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행복으로 떠나요, 경주]소설가 강석경 선생이 가슴에 품은 스러진 돌 위에 앉아 들어라, 천년의 숨결
나고 자란 고향은 아니지만 강석경 선생에게 경주는 되돌아가야 할 근원의 땅이었다. 오랜 시간 경주에 정착해 살며, 1천5백 년 세월의 풍화를 견뎌온 능처럼 또 하나의 풍경으로 살아온 그. 신라의 흔적에서 찾아낸 슬픔, 위로, 꿈을 담아 <강석경의 경주 산책> <능으로 가는 길>을 펴낸 그가 이번엔 1천5백 년 전 국가 사찰 황룡사의 흔적을 더듬었다.

황룡사의 흔적 중 4.8m짜리 불상인 장육존상이 있었던 자리.

올여름은 지칠 만큼 무더웠다. 설날 이후로 주거지를 옮긴 통영은 바다가 있어 다른 도시보다 시원한 편이지만 도서관이란 피난처가 없었더라면 견디기 힘들었을 거다. 지붕을 뚫을 듯 폭우가 쏟아지고 태풍이 물러가면서 더위가 수그러들자 경주로 갔다. 연차 휴가처럼 한두 달에 한 번씩 경주에 가는 일은 숨통을 트이게 한다. 톨게이트에서 경주 시내로 들어서면 높지 않은 산과 들판이 펼쳐져 눈이 서늘하다. 안개가 서린 듯한 오릉의 숲은 늘 신비롭고, 들판에 허허롭게 솟아 있는 고분은 나를 무념의 세계로 데려간다. 고도 古都에 응축된 시간-1천5백 년 전 능들이 이지러져 둔덕이 되고, 자연의 순환을 보여주는 풍경들이 근원적이어서 경주는 다른 도시와 차별화되는 깊이가 있다.
몇 달 만에 분황사에 들렀더니 발굴로 인해 출입구가 바뀌었다. 도로 쪽으로 새로 낸 서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서니 차 소리도 들리고 약간 어수선한 느낌인데, 짙은 회색 벽돌로 쌓은 3층 모전탑은 한결같은 안정감을 주면서 객을 맞는다. 선덕여왕 3년(634년)에 분황사가 창건되었고 12년(643년)에 왕이 당에 유학 중인 자장을 불러들여 대국통으로 삼았다. 이 시기 신라에는 온 나라 사람들이 계를 받고 승려가 되려는 사람들이 달마
다 늘어갈 만큼 불교가 확장되던 시기였다. 그 후로 원효가 머물면서 <화엄경소 華嚴經疏>를 편찬했고 그가 세상을 뜨자 아들 설총이 해골을 부수어 소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셨다는데, 당대의 고승들이 머물던 것을 보아도 당시 분황사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규모가 축소되고 탑도 일제 때 해체 수리되었지만, 담 옆으로 배열된 옛 석재며 배롱꽃 핀 뜰이 고사찰의 품격을 유지하고 있어 내가 좋아하는 절이다.

박경리 선생님이 돌아가시던 해 초파일엔 분황사 탑 앞에 연가 등을 달았다. 여왕이 창건한 절이고 규모도 화려하지 않아 분황사를 택했더니 하얀 연가등이 아름답게 타올랐다. 정신의 여왕같은 선생님. 그 몇 해 전 초파일에는 사람들과 함께 분황사에서 탑돌이를 하고 스님의 인도로 캄캄한 황룡사지를 등으로 밝히며 경을 외우고 목탑지를 돌았다. 어둠에 묻힌 빈 들판에서 목탁 소리 들으며 아스라한 별을 바라보니 문득 신라로 돌아
간 듯했고, 나는 감동에 몸을 맡기고 경덕왕 때 한기리의 여자 희명 希明처럼 소원을 빌었다. 다섯 살의 아이가 눈이 멀자 아이를 시켜 노래를 지어 분황사의 천수대비 앞에서 빌었더니 드디어 눈을 뜨게 되었다지. 모든 진심은 천심에 닿으소서.
무릎을 낮추며/ 두 손바닥 모아/ 천수관음전에/ 기구의 말씀을 드리노라.(<삼국유사> 중)

신라 최대의 국가 사찰이던 황룡사는 고려 때 몽골군에 의해 불에 타 없어지고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주춧돌만 남은 빈터지만 그 위용과 장엄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해 질 녘 서쪽 하늘을 향해 바라보는 풍경이 참 아름답다.

