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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의 대화]사진작가 세바스티안 슈티제 "지구, 우리의 유일한 집"
세바스티안 슈티제의 사진에서 세계의 근원을 만났다면 당신은 눈이 밝은 사람이다. 적도 근처, 해발 5000m의 극한 지역에서 자라는 식물을 찍은 그의 사진에서 지구의 미래를 발견했다면 당신은 영혼이 맑은 사람이다. 개인전을 위해 한국에 온 그를 만나 그 내밀한 이야기를 들었다.
달의 산맥, 달의 꽃 새 한 마리가 고요한 공기를 흐트러뜨리며 빠르게 날아갔다. “너무 빠른 것은 슬프다. 갈 곳이 멀리, 마음이 멀리에 있기 때문”이라고 시인 문태준의 시를 읊조렸다. 그때 그가 저속으로 촬영된 사진 같은 얼굴로 다가왔다.
세바스티안 슈티제 Sebastian Schutyser. 인간이 감히 발을 들이지 못해 신의 손길만이 남은 땅, 르웬조리 Rwenzori 산맥을 적외선 필름에 담은 사진가. 그의 사진 속엔 느리고 숭고한 시간이 담겨 있다. 콩고와 우간다의 경계, 해발 5000m의 험난한 산맥, 안개와 구름에 가린 비밀의 땅, 적도의 강한 태양빛과 눈의 한기가 낮과 밤으로 매일 반복되는 땅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여름과 겨울의 변화를 하루에 모두 견뎌내느라 거대한 크기와 독특한 형태로 성장한 고산 식물을 그는 파인더 속에 밀어넣었다. 안개와 구름에 쌓여 비밀 속에 가려졌던 아프리카의 속살이다.
“두 살의 나이, 내 부모님이 아프리카 콩고에 살기로 작정한 순간부터 나는 한번도 맘속에서 아프리카를 떼버린 적이 없어요. 열두 살 때까지 살다 다시 벨기에로 돌아와서도 늘 콩고의 정글을 꿈꿨어요. 적도의 붉은 흙과 도마뱀들…. 그 먼 땅으로부터 날 갈라놓을 만큼 긴 시간이 흘렀지만 한번도 그 대륙을 잊은 적이 없죠. 학생 시절에 반은 콩고 사람, 반은 벨기에 사람인 여자 친구 집 서재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찍은 르웬조리 산맥 사진을 우연히 봤어요. 그 순간 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어요. 아프리카에서 한 소년을 데려올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한 소년으로부터 아프리카를 떼어놓을 순 없는 일이었지요.” 그는 귀향 본능에 이끌리듯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10여 년의 시간이 흘렀고, 아프리카의 구름 속 피안은 그의 사진에 담겼다.

(왼쪽) 세바스티안 슈티제의 개인전 이 7월 31일까지 갤러리 선컨템포러리에서 열린다. 태곳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르웬조리 산맥의 식물군과 풍경을 적외선 흑백 필름으로 담아낸 작품 18점이 소개된다. 문의 02-720-5789, www.suncontemporary.com


‘Mount Baker’, silver gelatine print, 101×151cm, 2005

그의 사진을 찬찬히 눈에 담아보라. 가슴팍으로 고대의 숲을 가로지르던 원시의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그 옛날 대기를 떠돌았을 대지의 내음도 느껴질 것이다. 그건 이 땅에 대한, 자연의 숭고함에 대한 한 인간의 경탄이 사진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는 르웬조리의 원초성을 담기 위해, 색채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적외선 흑백 필름으로 사진을 찍었다. 신이 창조하신 죄 없는 풀, 나무, 꽃들의 얼굴을 태곳적 그대로 사진에 담았다.
“적외선 흑백 필름으로 촬영하면 엽록소가 담긴 녹색 이파리가 모두 하얗게 보여요(신기하게도 인공의 잉크로 물들인 초록색 옷 같은 건 그냥 어둡게 보인다고 한다). 대낮에 찍었는데 하늘은 검게, 배경은 어두침침하게, 초록색 이파리들은 하얗게 보이는 거죠. 마치 달빛 아래에서 식물을 촬영한 것처럼. 이 산의 다른 이름이 ‘달의 산맥 The Mountains of the Moon’입니다. 산 위에 달이 뜨면 정상의 새하얀 눈이 달빛을 아름답게 반사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더군요. 내가 찍은 이 꽃들은 ‘달의 꽃’이 되겠네요. 적외선 필름으로 찍다 보니 거친 입자가 많이 보이는데, 마치 점묘화 같죠. 태고의 신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느낌이 들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은 실재하는 자연이라는 겁니다. 태곳적부터 자연은 이렇게 아름다웠다는 것의 실증이 현재의 이곳입니다.”
그는 이 실재하는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 구도자처럼, 탐험가처럼 산맥에 올랐다. 네 명의 짐꾼, 한 명의 가이드, 한 명의 군인(군사 지역이므로)과 함께 사진 장비와 식량, 텐트 등을 나눠 멨다. 비탈길, 벼랑길, 진흙탕을 더듬으며, 눈비가 계속돼 미끄러운 이끼 위를 포복하며, 기압이 낮아 호흡 곤란과 두통을 겪으며 하루에 5~10km씩 걸었다. 한 번 올라가면 3주 동안 산속에서 겸손하게, 성실하게 셔터만 눌렀다. 그렇게 태어난 겸손하고 고요하고도 열렬한 그의 사진.


