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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스타일] 도예가 남용호 씨 내가 도자기를 빚는 게 아니라 도자기가 나를 빚는다
그는 그릇 빚는 도공. 취미는 자연과 삶에 대한 통찰이요, 특기는 두 손으로 만들기다. 집도 손수 짓고, 난로나 풍력발전기도 손수 만들고, 복분자액도 손수 담그고, 그의 손은 뭐든지 척척이다. 더불어 그가 빚는 도자기, 그가 만드는 음식, 그가 머무는 공간에는 늘 자연의 섭리가 깃들어 있다. 흙은 닮은 도예가, 남용호 씨가 사는 법.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의 평화로운 농촌, 야트막한 산이 아늑하게 품어주는 노출 콘크리트 집 한 채가 눈에 띈다. 길을 따라 들어가니 집 앞 응당 논이 있어야 마땅할 자리에 축구장만 한 연못이 펼쳐져 있다. 군데군데 연잎이 퍼지기 시작한 걸 보니 조만간 천지가 연잎으로 뒤덮이고, 연꽃이 만개해 장관을 이룰 태세다. 일반적으로 보던 시골 풍경과는 사뭇 다르지만 잘난 체하듯 위용을 드러내기보다는 집주인의 재미난 발상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집. 이 건물은 도예가 남용호 씨의 작업실 ‘포란재 抱卵齋(알을 품는 집이라는 의미)’다.
그를 내게 소개해준 이는 “그 냄새를 넘어서지 못하면 그 괴육 怪肉의 맛을 느낄 수 없는 두리안처럼, 그분도 같이 말을 나누고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음”이라는 메모를 덧붙였다. 괴육을 맛보려면 그를 둘러싸고 있는 껍질부터 벗기는 게 순서다. 1958년 경북 상주 출생, 집안이 어려워 고교 졸업 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어느 날 흙의 맛을 알고 뒤늦게 서울대 미대에 입학해 도예 전공, 1994년 서울 신라 호텔에서 그의 그릇을 사용해 인기를 끌자 인사동에 복제품이 넘실거림, 그러다 급작스러운 위암 진단, 수술 후 조용히 보내다 지난 5월 개인전으로 컴백, 현재 서울대학교에 출강하며 도예 공방 운영, 가족 구성원은 아내와 두 아들.
“군 제대 후 한양대 부속병원에서 엑스레이 기사로 직장 생활을 했는데, 점심시간마다 학교 안을 산책하는 게 일과였어요. 어느 날 우연히 걸어가다 공장 같은 게 있어서 들여다봤더니 도공이 도자기를 빚고 있더라고요. 요업 실습장이었는데, 그걸 보고 눈이 확 뒤집힌 거예요. ‘바로 저거다’라는 확신이 들면서 일주일 만에 사표를 내던지고 나왔지요. 어떠한 갈등도 겁도 없이 미술 공부를 시작했고, 이듬해에 서울대 미대에 합격했어요.” 도예가로서 그의 출발은 이러했다.

(왼쪽) 남용호 씨가 직접 설계하고 손수 지은 작업실 ‘포란재’.


1 남용호 씨가 밥도 먹고 책도 보는 이곳에 앉아 있으면 삼면의 유리창을 통해 주변의 자연이 품으로 들어온다. 그는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도덕경>을 꼽는다.

