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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 떠나요, 경주]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반촌, 양동마을 이 마을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이 흐른다
5백 년 이상 된 고택이 즐비한 곳이어서 이 마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 안에 사람이 살고, 올곧은 도리가 깃들어 있고, 전통이 생생히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속도 경쟁의 세상 속에서 우리가 잠시 잃어버린 시간이 살아 있는 이 마을, 아이와 함께하면 훌륭한 ‘역사 교육 여행’이 될 것이다.


1 마을 동구에서 바라본 양동마을. 작아 보이지만 네 개의 골짜기에 160여 채의 기와집과 초가집이 깃들어 있다.

밥 짓는 냄새가 마을을 감싸는 아침, 휘적휘적 양동마을의 고샅길을 따라 걷는다. 역시 시골길은 시골길처럼 걸어야 맛이 난다. 미끈한 포장도로 위에서처럼 뚜벅뚜벅이 아니라 휘적휘적고샅길에 몸을 맡겨야 한다. 그렇게 걷다 보면 이 마을의 아름다움이 찬찬히 읽힌다. 이 마을은 동구 앞에서 바라보면 작은시골 동네로 보인다. 하지만 마을의 고샅길을 걷다 보면 160채의 기와집과 초가집에 400여 명이 사는 꽤 큰 마을임을 알게 된다. “말 물 勿 자 형으로 네 개의 골짜기마다 집들이 모여 있어요. 입구는 좁고 뒤로 갈수록 넓어지는 전협후광 前狹後廣의 지형이기 때문에 난리와 화적이 출몰해도 방어하기 좋지요. 이렇게 좋은 지형을 마을로 선택한 선조의 혜안에 감탄할 수밖에 없어요.” 회재 이언적 선생(1491~1553년)의 후손으로 이 마을에서 자란 이지휴 씨의 설명이다. 그는 젊은 시절 도시에서 화이트칼라로 살다 양동마을로 되돌아왔다. 도시라는 이슬의 세상을 잡고 살면서도 늘 마을 동구가 그리웠다. 지금은 문화관광 해설사로 일하며 양동마을을 알리고 지키는 데 힘쓰고 있다. 그의 자분자분한 안내에 따라 양동마을 순례를 시작한다.
언덕에 식물처럼 자리 잡은 기와집과 초가집이 눈에 들어온다. 이 집들은 각각의 땅을 가진 듯하나 실은 다른 집 지붕이 자기집 마당이고 자기 집 지붕이 또 다른 집 마당이 된다. 그 사이 좋은 풍경 속, 선비의 지조를 닮았다는 백일홍이 빼곡하다.


2 온전한 살림집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백당. 현재 손씨 종부가 관리하며 살고 있다.


3 양동마을을 세운 손소 선생이 사위에게 지어준 무첨당.

이 마을은 이제 몇 남지 않은 반촌 班村(양반이 많이 사는 동네)이면서 경주 손씨와 여주 이씨가 공존하는 집성촌이다. 보통 집성촌은 한 성씨를 중심으로 마을을 이루는데, 이 마을은 두 성씨가 모인(양민공 손소가 마을을 세웠고, 그의 사위인 여주 이씨가 이 마을에 내려와 살게 되면서 두 성씨가 공존하게 됐다) 덕분에 지금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두 집안 간에 선의의 경쟁이 계속되어왔어요. 입신하고자 학문에 힘쓰고 가문의 체면 때문에 불의한 일은 하지 않았고요. 천한 장사한 다는 손가락질을 안 당하려고 음식점같이 재물을 얻는 일에도 쉽게 뛰어들지 않았어요.”
이쯤에서 꼭 짚어야 할 이름이 있다. 바로 동방 5현의 한 사람인회재 이언적 선생이다. 일본 유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로 퇴계 이황 선생과 함께 꼽히는 어른이다. 양동마을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우뚝한 고택이 바로 이언적 선생이 지은 향단 香壇(보물 제412호)이다. “회재 선생이 1543년경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 중종이 지어준 집이에요. 회재가 병환 중인 편모를 돌보고 싶다고 간청하자 중종이 이곳에 집을 지어줬어요. 그래서 살림집인데도 관청 용도의 공간이 많습니다. 원래 99칸이었지만 한국 전쟁 중에 불타고 지금은 56칸 집이에요. 각각의공간을 세밀하게 고려해 지은 주택이지요. 보수 복원을 하기 전에는 99칸 어느 칸에나 햇빛이 들어왔다지요.” 그 옛날 회재 선생은 이 솟을대문 아래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았으리라.


4 동방 5현으로 꼽히는 이언적 선생에게 중종이 하사한 집 ‘향단’.

향단에서 고샅길을 오르니 언덕 위에 서백당 書百堂(중요민속자료 23호)이 서 있다. 양민공 손소(1433~1484년)가 1458년에 지은 집으로, 우리나라에서 온전히 남아 있는 살림집으로는 가장 오래된 집이다. “당호인 서백당 書百堂에는 기찬 뜻이 들어 있는데, 하루에 참을 인 忍 자를 백번 쓰라는 말이에요. 재산은 한정되어 있고, 정성 들여야 할 제사는 다달이 돌아오고, 종택에 찾아오는 손님에게는 후하게 대접해야 하고…. 종손이나 종부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죠. 그러니 하루에 참을 인 자를 백번 쓰는 인내력으로 종택을 보존하라고, 그 고통을 미리 예견하고 호를 쓰신 선조의 뜻이 새삼 지혜롭네요.” 가이드북에서도 볼 수 없는 역사를 회재 선생의 후손에게 듣다니, 행운이다.
서백당이 손씨 종택이라면 무첨당 無 堂(보물 411호)은 이씨의 종택이다. “양민공 손소가 사위에게 지어준 집으로 사위는 백년손님이라 해 자신의 사랑 마당과 똑같은 높이에 사위의 집터를 닦고, 집이 올라앉은 기단의 높이도 같게 했다고 해요. 사위들이 오면 반갑게 맨발로 마당까지 뛰어나가 맞이하는 예우를 갖추었다고 하고요.” 집 한 채를 지을 때도 사람에 대한 예우까지 표현한 조상들의 멋이 감동스럽다. 이 집에서 이언적 선생이 나고 자랐다.
이 밖에도 양동마을에는 국보 1점(<통감속편 通鑑續編>)과 함께 낙선당, 상춘헌 같은 고택 13채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돼 있다. 2백 년 이상 된 것만 해도 50여 채, 5백 년 된 가옥이 5채나 되니 가히 ‘고택의 집합소’라 할 만하다. 그래서 이 마을을 제대로 둘러보려면 6시간 이상은 걸어야 한다. 찬찬히 걸으며 세월의 그윽한 향취를 만끽하다 해가 이울면 한옥 민박집에 들면 된다. 툇마루에 앉아 술 한잔, 달 한잔을 마시면 시인 백거이의 시를 읊을지도 모른다. “달팽이 뿔 위에서 무얼 그리 다투시나/ 부싯돌 불빛처럼 짧은 시간에 이 몸을 맡긴 처지이면서.”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