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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 들여다보기]금줄에 얽힌 문화사 경사스러운 날이니 대문에 금줄 쳐라!
<행복>의 스물세 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정종수 관장이 전통문화 속 금줄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이가 태어나면 금줄을 달아 그곳이 신성 구역임을 선포한 조상들의 이야기에서 생명을 존귀하게 여긴 마음을 읽는다.


1955년 음력 2월 24일, 해가 지고 어둠이 몰려올 때 나는 어머니 배 속에서 나왔다. 안에서 산바라지를 하는 동안 아버지는 깨끗한 짚을 추려 왼새끼를 꼬고 거기에 고추와 숯을 달아 대문에 내걸었다.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는 금줄을 단 것이 내 탄생을 축하하는 아버지의 첫 행동이었다. 나는 금줄 세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집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아버지가 대문에 금줄을 걸었다. 이를 ‘검줄’ ‘인줄’ ‘삼줄’이라고도 한다. 이 시대 이후에 병원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금줄을 구경조차 못했다. 그래서 나는 세대를 나눌 때 금줄 세대 혹은 비금줄 세대로 구분하기도 한다.

아이가 세상에 온 표식, 금줄 옛 어른들은 대문에 내걸린 금줄만 보고 아들인지 딸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금줄에 빨간 고추와 숯이 걸리면 아들이요, 청솔가지와 숯이 끼워져 있으면 딸이다. 얼마나 멋진 사인 sign인가. 또 금줄을 걸고 사방에 활을 쏘아 아기의 출생을 알리기도 했다. 그런데 금줄은 왜 왼쪽으로 꼬고, 왜 대문에 걸었을까. 금줄은 그야말로 세속적인 때가 타지 않은 깨끗하고 부정이 없는 신성한 줄이라 할 수 있다. 단순한 새끼줄이 신성이 깃든 금줄이 되려면 무언가 달라야 한다. 정상적인 새끼는 모두 오른쪽으로 꼰다. 하지만 금줄은 왼쪽으로 꼰다. 이는 오른손이 속 俗을, 왼손이 성 聖을 뜻하기 때문이다. 오른손은 늘 쓰는 손이기 때문에 때가 묻은 세속적 손이다. 반면 왼손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쓰지 않는 비일상적 손이기 때문에 성스러운 손이라 여겼다. 따라서 왼새끼는 특별한 의례용, 신성한 용도의 의미를 갖게 됐다.
원래 사람의 도 道는 오른쪽을 높게 여기고, 신의 도는 왼쪽을 높게 여겼다. 이러한 좌우 개념은 조선시대 왕릉의 예에서도 알 수 있다. 왕릉 입구, 즉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홍살문부터 정자각에 이르는 돌길을 보면, 왼쪽을 높이고 오른쪽은 낮게 했다. 왼쪽은 신이 다니는 길이고, 오른쪽은 사람이 다니는 길이기 때문이다. 세속적 인간의 세속적 공간에서는 정상적인 오른쪽 새끼가 필요하지만, 부정이 없고 깨끗한 성스러운 신들의 공간에는 왼새끼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부정과 잡귀 등의 침입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금줄은 사악함을 쫓는 벽사의 상징이요, 성역의 표시요, 성과 속의 경계선이다.

산가 産家의 금줄은 한마디로 탄생의 상징이요, 표시다. 한편 부정과 외인의 출입을 막는 파수꾼이기도 하다. 대문은 성과 속의 경계선이다. 성스러움과 부정이 넘나드는 대문! 대문 안은 성스러운 곳이요, 대문 밖은 세속적이며 부정한 곳이다. 그래서 신성한 곳과 세속의 경계선인 대문에 금줄을 친 것이다. 마을 입구에 장승을 세우는 이치와 같다. 동구 밖은 마을의 경계로 부정과 신성함이 넘나드는 곳이다. 성과 속의 경계선인 마을 입구에 무서운 얼굴을 조각한 장승을 세워 부정과 액을 막고자 한 것이다.
갓 출산한 산모와 아기는 면역력이 약해 질병에 감염될 우려가 높다. 그러므로 외인의 출입을 제한해 전염병균이나 잡스러운 병균이 묻어오는 것을 예방해야 한다. 따라서 아이가 태어나면 애아버지는 대문에 금줄을 거는 일부터 했다. 산모와 아기는 닫힌 성역 속에서 안전을 보장받았다. 금줄이 내걸리면 잡인들은 출입을 삼갔다. 비록 아기가 보고 싶은 친척이라도 금줄이 걸려 있으면 들어가지 못했다. 금줄이 걷혀야 출입이 자유로워졌다.
금줄은 보통 세이레(21일) 만에 걷었다. 영아의 배꼽이 아무는 데 적어도 21일은 걸린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 세이레면 산모와 아기가 면역력과 건강을 회복해 어느 정도 위급한 상황은 벗어날 수 있는 시일이라 여겼다.
더욱이 삼三과 칠七이란 숫자는 양의 수로 음을 누르고 잡귀를 막는 길한 숫자다. 21일은 양수인 7일을 세 번 반복하는 기간이기 때문에 양 陽이 더욱 강하다는 상징성을 띤다. <삼국유사>에서 곰이 동굴에서 기도하며 사람이 된 기간도 삼칠일, 즉 21일이다. 우리 민족은 세이레라는 기간을 금기가 해제되는 기간으로 생각했다.

