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포토 에세이]여행 작가 최갑수 씨의 골목 산책 골목길 접어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좁은 굽잇길 하나가 서너 채의 집을 품어, 그 길로 할아범도 아범도 새악시도 골목대장도 모두 모여들게 하던 골목. 사람들의 마음을 묶어주는 마을 공화국의 전당이자, 감정의 정거장이던 그곳.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골목이 점점 상처 입고 사라지고, 살아남더라도 무국적의 ‘거리’로 남게 된 이 시절, 시인이자 여행 작가 최갑수 씨가 오래된 골목을 들여다봅니다. 그곳엔 느리게 쌓인 먼지와 기억, 그리고 사람들이 아직도 살고 있습니다.


문현동 안동네
문현동 안동네, 부산에서 가장 예쁜 벽화마을로 불리는 곳이다. 벽마다 화려한 원색으로 치장하고 있다. 어느 벽에는 돌고래와 열대어가 그려져 있고 어느 벽에는 줄넘기하는 아이들이 그려져 있다. 두둥실 뜬 흰 구름이 그려진 벽도 있다. 그리고 그 벽 아래에 낡고 오래된 것들이 서 있다. 바퀴가 부러진 자전거가 비스듬히 기대어 햇볕을 받고 있고 한쪽이 깨진 채 대파가 심어진 항아리 화분이 덤덤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담벼락 아래에서 졸고 있는 고양이와 개의 표정도 어딘지 낡았다. 벽 너머로 흘러나오는 정오 뉴스도 몇 년 전 낡은 소식 같다. 그 낡은 것들은 어쩌면 책갈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자신들이 한 시절 사랑했던 생의 한 부분을 기억하기 위해,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슬며시 끼워놓은 책갈피…. 골목 곳곳마다 깃들여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고 지붕 아래로 주황빛 불빛이 새어 나왔다. 사람들은 하루의 일을 접고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밥을 나누고 있을 것이다. 모여 있는 마을의 불빛은 얼마나 뭉클한지, 가슴 한구석을 따끈하게 데워주는 것 같다.

가는 길 부산 서면 지하철역 7번 출구로 나와 10번 버스를 타고 전포고개에서 내리면 된다. 또는 지하철 2호선 문전역에서 택시를 타고 ‘벽화마을 돌산공원’에서 내려도 된다.


서울 홍제동 개미마을
이 마을은 가난한 동네다. 주민 대부분이 일용직에 종사하거나 국민기초생활수급 대상자라고 한다. 멀리서 바라보며 스산해진 마음은 마을로 들어갈수록 누그러든다. 강아지며 바다, 나무며 꽃, 구름, 해바라기, 종이비행기… 담벼락마다 총천연색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모두 대학 미대생들이 완성한 특별한 벽화다. 이 마을에서 필요한 건 산책자의 자세다. 산책자는 후미진 골목을 쏘다니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그 시간을 아깝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느린 걸음은 평범한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보물을 발견하고는 더없이 기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루한 일상 속에 감춰진 유머를 읽어낼 줄 알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풍경. 초록색 블록 담 위에 화분이 놓여 있다. 화분 위로 가스 배관이 지나간다. 분명 삭막하고 스산하다. 하지만 가스 배관 위에 새들을 그려 넣었다. 누군가 가스통 위에 플리스틱 바가지를 엎어놓았다. 그리고 그 옆에 그려진 해바라기 그림. 삶은 때로 이처럼 천연덕스러울 때도 있다. 나는 렌즈에 가스통을 담고 포커스를 맞춘 후 천천히 셔터를 누른다. 삶이 상투적이라고 생각하던 지금까지의 날들이 잠시 후회스럽다. 이건 삶에 대한 생생한 반응이야. 이런 풍경이 깃든 골목을 걷다보면 투정과 불평으로 가득 찼던 하루가 괜히 미안해질 거야.


놓치지 말 것 버스 정거장의 BUS STOP 글자가 무지개색으로 칠해져 있다. 반드시 가로등 불빛이 켜지는 무렵에 가보시길. 가로등 불빛과 어울려 영화 같은 장면을 빚어낸다.