1 ‘Mosque_Koroboro’, Mali


2 ‘Mosque_Wango’, Mali

우린 너무 멀리, 너무 빨리 달려와버렸다 르웬조리 산맥을 찍기 몇 년 전 그는 대형 카메라와 삼각대를 메고 아프리카의 말리 내륙을 횡단하며 아프리카 사람들의 초상을 찍었다. 인류의 기원이 그 사람들의 얼굴 속에 들어 있었다. 그 후엔 말리 니제르 강 내륙을 100여 일 동안 자전거로 샅샅이 훑으며 모스크(이슬람 사원)를 촬영했다. 어도비 adobe(볏짚과 진흙을 섞어 만든 벽돌로 지은 집) 기법으로 만든 100여 개의 모스크를 찍으며 흙의 순환성(흙으로 지었다가 바람에 풍화되어 다시 흙이 되고, 다시 그 흙으로 집을 짓는)을, 자연의 윤회를, 시간이 스치고 간 흔적을 찬양했다.
“아프리카는 이제 너무 흔한 소재가 됐어요. 많은 사진작가들이 가난과 질병에 찌든 비극적인 아프리카만을 즐겨 담거나 실체 없이 공허하게 ‘원시’ ‘야생’ ‘근원’만을 이야기했죠. 하지만 내가 살았고, 어릴 적부터 알고 있는 아프리카에는 뭔가 다른 게 존재해요. 아프리카는 매일 새롭게 깨어나며 다시 창조되는 땅이에요. 우리의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땅이죠. 풀어 말하면 이런 이야기죠. 지구는 우리의 유일한 집이고, 유일한 안식처예요. 원래 이 집은 평화롭고 아름다웠죠. 그런데 지금 우리는 ‘초고도화된 문명’의 탐욕 때문에 이 집 주위에 불을 지르고 있어요. 집 안으로 불이 옮겨붙기 전에 최대한 빨리 자연을, 지구를 구해내야 한다는 걸 내 사진을 보며 사람들이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그렇다. 우린 너무 빨리, 너무 멀리 내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지구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지쳐버렸다. 그가 사진 속에 담아낸 지구의 모습은 우리의 거칠어진 정신을 반성하게 만든다.


3 ‘Nuestra Se ora del Granado’, Albaina(Spain)


4 ‘Ermita de Miralpeix’, Capella(Spain)

2004년부터 그는 스페인 북부 지역의 에르미타 Ermitages(고대 로마 유적과 관련된 종교 건축물로 종교 세력으로부터 도피한 신자들이나 세상을 등지고자 했던 은둔자, 여행자들이 바람과 추위를 피해 잠시 머물던 암자)를 찍고 있다. 그 외딴 암자들에서 그는 영적인 숭고함을 보았다. 산과 계곡을 따라 흩어진 1000여 개의 에르미타를 7년 넘게 찍고 있는데, 나무 상자에 작은 구멍 하나가 뚫린 핀홀 카메라가 도구의 전부다. ‘빈자의 카메라로 찍은 빈자의 교회’다. 그는 전시를 위해 한국에 여러 번 방문하고는 한국의 고인돌에 매료됐다. 군더더기 없이 자연 그대로의 돌을 올려놓은 고인돌에서 또 다른 ‘근원’ ‘본향’을 보았다(아직은 자료 조사 단계 중이고 작품화할지는 결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그를 ‘시간 여행자’라 부르고 싶다. 너무 빨리, 너무 멀리 달리느라 우리가 그동안 건사하지 않은 것, 사라져가는 것, 인류가 잊은 지구를 ‘순간 기록 장치’인 사진에 담는 시간 여행자. 미래의 시간을 위해 그것을 되돌아보라고 충고하는 사람. 그의 사진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자 마음에 조금씩 고요가 차올랐다. 아프리카에 가고 싶어졌다.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