왜 아들이면 고추를 달고, 딸이면 솔가지를 달까 사내아이를 낳으면 금줄에 고추와 숯을 단다. 하고많은 것 중 왜 하필이면 고추일까. 고추가 남성의 성기 모양을 닮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고추가 가지고 있는 양색 陽色, 오행의 상징성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고추는 붉은색이다. 붉은색은 방위로 봤을 때 남쪽이다. 남쪽은 음양으로 보아 양에 속하는데, 양은 음을 이길 수 있다. 따라서 양의 색인 붉은 고추는 음의 결정체로 이뤄진 귀신과 부정을 물리치고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또 남방은 불을 상징한다. 붉을 적 赤 자를 풀면 큰불(大火)이 된다. 불은 귀신이 무서워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불로 상징하는 붉은색이 귀신을 쫓을 수 있다고 여겼다. 동짓날 팥죽을 먹는다든지, 할머니들이 저승길이 밝아진다고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는 일, 혼례 때 청홍색의 실을 초례상에 거는 습속 등도 붉은색이 잡귀와 부정을 막을 수 있다는 적색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또 고추는 맵기 때문에 귀신도 싫어할 것이라 생각했다.
아울러 남근은 아이를 생산하는 원초적 힘을 가진다. 이 때문에 남근에는 위대한 힘과 마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남근과 유사한 고추를 걸면 잡귀와 부정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딸을 낳으면 청솔가지와 숯을 매단다. 솔잎은 청색이며, 청색은 방위로 볼 때 동에 해당한다. 음양오행설에 의하면 나무(木)는 오행의 목성 木性에 해당하며, 목은 방위 개념으로 볼 때 동방을 뜻한다. 동방은 해가 뜨는 곳으로 소생, 신생, 창조를 상징한다. 동쪽은 이 같은 상징성 때문에 적색과 같이 양의 기운을 가져 음을 억누를 수가 있다고 믿었다.
솔잎의 모양은 어떠한가. 솔잎은 바늘처럼 뾰족하다. 이 때문에 이것으로 찌르면 귀신이 무서워서 침범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조선 전기의 문신인 성현 成俔(예문관과 성균관의 최고 관직을 지낸 인물)의 수필집 <용재총화 齋叢話>에 의하면 “2월 초하룻날은 ‘화조’라 하여 이른 새벽에 솔잎을 문간에 뿌리는데 속언으로는 그 냄새를 벌레가 무서워서 솔잎으로 찔러 사邪를 없앤다”고 했다.
바늘 가진 놈과 칼 가진 놈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언뜻 생각하면 칼 든 놈이 이길 것이다. “칼은 한번 찌르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바늘 가진 놈이 아무리 찔러도 죽을까 겁이 나 못 찌른다. 그렇지만 바늘은 아무리 찔러도 죽을 염려가 없기 때문에 바늘 가진 놈은 맘 놓고 찌를 수 있다. 우리 속담에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결국은 바늘 가진 놈이 이긴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스갯소리에 불과하지만 귀신도 사람과 성징이 비슷하기 때문에 뾰족한 것으로 찌르면 아플 것이라 여겨 솔잎으로 귀신을 쫓고자 한 것이다. 또한 손각시(천연두)에 걸려 죽은 처녀는 관 속에 소나무 가지를 채워 몰래 교차로에 묻기도 했다. 이는 원귀의 탈출을 막고 뭇 사내가 밟고 지나가면 원귀를 달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이처럼 소나무는 그 잎이 뾰족하며 청색이고, 청색은 동방을 나타내며 양의 색으로 음을 구축할 수 있으며, 생생력 生生力을 상징해 주술력이 있다고 믿었다. 초분에 송지를 끼워놓거나 무덤가에 소나무나 잣나무를 심는 습속 등도 잡귀와 부정의 접근을 막아 보다 깨끗하게 유골을 보존하기 위한 염원에서 나온 것이다.
한편 딸을 낳았을 때 솔가지를 거는 데는 커서 바느질을 잘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솔잎은 바늘과 비슷하기 때문에 바느질을 잘할 것이라 생각했다. 반면 아들이건 딸이건 관계없이 금줄에 숯을 단다. 숯은 어떠한가. 숯은 땅속에 오래 두어도 썩지 않아 거의 영원불멸의 속성을 지닌다. 뭐니 뭐니 해도 귀신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불이다. 숯은 곧 불로 상징되기 때문에 사악한 귀신을 물리치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숯은 고래로 귀신의 빙의처 憑依處로 알려져 귀신을 매단 것과 같은 효과를 나타냈다.
금줄은 산가뿐만 아니라 마을 공동 제사인 동제를 지낼 때에도 친다. 또 장독이나 술독에도 둘러 맛이 변하는 것을 막았다. 이같이 성과 속, 안과 밖을 구분하는 금줄 문화는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지혜의 소산으로 산모와 아기,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는 역할도 했다.