인천 배다리골
‘배다리골’은 창영동과 금곡동, 송림동, 경동 일대를 아우르는데 아주 흥미로운 풍경을 보여준다.고층 아파트와 붉은 벽돌을 쌓아 올린 근대 건축물이 나란히 있고, 1960~70년대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달동네도 만날 수 있다. 헌책방, 여인숙 골목도 만날 수 있고 벽화로 산뜻하게 재단장한 골목도 있다. 골목길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뭐 찍고 있어요?”하고 물으신다. “골목길이 예뻐서 찍고 있습니다.” “아휴, 많이 찍어두세요. 이렇게 예쁜 골목이 곧 없어질지도 모르니.” “재개발이 되나요?” 아주머니는 “그런다네요” 하고는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다. 사회학자 제인 제이콥스가 말한 대로, 골목은 ‘도시의 공공 공간’이기도 하다. 골목은 이웃을 마주하고 안부를 건네며 이야기를 나누는 광장이자 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하다. 때로는 주민의 작은 정원과 텃밭이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골목이 없어진다는 것은 단순히 어느 한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 깃든 우리 삶의 방식과 패턴, 우리가 지나온 시간이 한꺼번에 소멸한다는 것이다. 배다리를 걷다 보면 알 수 있다. 골목은 자연스럽게 진화한다는 것을, 스스로를 발전시켜나간다는 것을, 그리고 지킬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어떤 때는 가만히 내버려두는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가는 길 지하철 1호선 동인천역에서 내린다. 2번 출구로 나와 큰길을 따라가면 배다리 삼거리다. 삼거리 주위로 골목길이 펼쳐진다.


청주 수동 수암골목
수암골은 원래 광복 후 일본과 중국에서 들어온 동포들이 터를 잡은 곳이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울산 23육군병원 앞에 천막을 치고 살던 피란민들이 청주로 이주하면서 마을이 커졌다. 현재 수암골 주변을 둘러싼 마을은 대부분 재개발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수암골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재개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언젠가 하겠지유”라고 무덤덤하게 말한다. 재개발로 인한 갈등이 없는 탓인지 마을은 평온하다. 저녁이 되면 수암골은 부산해진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골목으로 나온다. 줄넘기를 하고 배드민턴을 친다. 된장찌개 끓이는 냄새가 퍼진다. 아저씨 두 분이 골목에 내놓은 평상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계신다. 그 옛날 흑백 텔레비전이 처음 나왔을 당시의 풍경을 보는 것 같다. “여기가 수암골 극장이요. 상영 시간은 해질 때부터 밤 10시까지. 저기 시내에 보이는 ‘대한생명’ 간판이 딱 10시에 꺼지거든. 그때면 텔레비전 끄고 자러 들어가요.” 드라마를 함께 보며 삶은 고구마를 나눠 먹는 모습이 마냥 즐겁다. 주홍빛 가로등 아래로 단발머리 여자아이가 뛰어간다. 먼 지붕 위로 별이 돋고 어디선가 졸린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이 모든 것은 익숙하지만 새롭게 다가온다. 익숙한 풍경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 곳, 그곳이 골목이다.


꼭 들러봐야 할 곳 마을 한편에 빈집을 사진 전시관으로 꾸민 수암골 사진관이 있는데 수암골의 옛 모습을 전시해놓았다. 수암골을 돌아본 후 3대째 빵과 우동을 팔고 있는 서문우동(043-256-3334), 돈가스와 쫄깃한 우동을 함께 파는 공원당(043-255-3894)에서 속을 채우는 것도 좋을 듯.


여행 작가 최갑수 씨가 이제 몇 남지 않은 골목 풍경을 느리고 깊게 들여다본 책 <이 길 끝에 네가 서 있다면 좋을 텐데>. 서울의 부암동, 강경의 황산마을, 군산의 철길마을, 부산의 태극도 마을, 통영의 동피랑 등 도심 곳곳에 숨어 있는 골목을 산책하고 가끔 털썩 주저앉아 쉬기도 하면서 사진과 글에 담았다. 네이버에 연재되면서 월 평균 PV(페이퍼 뷰) 30만 회를 기록하기도 했다.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