그릇이 구상이라고? 모르시는 말씀! 분명 도예가의 작업실에 왔건만, 흙을 반죽하고 그릇을 빚어야 할 그의 손 대신 부침개 반죽을 개고 가지나물을 볶아 그릇에 담느라 분주한 손이 더 많이 보인다. 흙처럼 푸근한 인상의 그는 집을 찾은 손님에게는 반드시 음식을 만들어 대접한 후에야 돌려보내는 성미다. 음식을 나누는 것은 같이 잠을 자는 것보다 사람 사이를 더 살갑게 하고, 즐겁게 만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릇을 빚을 때는 담길 음식을 생각하고, 음식을 만들 때는 담을 그릇을 생각하니, 이 또한 작업의 연장 아닌가.
그는 졸업 후 오브제 중심의 작업 대신 그릇을 선택했다. 합목적성은 부족한 채 작가 세계만 강한 도자기의 사조를 보면서 어쩌면 반향 없는 메아리처럼 ‘공예가 아니라 공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동시에 동기생들보다 훌쩍 많은 나이에 결혼까지 한 상태였던 그때, 그 작업으로 과연 가족을 건사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까지 얹어졌다.
“그 당시 나 자신에게 내준 숙제가 ‘인간이 처음에 흙으로 무엇을 빚었던가?’였어요. 즐문토기, 무문토기를 빚던 그 마음으로 돌아가보자, 몇 년간이라도 거기 있어보자, 그러고도 고민스럽다면 다시 이 작업으로 돌아와도 되지 않나 하면서 다른 작업은 일체 안 하고 그릇에만 몰입했습니다. 그런데 하다 보니 그릇이 보통의 조형 세계가 아닌 겁니다. 굉장히 무서운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릇은 추상 작업입니다. 어디서 형상을 빌려온 게 아니라 물레로 빚은 형상 그 자체가 원형이니 추상이지요. 게다가 그릇이라는 게 일상에서 쓰면서 미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하기에 더 깊고, 더 어려운 세계더라고요.”
그는 좋은 그릇은 ‘보편적 미감’을 담은 그릇이라고 말한다. 쓰면 쓸수록 아름다운 그릇, 우리의 생활과 공간이 만들어내는 스케일과 선의 정점을 잘 살린 그릇, 지금 보나 한참 지나고 보나 한결같이 아름다운 그릇. 이러한 보편적 미감은 결국 ‘자기 삶에 대한 통찰’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그는 유명 뮤지엄의 소장품 리스트에 오르기보다 일반 가정의 그릇 리스트에 드는 게 더 의미 있다고 여긴다. 모시고 보관만 하는 작품이 아니라 가까이에 두고 몸에 부비며 쓰는 그릇, 이런 그릇을 만드는 게 도공으로서는 훨씬 더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그릇을 빚는 작업에서 보편적 미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작업의 숙련도다. 재주를 재주답게 하는 훈련, 즉 똑같은 작업을 수백 수천 번 반복해야 ‘숙련’의 경지에 오른다. 그의 경우에는 신라 호텔에 대량으로 납품하면서 자신의 작업 방향도 결정되고, 작업의 숙련도도 무척 높아졌다고 한다. 탄탄한 기본기를 갖출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 것이다. 당시 이른바 남용호 그릇의 트레이드마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작고 여린 들꽃이다. 추수 끝난 들판에서 발견한 여뀌 꽃이 하도 예뻐서 수첩에 스케치해뒀다가 이렇게 저렇게 많이 그리다 보니 형태가 날로 단순해지면서 접시에 그려 넣기 적당한 크기와 톤이 되었다고. 어린 시절 담장 밑에 피던 달개비도 그릇에 올렸는데 참 보기 좋더란다. 그즈음 사람들도 마음속에 들꽃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갖고 있는지 이 작은 꽃 그릇이 이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렸다.
한데 얼마 전 전시에선 이 앙증 맞은 꽃들을 보지 못했다. 그는 “십 수년 너무 오래 그린 것 같아 지루해서”라는 말 뒤에 이제 노안이 와서 작은 것을 그리는 데 힘이 부치는 나이가 됐다고 덧붙였다.

2 계단 벽에 걸린 연꽃 그림 접시는 그의 집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1 공방에서 건조 중인 사발과 초록 매실 열매가 한 장의 그림엽서 같다.


2, 3 그는 청자도 백자도 아닌, 그만의 분장 작업을 통해 다양한 색감과 질감의 그릇을 빚는다. 2층 전시장의 모습.
4 뒷산을 산책하다 캐온 자연산 더덕.


