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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 떠나요, 경주]아버지 박목월 시인과 아들 박동규 시인이 뛰놀던 천마총 마음의 그림책, 경주와의 인연
시인에게 경주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곳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뭉클한 사랑이 연상되는 장소다. 그 시절의 아버지보다 훨씬 더 나이 든 아들이, 다시 다섯 살 아이로 돌아가 아버지 박목월 시인과 함께 뛰놀던 경주를 기억의 갈피에서 끄집어냈다. 부자의 고향이기도 한 경주는 어느새 우리에게도 마음의 고향으로 다가온다.

어느 여름 한밤에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경주 시가지로 향해보라. 마치 캄캄한 벌판에 가득한 어둠의 벽을 밀고 가는알 수 없는 신비의 막막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역사의흐름이 주는 무게에 눌려 자유롭게 키가 자라지 못한 건물들이어둠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신라 천년 고도의 전통성을 지키느라 건물의 고도 제한을 해서 하늘로 솟아오르는 건물을 짓지못한 탓도 있지만, 그보다 한옥들이 도시 한가운데 낮은 층수의 새 건물과 마치 옥수수알들이 어깨를 비비며 서 있는 것처럼 붙어 있고 아무 말 없이 도시 한가운데 불쑥 솟아오른 능들이 앞길을 막는 그 신비로움은 오히려 막막한 가슴을 자아내게 할 것이다. 경주는 내가 태어나고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살던 곳이다. 경주 시내에서 삼십 리쯤 북쪽으로 가면 내 고향 건천읍 모량리가 있다. 내가 다섯 살 되던 해 우리 집은 아버지가 다니던 직장에서 마련해준 관사였는데 낮은 기와집이었다. 대문을 밀고밖으로 나서면 텃밭이 조금 넓게 펼쳐져 있고 우리 집 옆길을 따라 조금만 걸어가면 큰 절이 있었다. 어머니는 봄이면 이 텃밭에 강낭콩을 가득 심었고 가을에 추수하면 시장에 내다 파셨다. 나는 매일 아침 아버지가 출근하기 위해서 대문을 나서면 졸졸 따라서 골목길을 빠져 신작로까지 갔다가 천마총으로 갔다. 그때는 아침인데도 동네 아이들이 천마총 비탈의 잔디에 모여있었다. 어떤 아이가 집에서 누룽지라도 들고 나오면 나누어 먹고 뛰어놀던 때였다. 아이들은 여러 가지 놀이를 하다가 싫증이 나면 천마총 능 꼭대기에 올라가서 굴러 내려오기를 했다. 그 높은 능을 곤두박질쳐 굴러 내려오면 어지러워 잔디 위에 제대로 설 수가 없었다. 우리는 비틀거리는 친구들을 보면서 서로 웃으며 즐거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하얀 모자를 사 와서 내 머리에 씌워주셨다. 아버지께서는 모자를 참 좋아하셨다.왜 아버지께서 모자를 좋아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모자를 쓴다는 것이 무슨 큰 어른이나 된 듯해서 자랑스럽게 아버지가 사준 모자를 쓰고 다녔다. 어느 날 해가 질 무렵 천마총꼭대기에 올라서 우리는 또 굴러 내려가는 놀이를 했다. 데굴데굴 굴러서 바닥 잔디에 닿았다. 일어서는데 어지러워 비틀거렸더니 친구들도 웃고 나도 웃었다. 그러고 집으로 왔다. 우물에손을 씻고 얼굴을 씻는데 갑자기 생각이 났다. 모자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어두워오는 천마총을 향해 달려갔다. 놀던 자리를 몇 번이나 뒤져도 모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천마총 꼭대기로 올라갔다. 캄캄한 하늘 아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아버지께서 “모자를 어떻게 했니?” 하고 물으시면 무어라고 대답할지 무섭기만 했다. 나는 꼭대기 잔디 위에 앉아 울기 시작했다. 처음 얼굴에 흘러내리던 눈물방울이 입가에 닿을 즈음 울음소리도 커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바람 소리만 귀에 들렸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나는 천마총 꼭대기 잔디 위에 배를 깔고 납작하게 엎드렸다. 아버지는 능 밑을 몇 바퀴나 돌면서 내 이름을 부르셨다. 나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숨어 있었다. 아버지께서 천마총 주위를 한참 동안 돌다가 집으로 향하시는 것을 보면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집으로 가서 차마 들어가지는 못하고 집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께서 나오셔서 왜 집에 들어오지 않느냐고 물었다. “모자를 잃어버렸어요” 하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나를 껴안고 “이놈아, 모자는 잃어버려도 괜찮아. 집에 와야지” 하시고는 내 얼굴을 닦아주셨다. 그 후 아버지는 모자를 사주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모자 때문에 아들을 잃을 뻔했다”며 어머니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나도 들을 수 있었다. 이 가련한 모자 이야기를 기억할 때마다 나는 천마총 꼭대기에서 배를 깔고 엎드려 능 아래에서 내 이름을 부르며 돌아다니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고, 아이들과 능 꼭대기에서 굴러 내리면 어지럽던 기억이 살아난다. 능은 아버지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셨는지를 생각하게하는 추억이 된다.
