 것이라 여겼다. 쌀을 잡으면 부자가 되고, 실이나 국수를 잡으면 명이 길 것이라고 하며, 대추를 잡으면 자손이 번창할 것이라 점친다. 또 여아가 자, 바늘, 가위를 잡으면 커서 바느질을 잘할것이고, 칼을 잡으면 음식 솜씨가 좋을 것이라고 했다. 또 돌상에는 떡을 놓는데, 백설기는 아이가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로, 팥고물을 묻힌 수수경단은 고상한 품격의 소유자로 키우려는 염원과 함께 건장한 체력의 장수를 상징하는 뜻을 담고 있다. 특히 수수경단은 붉은색이기 때문에 살과 액을 막아준다고 믿었다. 송편은 속이 차라고 속을 넣기도 하고, 마음이 넓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속이 빈 송편을 빚기도 한다. 인절미는 여물고 대범하라는 의미로, 알록달록 오색 찬연한 무지개떡은 무럭무럭 자라라는 염원과 꿈이 무지개처럼 일어나고 소원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뜻을 담고 있다. 돌은 산모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람은 360여 마디의 뼈로 이루어졌다. 출산하면 360여 개의 뼈마디가 이완되는데, 그 뼈마디가 원상태로 돌아가는 데 1년이 걸린다는 것이다. 산모에게 그 1년은 출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이는 아기의 무병장수 못지않게 산모의 몸조리를 강조한 것이다.

글 정종수(국립고궁박물관 관장) 그림 이미지 제공 이수정(화가) 담당 최혜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