못 말리는 제작 본능의 결정체, 포란재 오래전부터 자신의 손으로 집을 짓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집은 이렇게 짓겠다며 4~5년 동안 드로잉한 스케치북만도 몇 권. 그의 집엔 반드시 누워서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잔디밭이 있어야 하고, 각종 채소 키워서 나눠 먹을 수 있게 텃밭도 있어야 하고, 물오리 노닐 연못도 있어야 하고, 집 근처엔 산책할 수 있는 숲 속 오솔길도 있어야 하고…. 아무튼 이러저러한 노고 끝에 그토록 꿈꾸던 것을 죄다 갖춘 멋진 집을 지었다. 이곳에 집을 짓게 된 계기는 2001년 터진 동생의 사고사 때문이었다. 형제애 이상으로 깊은 정신적 교감을 나누던 육군 조종사 남동생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그는 이듬해, 동생이 복무하던 부대에 추모비를 세워주기 위해 이천의 돌 공장에 드나들었다. 그때 지난 길이 지금의 집터 앞길이다.
“들어오다 보니 지금 우리 집 땅이 이렇게 보이는데, 저런 곳에 내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을에 가서 땅이 있는지 알아봤는데 몇 달 뒤에 마침맞게 이 땅이 매물로 나온 거예요. 그게 참 인연이죠. 땅이 생기자 그동안 드로잉해둔 스케치북을 들추고 2년에 걸쳐 정확하게 다시 설계를 했지요. 꼭 직접 해보고 싶었어요. 그 나이가 지나면 못할 것 같은 나이였거든요.”
어디 설계뿐인가? 그의 못 말리는 제작 본능의 결정체가 바로 이 집이다. 콘크리트 시공 빼놓고는 철공, 목공, 시멘트, 전기, 창틀, 가구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그 혼자서 직접 했다. 땅을 산 후 집을 완성하기까지 총 5년이 넘게 걸렸다. 본업이 있다 보니 집 짓는 일에만 매달릴 수도 없고, 그사이 위암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와 수술까지 하는 바람에 천천히 오랫동안, 고생스럽게 지었지만 정말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5 남용호 스타일의 트레이드마크인 작은 들꽃이 그려진 접시.


흙을 닮아가다 흙을 치대고 물레를 돌려 그릇을 빚는 것 외에 메타세쿼이아 숲길 맨발로 걷기(집 근처에 이런 예쁜 숲길이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다!), 잔디밭이나 옥상에 누워 별 구경하기(별이 쏟아져내려 우산을 받치고 있어야 할 정도, 별똥별이나 심지어 UFO 구경은 덤), 뒷산 산책하며 자연산 더덕이나 약초 캐기(운 좋으면 산삼 횡재까지!), 밖에 나가 텃밭 갈고 잡초 뽑기. 이렇게 자연과 함께할 때 그는 절로 흥이 나고 행복하다. 그는 참 아는 게 많은데, 특히 같이 길을 가면서 이 식물 저 곤충에 대해 물어보면 거의 생물도감 수준이다. 좋아하면 많이 알게 되는 법. 그가 끼고 보는 책 중에 제일 많은 게 식물도감이다. 책에 없는 건 가만히 관찰해보면 다 알게 된다고. 한데 그가 더 대단하게 보이는 건 자연에 대한 단순 지식이 아닌, 그들의 원리를 삶에 적용할 줄도 안다는 점이다.


집 앞의 논을 임대해 연못을 파고 연을 심었다. 머지않아 연잎이 뒤덮이고 연꽃이 만개할 것이다. 봄이면 산수유 꽃을 보러 이 지역을 찾는 관광객이 20만 명이나 되는데 이들을 여름에도 찾아오게 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 화려한 연을 떠올렸단다. 게다가 연은 친환경적이고 여러 가지로 활용도도 높으니 일석이조. 남용호 작가와 저녁을 먹기 위해포란재를 찾은 젊은 손님들(남용호 작가를 지원하는 IT 벤처기업 루키스의 직원들)이 촬영 끝나길 기다리며 자기 멋대로 쉬는 장면을 자연스럽게 포착했다. 한가운데 섬에 앉아 있는 이는 남용호 작가.

