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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 떠나요, 경주]‘경주 화가’ 박대성 화백의 삼릉과 불국사 백골의 소나무처럼 살리라
태어난 땅 청도가 아니라 마음의 고향 경주로 들어와 조용히 먹을 가는 자로 사는 박대성 화백. 그가 그리는 경주 소나무 그림은 운치 있게 바라보기보다 간절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앙상한 백골의 소나무처럼, 겨울이 오기전 얼지 않기 위해 치밀하게 몸의 물기를 빼버리는 그 나무처럼 비우고 버리며 살아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고요지경이 그 안에 담겨 있으므로.

그가 사는 경주 배동의 삼릉 숲에도, 그의 집 안에도 백골의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지금 그는 2천 호가 넘는 소나무 그림에 몰두 중이다.

숲에 물기가 도는 오후, 삼릉 소나무 숲에 부숭한 햇살이 내려온다. 햇살을 제 몸뚱이로 받아낸 후에야 소나무는 그 모습을 제대로 드러낸다. 만고풍상의 시간을 버틴 나무, 꼭 있어야 할것만 남겨둔 앙상한 백골의 나무는 아름답다. ‘아름답다’라는 말의 뜻을 곱씹게 하는 ‘아름다움’, 잎사귀 무성한 어린 나무가 따라올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박대성 화백의 집 안에도 그 백골의 미가 가득하다. 높이 2.5m, 길이 10m의 벽을 메운 소나무 그림 때문이다. 고대의 숲을 가로지르던 원시의 바람이 그 그림 속에서 빠져나와 내 뺨을 매만지는 것 같아 잠시 몽롱해진다. 매일 아침 그는 경애왕릉과 삼릉, 포석정까지 이어진 길을 걸으며 태곳적부터 묵묵히, 고요히 살아왔을 나무와 묵묵히, 고요히 인사한다. 숨을 쉬고, 기지개를 켜고, 경주의 나무·땅·하늘과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종이 위에 먹으로 부린다.
서울이라는 빠른 시간을 버리고 이 솔숲 옆에 깃들인 게 벌써 10여 년 전이다. 그는 이곳에서 TV도, 신문도, 휴대전화도 없이육식도, 과식도 하지 않으며 식물처럼 살아간다. 그 식물적인 삶을 통해 식물적인 그림을 그린다(한데 누가 식물을 여리고 연약하다 했는가. 식물의 유연한 ‘생명력’은 동물의 비루한 ‘생존력’보다 훨씬 힘이 세다. 나는 그의 소나무 그림에서 식물의 유연한 생명력, 그 기찬 기운을 느꼈다). 경주 남산과 소나무와불국사와 황룡사와 분황사와 포석정을 그리는, 명실상부한 ‘경주 화가’로서의 삶이다. “자다가 ‘스리빠’를 신고 나가도 신라유적의 ‘볼때기’를 만질 수 있는 곳이 경주 아닙니까. 안 그리고배길 수가 있나요.” 이 거칠거칠한 말투가 뿜어내는 훈기.


