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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전략]요리 못하는 아내에게 당신이 해주는 것만으로도 그 음식은 맛있다오!
글 윤용인(노매드 미디어&트래블 대표, www.nomad21.com, 트위터 @ddubuk)
기어이 터지고 말았다. 여자는 분노를 어쩌지 못하고 큰방과 작은방을 오갔다. 화근은 남자의 입방정이나 그 혀를 놀리게 한 건 여자이니 책임은 반반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사건의 전모는 이랬다. 여느 때처럼 남자는 늦은퇴근 후 밤 10시가 넘어 아내가 차려준 밥상을 받았다. 된장찌개, 샐러드, 생선구이가 주메뉴였다. 여자는 자신의 작품을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눈웃음까지 지으며 “찌개 잘 끓이지 않았어?”라고 종달새처럼 짹짹거렸다.
남자는 이럴 때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말을 해서는 안 되는지 알고 있다. ‘맛있다’고 하면 본전이요, ‘맛없다’고 하면 죽음이다. 아내가 음식 품평을 원할때는 무조건 ‘맛있다’를 출력해야 한다. 이 남자만 그런 건 아니다. 대한민국 남성들은 그렇게 학습받으며 자랐다. 어렸을 때 반찬 투정하면 엄마에게 주걱으로 맞고, 군대에서 반찬 투정하면 고참에게 식판으로 맞고, 결혼해서 반찬 투정하면 몸에서 들기름이 나올 정도로 아내에게 들볶였다. 처음에 남자는 모범 답안을 제출했다. “맛있어.” 그러나 여자는 그런 식상한 기계어에 만족하지 못했다. “어떻게 맛있는데?” 그 대답으로 얼마 전 읽은 <신의 물방울> 속 대사를 읊조려야 했다. “뭐랄까, 깊은 산속에 영롱하게 맺힌 맑고 달콤한 아침 이슬이 혀 위에 또르륵 굴러가는 느낌?”… 같은. 그러나 남자는 그날따라 기분 좋아 보이는 아내 앞에서 방심했다. 인간으로 변장한 구미호 앞에서 ‘나는 세상에서 여우가 제일 싫어요’라는 식의 멘트를 주절댄 것이다. “음식 맛이 문제가 아니고, 당신이 차리는 음식의 궁합이 좀 이상하지 않아? 삼겹살을 구우면 상추와 마늘이 나와야 하는데 당신은 그렇지 않잖아. 늘 삼겹살만 구워줬잖아? 지금도 그래. 된장찌개를 끓였는데 미역국은 왜 줘? 찌개에 샐러드도 뜬금없지 않아?” 정확히 3초 후, 거실에서 울리는 암사자의 포효를 들은 후에야 남자는 자신이 얼마나 무모한 짓을 벌였는지 깨달았다. “그렇게 반찬 투정하면 만든 사람은 뭐가 되냐!”
화가 나는 건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아내가 음식 솜씨 없다는 건 결혼 석달 만에 알아버렸다. 그 석 달 동안 여자는 남자에게 감자부침, 감자조림, 감자볶음만 해줬다. 국물이 없으면 밥을 못 먹는다며, 찌개는 왜 안 끓여주냐고 묻는 남자에게 여자는 말했다. “우리 고향 강원도에서는 주로 감자만 먹거든.”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는 남자는, 그렇다면 감자 넣은 수제비를 끓여달라고 했다. 그러자 여자가 말했다. “강원도 사람들은 수제비 안 먹어.” 그것이 요리를 겁내 하는 아내의 자기 방어성 ‘구라’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남자는 이후의 결혼 생활이 ‘배고플’ 것임을 예감했다. 그 후 17년 동안 여자는 남자의 입에서 요리라는 단어만 나오면 고슴도치처럼 뾰족하게 반응했다. 요리책도 사다주고, 어르고 달래도 봤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여자는 요리 자체를 즐기지 않았다. 즐기지 않으니 요리 솜씨는 늘지 않고, 솜씨가 늘지 않으니 자신감도 붙지 않고, 자신감이 붙지 않으니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지 않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예쁜 여자와는 10년을 살고 음식 잘하는 여자와는 100년을 산다던데….아쉬움은 많지만 이제 남자도 마음을 비웠다. 여자라고 다 음식을 잘해야 할 의무는 없는 거라며 자신을 세뇌시켰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고 여자도 음식에 대한 부담감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이렇게 의도하지 않은 식탁 위 부부싸움이 터지면 남자는 누구라도 붙들고 마음속에 숨겨둔 말을 속시원히 꺼내고 싶다. 밖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집 밥이 주는 의미는 식량으로서의 그것을 뛰어넘는다. 아내가 차려주는 밥상은 온종일 밖에서 전쟁을 치른 남자에게 돌아오는 최고의 평화이며,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먹을 것을 준비했다는 자기 존재감의 확인이며, 가장의 짐을 진 자가 숙명처럼 지고 가야 할 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이다. 집 밖의 음식이 아무리 맛의 기교가 뛰어나더라도 아내가 차려주는 물밥에 김치한 조각에 비할 수 없다는 게 대부분 남자의 생각인 것이다.
얼마 전부터 휴일 밤이면 얼큰한 수제비를 끓여주는 여자를 보고 남자는 감격했다. 열두 살 아들이 그것을 보고 ‘밀가루 떡’이라 불렀으니 이 집에서 수제비는 결혼 십수 년 만에 쟁취한 투쟁의 산물이겠으나, 그보다는 사실 다른 감상으로 남자는 흐뭇했다. 남자는 자기 집 대표 음식 하나쯤 갖고 싶었던 것이다. 비가 오면 호박에 감자 숭숭 썰어넣고 끓여 먹는 칼국수든, 잘 익은 김치에 꽁치 한 덩이 빠트려 끓여먹는 김치찌개든, 가풍이 되고 전통이 되며 가족 전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음식. 그리하여 아이들이 오랫동안 제 어미를 생각할 때 무의식중에 연상할 수 있는 그런 먹을거리를 갖고 싶었던 것이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어머니와 함께 사라져버린 당신의 음식이 사무치게 그리웠던 남자는 요즘 들어 부쩍 그런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다. 그러니 수제비 앞에서 한동안 수저질을 못했을 수밖에.
그러니 남자는 이제 여자가 요리에 대한 피해 의식을 거둬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남자는 진심으로 아내의 음식이 좋다. 그게 그대로 자신의 살로 갔고, 아이들의 뼈로 갔다는 생각에 밥상 앞에서 남자는 늘 고맙고 감사하다. 게다가 17년 전에 비하면 여자의 요리가 종류나 질적인 면에서 꽤 발전했음을 남자와 아이들 모두 인정하고 있다. 그러니 여자는 그저 자신감이라는 이름의 조미료만 팍팍 뿌리면 되는 것이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팍팍!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