“시골에 살면서 가장 깊게 배우는 것은 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무위자연이에요. 잔디밭에서 자라는 강아지풀은 잔디 흉내를 내면서 옆으로 뻗어 자라고, 겨우내 물이 말라 고기가 모두 죽은 연못에 다시 물이 차니 어디서 뚝 떨어졌는지 물고기가 다시 헤엄치는 걸 보면 소름이 돋습니다. 한 생명이 생명답게, 아름답게 누릴 수 있는 우주적 시스템에 맞춰 사는 것,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으로 자연에 순응하는 삶이 가장 가치 있는 삶 아닐까요? <도덕경>을 감명 깊게 읽으면서 자연에 순응하는 삶의 가치를 알게 모르게 쌓아왔던 것 같아요.”
도자기 안 했으면 어떤 사람이 돼 있을까라는 상상을 해보면 두 모습이 떠오른단다. 하나는 국수 뽑아 말아주는 국숫집 주인, 다른 하나는 빵 굽는 사람. 그러고 보니 국수나, 빵이나, 도자기나 다 그게 그거 아닌가. 밀가루 반죽해서 오븐에 굽는 거나 흙 반죽해서 가마에 굽는 거나! 그러면서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다시 태어나도 도공이 될 거라고. 도자기가 그렇게 좋다고. 큰돈을 벌진 않았지만 그릇 빚는 일이 자신한테 가장 잘 어울린다고. 그 어떤 것도 도자기 만드는 일만큼 매력적인 건 없다고 말이다. “나다운 모습을 만들어주는 유일한 작업인 것 같아요. 돌아보니 내가 도자기를 빚은 것이 아니라 도자기가 나를 나답게 빚어주었어요”라고 말하는 천생 도예가 남용호 씨의 표정은 따뜻하고 아늑한 흙을 닮아 있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왜 처음에 그가 괴육의 매력에 비유됐는지를.


1 남용호 씨가 가장 좋아하는 산책로인 이천 원적산의 메타세쿼이아 길. 지인들이 찾아오면 이 길에 데리고와 맨발로 걸어보게 한다고.
2 옥상에서 벌인 초저녁의 막걸리 파티. 메뉴는 연잎밥과 감자샐러드, 연근튀김, 가지볶음, 낮에 캐온 칡 샐러드.


남용호를 말하다!
남용호 선생은 내가 디자인하우스에 월간 <미술 공예> 기자로 입사해 처음 제대로 된 인터뷰를 하고 기사를 쓴 취재원이다. 이제 막 사회에 나와 ‘어리바리’하던 시절 남용호 작가의 경기도 작업실로 직접 찾아가 인터뷰를 했다. 모든 것이 낯선 신입 기자에게 선생의 인상이 한없이 평화로워서 모든 긴장이 풀어졌던 기억이 난다. 무슨 질문을 했는지 잘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굉장히 편안하게 해주셔서 내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도 마음껏 했던 것 같다. 정말 정말 조금도 스스로 자랑하지 않고 겸손했던 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예와 디자인에 대한 가치관이 어설펐던 나에게 남 선생은 생활 공예의 가치를 깨우쳐주셨다. 수백 명의 디자이너와 예술가, 공예가들을 만나고 인터뷰하지만, 여전히 남용호 선생과의 행복했던 그 분위기는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김신(월간 <디자인> 편집장)

나는 평소 남용호 선생의 생활 자기를 무척 즐겨 쓴다. 10년도 훌쩍 넘긴 면 사발은 깊이가 9cm나 되는 그릇으로, 잔치국수를 말아 담고 그릇 안쪽에 그려진 버들잎을 바라보면 국물이 일렁이는 듯하다. 반찬 접시의 한가운데에는 달개비 꽃이 마치 풀숲에 핀 마냥 피어 있다. 밥공기와 국그릇에는 여뀌 꽃이 바로 쪽빛을 낼 듯 싱싱하고, 막걸리 잔에 곁들인 버들잎에서는 바람이 분다. 이렇듯 남용호 선생의 그릇은 한 폭의 문인화이자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시 詩이기에 너무 좋다. 이 그릇들은 가벼워 다루기 쉽고, 색감이 은은하여 음식을 빛내준다. 가까운 벗들과 간단한 안주를 마련해 술 한잔 나눌 때 언제나 선생의 그릇이 그 자리를 채워준다. 찔레꽃 분분한 밤의 따뜻한 만남처럼.- 이명숙(치과 교정 전문의, <행복>의 오랜 독자)


구선숙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