그는 대단히 유명한 화가다. 겸재 정선·변관식·이상범에 이어실경 산수의 맥을 잇는 작가, 한국화 대작을 외국에 파는 몇 안되는 화가(개인 컬렉터뿐만 아니라 미국 휴스턴 뮤지엄, 샌프란시스코 아시안 뮤지엄 등 유명 박물관들도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내놓는 대로 그림이 팔리는 ‘블루칩’ 작가…. 말 그대로 입신양명한 대한민국 대표 한국화가다. 그런데 ‘출세한’ 그는 왜 서울도, 고향(경북 청도)도 아닌 경주의 솔숲에서 식물처럼 낮게 엎드려 살고 있는 걸까. 그걸 알려면 그의 영광 뒤에 숨은 가시울타리 같은 세월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의 일대기는 꽤 유명해졌지만, ‘한 팔 없는 화가’라는 걸 굳이 부각하는 미디어의 선정성엔 나도 치를 떨지만…. 그 내력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그의 그림과 경주살이를 쉽사리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독학과 한 팔 그리고 경주 1945년 경북 청도 출생, 한국전쟁 직전 한의사인 아버지가 빨치산에게 ‘반동 지주’로 몰려 칼에 맞아 숨지고, 아버지 등에 업혀 있던 그는 왼팔을 잃었다. 그 후 고초의 시간이 시작됐다. 병풍 속 사군자와 제사의 지방문을 흉내 내며 그림에 눈뜬 일곱 살, 학교 선생이던 형님이 들려준 솔거 이야기, 가난했지만 자신이 그린 소나무 그림에 새가 날아올정도로 대단한 그림을 그려냈다는 솔거 이야기에 힘을 얻은 소년, 친구들의 돌팔매질과 놀림을 견디지 못해 일주일에 한두 번은 결석한 까까머리, 중학교를 끝으로 학교를 관두고 한 손이 불구라는 짠 내 나는 진실 속에서 초상화가로 살던 10대의 마지막, 동양화 화본집·마오쩌둥 수첩·추사 서첩까지 자신의 것이 될 때까지 ‘따라 그리기’ 하며 독학한 20대 초반, 이당 김은호 선생이든 서예가 석도륜 선생이든 배우고 싶은 스승이 있으면 무작정 찾아가 가르침을 구한 패기, 학맥과 인맥 없이는 발 들이기도 힘들던 1970년대의 국전에서 여덟 번 수상하고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중앙 화단을 점령한 저력, 그로부터 시작된 양명의 시간들. “없어진 내 한쪽 팔이 가장 큰 스승이지요. 남보다 ‘결핍돼’ 있으니 그만큼 더 혹독하게 몰아붙여야 겨우 채워 넣을 수 있지. 그다음으로는 그림에서 ‘무학’이고 독학인 게 두 번째 스승이죠. 독학이 오히려 좋은 스승을 더 많이 만나요. 독학은 모든 고수한테 배울 수 있잖아.” 애초부터 그는 ‘가진’ 게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삶에서도, 그림에서도 꼭 있어야 할 것만 남겨두는 게 자신과 잘 맞았다. 마치 백골의 경주 소나무처럼.


박대성 화백의 ‘불국 설경’. 동서로 긴 불국사를 한 화폭에 담기 위해 시점을 세 군데로 나눠 잡고 그렸다.

“무엇보다 자연이라는 스승을 말해야 할 거요. 그중 ‘제1자연’은 역시 경주요.” 그와 경주와의 연은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대미술의 정체를 찾아 뉴욕에서 1년을 보냈지만 그가 깨달은 건 ‘내 것을 모르고 남의 것, 서양이라는 뚱딴지부터 찾았구나’였다. 그 길로 바로 귀국해 이튿날 경주로 내려왔다. 그후 1년 동안 불국사에서 절밥을 먹으며 경주 그림만 그렸다. “불국사에 묵기 시작한 밤, 대웅전 앞마당에 섰는데 달이 정확하게 다보탑과 석가탑 사이에서 뜨더라고. 그걸 보는데 신라의 왕자가 된 기분이었어요. 그런 희열이 온단 말이야. 내가 흥분했던가 봐. 그날 화장실을 아홉 차례나 갔어요.” 그날 강신 무당처럼 몸속으로 들어온 뜨거운 열기는 지금껏 식지 않고 있다. 그는 천년 고찰 불국사에서 오히려 최첨단의 현대를 보았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1천5백년 전 불국사를 지은 김대성 선생은 최첨단의 아키텍트예요. 우선 동해에서 해가 뜨면 맨 먼저 석굴암 대불의 미간을 비추도록 석굴암을 앉혔다는 거, 대단하지 않아? 다보탑과 석가탑의 딱 중간에 달이 뜨게 탑을 배치한 것도 그렇고. 그야말로 해와 달까지 활용할 줄 아는 아키텍트지. 또 불국사엔 범영루라는 하수도가 있는데 이 큰 사찰에 하수도가 그거 달랑 하나야. 그런데도 아무리 큰비가 와도 막히질 않아. 더 놀라운 건 하수가 쏟아질 때 양쪽으로 무지개가 떠. 하수도로 무지개를 만드는 건축가는 요즘 세상에도 없을 거예요.”


1 그의 아침 산책로에 있는 삼릉.