궁중에서도 금줄을 달았을까 그렇다면 궁중에서도 백성들처럼 금줄을 쳐 잡귀와 부정을 막았을까. 물론 그렇다. 성현은 성종 7년(1494) 봄에 원자가 탄생하자 자신이 직접 헌관이 되어 권초례 捲草禮를 행했는데, 이때 경험한 바를 <용재총화>에 기록했다.
“궁중에서 왕자가 탄생하면 산실에 깔았던 거적자리를 걷어치우는 권초례를 행한다. 탄생한 날 쑥으로 꼰 새끼를 왕비의 산실 문 위에 걸고, 자식이 많고 재난과 화가 없는 대신에게 명하여 목욕재계하고 3일 동안 소격전(일월성신을 제사 지내던 전당으로 서울 삼청동에 있었음)에서 제를 올리고 성신 星辰에게 제사를 올리게 한다. 상의원에서는 5색 채단을 각각 한 필씩 바친다. 남자가 태어나면 복건·도포·홀·검정신·금대 金帶를, 여자면 비녀·덧옷·신 등의 물건을 노군이란 신 앞에 진열하여 장래의 복을 빌었다. 밤중에 제사가 끝나면 헌관이 길복 吉服을 입고 포단과 관복을 다른 사람에게 지워 앞세우고 궐 안의 방문 밖에 이르러 탁상에 진열하고는 향불을 피우고 재배한다. 그러면 궁녀들이 받아들고 간다.”
헌관은 산실에 걸어두었던 새끼(쑥으로 꼰)를 걷어 옻칠 함에 넣고 붉은 보자기에 싸서 내자시 內資寺(각종 식품과 직조 및 연희를 맡아보던 관원)에게 주었다. 내자시는 이를 정성스럽게 받들고 가서 내자시의 창고에 넣어두었다. 만약 여자아이면 내섬시 內贍時에서 이를 주관했다.

민간에서는 짚으로 꼰 금줄에 고추나 솔가지, 숯 등을 걸었지만, 왕실에서는 짚 대신 쑥으로 꼰 새끼를 산실 문 위에 건 점이 다르다. 왕실에서는 금줄로 아들과 딸을 구별하지 않는 대신 옷이나 치장품을 가지고 남녀를 구분하고, 엄격한 의식을 치른 점도 다르다.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 이런 권초례 의식이 약간 바뀐다. 출산 당일 순산을 알리는 뜻으로 산실에 깔았던 짚자리(산자리라고도 함)를 말아서 산실 밖 문 위에 매달았는데 이를 ‘현초 懸草’라고 한다. 붉은색 줄로 묶어 문밖에 매단 산자리는 민간에서 행하는 금줄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산자리를 걷는 권초관은 무병하고 풍상을 겪지 않은 다복하며 자식이 많은 관리 중에서 선발했다.
산자리를 걷는 의식인 권초례는 산후 7일째 되는 날 산실 대청에서 거행했다. 먼저 일관 日官이 점을 보아 시간을 정하면, 산실 문밖 커다란 상에 쌀, 비단, 실, 은 등을 진설한 다음 아기의 만복을 비는 권초례를 지냈다. 쌀은 10개의 자루에 각각 10말씩 담아 맨 앞줄에 일렬로 늘어놓았다. 그 오른쪽에 황색 비단실 10근, 왼쪽에 흰색 비단 10필을 놓고 중간에 은 100냥을 차례로 올려놓았다. 이때 사용하는 제물 등에는 모두 앞에 명 命 자를 붙였다. 쌀을 명미 命米, 실을 명사 命絲, 비단을 명주 命紬, 은을 명은 命銀이라 한 것은 아기의 수명장수를 빌기 위한 뜻이다.
권초례를 마치면 미역국과 흰밥, 백설기를 산실청 직원들에게 하사하고, 나머지는 모두 내전으로 들여가고 산실청도 해체했다. 그리고 이날 비로소 산실의 모든 금기가 해제되어 외인들의 출입을 허용했다. 그러고 나면 종실과 외척들이 들어와 아기를 볼 수 있었다.

정종수(국립고궁박물관 관장),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