이 천마총 주위에 살면서 어머니가 가을이면 강낭콩을 파실 때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머니는 콩을 따서 소쿠리에 담아 시장에 가져가셨다. 나는 곁에 앉아서 어머니가 작은 그릇에 콩을 담아 파는 것을 돕고 있었다. 그러다 어머니가 나에게 소쿠리를 지키고 있으라고 하고서는 저녁 찬거리를 사러 가셨다. 나는 소쿠리를 앞에 두고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때 누가 내 뒤에서 두 눈을 가리고 “내가 누굴까?” 하고 물어왔다. 나는 아버지인 걸 알았다. 그렇지만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세번이나 물으셨지만 나는 모르는 척했다. 그제야 아버지는 눈에서 손을 떼고 내 목을 껴안으며 “이놈이 다 알고 있으면서 말을 안하네” 하며 웃으셨다. 그날 저녁 아버지와 나와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천마총이 보이자 아버지께서 내 손을잡으시더니 “나하고 저기 올라서서 누가 더 빨리 굴러 내려오나 시합해보자”고 하셨다. 우리는 천마총 꼭대기에 올라가서 굴러 내려오기시작했다. 나는 아버지보다 빨리 내려왔다. 매일 굴러 내려오는 훈련이 되어 있어서 둥글둥글 굴러 내려와 어지럽지만 벌떡 일어섰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설프게 이리저리 굴러 내려오고 계셨다. 뒤늦게 아버지가 밑에 내려와 잔디 위에 털썩 주저앉으시며 “아이고, 이놈아. 어지럽다” 하시며 한참이나 앉아 계셨다. 그래도 우리는 웃으며 손을 잡고 집으로 왔다. 그날 밤 어머니가 부엌에서 무언가 덜그럭거리며 음식을 만드셨다. 그리고 한참 만에 어머니는 흰죽을 들고 방 안에 들어오셨다. 아버지는 누워 계셨다. 열이 나고 끙끙 앓고 계셨다. 몸살이 나신 것이라 어머니가 말했다. 다음 날 아버지는 직장에 나가지 못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누워 계신 방에 들락거리며 아버지의 눈치를 봤다. 마치 내가 잘못해서 몸살이 난 것이라 생각이 들어 놀러 나가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마당에서 왔다 갔다 했다. 저녁 무렵 방 안에 들어서니 아버지께서 나를 손짓으로 부르셨다. 가까이 가자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너하고 천마총에서 굴러 내려와 아픈 게 아니라, 요사이 일이많아서 몸살이 난 거야” 하면서 등을 만져주셨다. 나는 방문을닫고 마루에 나와 소리 죽여 울었다. 아버지가 나 때문에 병이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주신 것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경주는 내가 철없던 시절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대로 기왓장 밑에 감추고 있다. 경주에 가면 이런 수많은 이야기들과 아버지,어머니와 함께 놀던 추억이 풀벌레 소리처럼 윙윙거리며 내 귓전에 들리고 아직도 포장되지 않은 산길을 걸으면 마치 화랑도라도 된 듯이 내 모습이 달라 보인다.

박동규 선생은 1939년 경주 월성군에서 박목월 시인의 장남으로 출생했습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선생은 서울대 국문과 교수, 월간 시 전문지 <심상> 편집대표 등을맡아왔습니다. <아침 마당> 등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대중과 소통하고, 따뜻한 글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왔습니다. 몇 해 전 아버지 박목월 시인과의 추억을 담은 <아버지와 아들>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김현정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