2 박대성 화백은 추사의 예서와 마오쩌둥의 초서를 날마다 쓴다. 초서나 예서는 그 자체가 미니멀한 추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2천 호짜리 대작 ‘불국 설경’을 그려 김대성과 불국사, 경주를 경배했다. 가람이 동서로 길어 정면에서 보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불국사를 한 화폭에 담기위해 그는 세 군데로 시점을 나눠 잡고 옮겨가면서 2천 호 작품을 완성했다. 대담한 구도에 박력이 솟구치는 그림이다. 땅과하늘 사이를 자유로운 구도로 가르는 백골의 나무처럼. “경주는 땅 중 최고 땅이에요. 동해에서 불어오는 센 기운의 바람이 토함산을 지나면서 숨쉬기 좋을 만큼 걸러져요. 해저가 가장 깊은 바다도 경주에 있다고. 무엇보다 남산이라는 성산 聖山, 신라를 잉태한 성산이 경주에 있잖아. 그래서인가? 한 왕조가 한 곳에서 천년 동안 지탱한 곳은 경주밖에 없다고. 이렇게 강렬한 땅의 기운을 흡입하려면 경주에서 살 수밖에 없지. 무엇보다 하늘 평수가 가장 넓은 곳이 경주예요. 절대자가 인간에게 준 것 중 제일 좋은 게 하늘을 보는 자유인데, 지금 경주 말고 어디에서 그걸 느낄 수가 있나.” 이제 나도 경주를 앙모한다고 고백하려 할즈음 그는 소나무 예찬으로 넘어가고 있다.
“경주의 소나무는 모습이 용과 비슷해요. 왕릉 주위에 소나무를 심은 건 알에서 태어난 왕(박혁거세든 석탈해 왕이든)이 알로 돌아간다는 생각에서 출발해. 왕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알로 부활하려고 돌아간 것이거든. 돌아갈 때는 용을 타야 하지. 그래서 왕릉 주위에 용을 닮은소나무를 심은 거야.” 이 경주 소나무, 삼릉의 소나무는 사진작가 배병우 씨가 찍어 출세한 그 소나무다.

3 그는 직접 집을 설계했는데 뜰에 지은 황토방 ‘통천옥’은 하늘을 향해 창문이 뚫려 있다.


4 그의 뒤로 보이는 정자는 대나무만으로 지은 ‘묵은당’이다.

경주처럼 느리게, 정갈하게, 고요하게 삼릉의 소나무 숲에 안긴 납작한 집은 그가 손수 지었다. 천장이 낮아들어갈 땐 허리를 굽혀야 하고, 화장실도 떨어져 있는 이 집에 그는 ‘불편당 不便堂’이란 당호를 붙였다. 육신을 불편하게 해정신을 깨우고자 작정한 불편이다. ‘자기만족에 젖지 않도록 스스로 고행의 길을 만들 수 있는 자가 승리하는자’라는 믿음 때문이다. 뜰에는 그가 직접 설계하고 대나무만으로 지은 정자 묵은당 墨隱堂, 작은 천창까지 뚫린 황토방 통천옥 通天獄 (재미난 것은 이 ‘옥’ 자가 집 옥 자가 아닌 감옥 옥 자라는 것)이 있다. 수련이 자라는 연못도 있다. 이 집에서 그는 밖으로 난문은 걸어 잠그고 중정 쪽으로 뚫린 통유리창의 쪽문을 열어둔채 그렇게 그림에 빠져 산다. 밤이 이슥해져 그림을 그릴 수 없을 땐 연못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마신다. 그렇게 빗소리에 취하다 보면 어느새 구름 사이로 달이 떠오른다. 그 밤 그는 시인 묵객이 된다. 그렇게 느리게, 정갈하게, 또 열심히 사는 그에게 고요지경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그림으로 이어진다. 여기까지 썼을 때, 이건 경주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걸 난 알았다.느림, 정갈함, 고요지경…. 그는 경주와 닮은 사람인 것이다.꾸무럭해진 해를 등지고 불편당을 떠나왔다. 그와 나의 그 짧은 인연은 끝났다. 어쩌면 우린 이다음에 현생을 건너, 사람도 아닌 낯선 존재로 만날지도 모른다. 그 바다를 건너 다시 만날 때까지 나도 그처럼 서두르지 않고, 만족에 젖지않고, 뜨겁게 살다 가리라. 어둠이 소리 없이 밀려와 자동차 유리창을 적시고 있었다.


정문 쪽으로는 철문을 걸고 뒤뜰 쪽으로 유리창을 냈다. 조선 집의 참맛은 뒤뜰이라고 생각한다.

삼릉은 신라의 박씨 왕인 아달라왕, 신덕왕, 경명왕의 릉으로 사적 제219호이다. 능의 형식은 규모가 큰원형 토분이고, 표식이나 상석이 하나도 없다(지금있는 상석 하나는 최근에 설치한 것). 가운데 위치한 신덕왕릉은 1950년대 조사해 내부 구조가 밝혀졌는데, 널길을 갖춘 석실이 있고 석실 내부는 회를 칠했다. 밑에서 1.4m 높이까지 2단으로 방향 구획을 만들고 그 안에 황, 백, 주, 청의 채색을 한 흔적이 있다. 경애왕릉부터 삼릉, 포석정까지 이어진 5km의 숲길에 자리한 도래솔들이 장관이니 꼭 들러보길.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