황룡사지로 나서니 초입엔 온통 황화코스모스가 흐드러져 있다. 긴 꽃줄기들이 태풍에 휩쓸려 제멋대로 뉘어지고 풍경이 황홀하다. 이 땅이 비어 있지 않다면 야성의 식물인들 몸을 붙이겠는가. 이것이 폐허의 미덕이리라.
오솔길 왼편 빈터엔 옥수수, 깨, 고추 농사를 하여 아주머니들이 거둬들이고 있는데, 붉게 영글어가는 고추 위로 잠자리가 날아다닌다. 무더운 여름에도 잠자리 떼를 보면 가을이 머지않았음을 알고 설레었다. 바슐라르 Gaston Bachelard(프랑스 철학자이자 문학 비평가)는 여름꽃 수련을 두고 “그것은 여름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렇게 여름이 가면서 우리의 삶도 흘러간다.
남산을 마주 보며 걸어가니 동쪽으로 승방지 僧房址와 강당지講堂址, 금당지 金堂址가 너른 들판에 펼쳐져 있다. 초석만 깔려 있는 신라의 빈터는 언제 와도 너른 품으로 안아준다. 시간이 할퀴고 적국의 말발굽이 짓밟았어도 뿌리 박힌 초석만은 어쩌지 못했다. 어떻게 다진 터인가! 신라 24대 진흥왕 14년(553년)에 궁궐을 월성 동쪽에 지으려는데 황룡이 나타났다 하여 고쳐 절을 창건하고 이름을 황룡사라 하였다. 주위에 담장을 쌓고 17년 만에 공사를 마쳤으며, 574년에 무게 3만 5천여 근 되는 장육존상과 두 보살상을 금동으로 만들었다. 아홉 나라의 적을 물리치고자 세운 80여 미터의 9층목탑은 선덕여왕 14년(645년)에 세웠으니 4대 왕에 걸쳐 93년 만에 대역사를 마무리한 신라 최고의 국가 사찰이었다.

그 규모는 1970년대에 8년에 걸친 발굴 조사에서 금동불입상 등 4만여 점의 유물과 높이 182cm의 대형 치미(전각, 문루 등 전통 건물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장식 기와로 클수록 건물도 크다)가 출토됨으로써 입증됐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본래 늪지이던 땅에 5m 깊이로 자갈과 흙을 번갈아 다져 판축했음이 밝혀진 일이다. 경내만 2만 4천여평이 되는 드넓은 터를 신라인이 지름 7cm의 봉으로 일일이 다진 자국이 드러났는데, 불심의 봉 자국으로 덮인 땅이라니. 황룡사지에 서 있으면 경건하기까지 하다. 나는 영혼을 과연 얼마나 다졌던가? 저 높은 곳을 향한 신라인의 치열한 불심을 생각하면 부끄럽기까지 하다. 역대 왕이 나라에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강당에 행차하여 100여 명의 고승이 모여 강론하는 백고좌강회 百高座講會를 열었는데, 자장과 원효 같은 대승이 강의한 신라 정신의 산실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해가 스름스름 물러가는데 목탑지의 초석에 손을 대니 온기가 전해진다. 태양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 온기도 영원히 전해지리라. 1960년대에 목탑의 사리 장치가 도난당했으나 다행히 2년 뒤 회수되어 탑에 얽힌 역사가 다시 입증되었는데, 경문왕 12년(872년)에 탑을 헐고 다시 세우면서 ‘만겁이 지나도록 후세 사람들에게 드러나도록’ 그 내용을 <찰주본기 刹柱本紀>에 적어 사리외 함에 넣었다. 목탑은 몽고난(고려 고종 25년, 곧 1238년) 때 불타면서 그 재가 수십 일 동안 하늘을 칠흑같은 어둠으로 뒤덮었다고 한다. 손댈 수 없는 불길의 위력조차 장엄했을 터인데, 파괴의 역사 속에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킨 초석엔 ‘만겁이 지나도록’ 선조들의 꿈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을 것이다. 이제야 알겠다. 경주의 깊이란 다름 아닌 황룡사지의 봉 자국에 묻은 신라인의 정성과 깊은 염원이라는 것을. 분황사 탑에 서린 한기리 여자 희명의 간절한 기도라는 것을. 비록 후손들이 이익에 눈이 어두워 고층 아파트를 마구 세우고 유산을 손상했지만 돌 틈에도 살아 있는 천년의 그 숨결 때문이라는 것을. 남산의 능선은 어둠에 잠기기 전 일몰에 잠시 뚜렷해지는데, 동남산 피리사에서 흘러나오는 염불 소리가 가까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온 곳도 이름도 말하지 않고 언제나 염불만 외웠다는 피리사 스님의 염불 소리가, 높고 낮음이 없고 옥 같이 낭랑하고 한결같아 성안 360동리 17만 호에 들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던 소리. 순간 기차가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오면서 옥 같은 염불 소리가 허공에 흩어진다.

강석경 선생은 대구 출생으로 이화여자대 조소과를 졸업했고, 대학 재학 중 <문학사상> 제1회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습니다. 우리가 청춘의 통과의례처럼 읽은 소설 <숲 속의 방>으로 그는 오늘의작가상과 녹원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저서로 <나는 너무 멀리 왔을까> <미불> <인도 기행> <강석경의 경주 산책> 등이 있습니다.

(왼쪽) 황룡사와는 별도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서쪽 절터. 황룡사 금당 터에 인접해 있다.

* 더 많은 정보는 <행복이 가득한 집> 10월호 294p를 참조하세요.

최혜경, 강석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