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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 들여다보기] 죽부인으로 살펴본 조상들의 여름 나기 마누라보다 더 좋은 죽부인!
우리 조상들은 일하지 않으면 더위 피하는 일, 곧 피서도 없었다. 즉, 여름은 일하는 계절인 탓이다. 물 대랴, 김매랴, 보리타작하랴, 거름 주랴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철이 바로 여름이었다. ‘여름에 하루 놀면 겨울에 열흘 굶는다’는 속담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뙤약볕 아래에서 하는 일은 어느 철보다 힘들고 고됐다. 그러다 보니 휴식과 피서가 더욱 절실했다. 그렇다고 요즘처럼 요란한 피서를 떠난 건 아니다. 피서용품도 기껏해야 죽부인과 등에 걸치는 등거리, 부채, 자리 등이 고작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은 이 무더운 여름을 어떻게 났을까.

왜 남정네들은 죽부인을 좋아할까
사방이 탁 트인 누마루에 발을 내리고 자리 깔고 누우면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게다가 죽부인까지 껴안고 낮잠을 잔다고 생각해보라. 낙원이 따로 없다. 선비들의 거처인 여름 사랑 대청에는 죽부인이 필수품처럼 놓여 있었다. 죽부인 竹夫人이란 너비 약 1~1.3cm 정도의 대나무를 얼기설기 엮어 통 모양으로 만든 옛 침구를 말한다. 서유구 徐有(1764~1845)는 <임원경제지 林園經濟志(조선 후기에 쓴 농업 정책과 자급자족의 경제론을 편 실학적 농촌 경제 정책서)>에서 죽부인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죽부인은 대나무를 엮어 만드는데, 형태는 연통과 같다. 안은 비어 있고, 바깥은 원형으로 반질반질하다. 여름에 이불 위에서 팔과 무릎을 쉬게 하는 까닭에 죽부인이라 한다.” 죽부인은 다른 말로 죽궤 竹라고도 한다.
고려 때의 문신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이규보의 시문집)>에서 죽부인을 시로 썼다.
“대(竹)는 본래 장부에 비할 것이고,/ 참으로 아녀자의 이웃은 아니다./ 어찌하여 침구로 만들어서/ 억지로 부인이라 이름하였나./ 내 어깨와 다리를 안온하게 펴고,/ 내 이불 속으로 진하게 들어온다./ 눈썹과 나란하게 밥상 드는 일은 못하나/ 다행히 사랑을 독차지하는 몸은 되었다./ 상여에게 달려가는 다리도 없고,/ 백륜에게 간하는 말도 없어/ 고요한 것이 가장 내 마음에 드니,/ 어찌 아름다운 서시(고대 중국의 유명한 4대 미녀 중 하나)가 필요하랴.”
이보다 죽부인을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예전에 나도 잘 때 내 몸이지만 맨살이 서로 닿으면 잠이 오지 않아, 죽부인을 부둥켜 안고 잤더니 거짓말처럼 잠이 새록새록 들었다. 그런 나를 보고 질투가 났던지 아내가 그 물건을 죽부인이라 부르지 말라는 것이었다. 어느 부인이라고 남편이 외간 여자를 껴안고 자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한낱 대 공예품에 지나지 않는 것을 무슨 까닭으로 부인이라 부른 것일까. “옛날 중국의 한무제가 무더운 여름날 감청궁이란 곳으로 피서를 갔다. 황후를 비롯해 1천여 명의 후궁이 따라갔으나 정작 황제의 더위를 식혀주지는 못했다. 이를 몹시 송구스럽게 여긴 황후와 후궁들은 장인을 시켜 대나무 궤를 만들어 황제에게 바치고 이름을 죽부인이라 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죽부인은 피서용품이긴 하지만 남성 전용이었다. 하지만 죽부인은 흔히 말하는 애첩과는 그 격이 다르다.
그렇다면 남정네들이 죽부인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속된 말이지만 열 여자 마다하는 남자가 있을까.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는 일부일처제지만 비공식적으로 축첩을 허용했다.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향처와 경처를 두기도 했다. 향처란 고향에서 얻은 조강지처를 이르고, 중앙으로 나가 관직을 수행할 때 얻은 부인은 경처라 했다. 태조 이성계의 첫 부인 신의왕후는 향처고, 계비 신덕왕후 강씨는 경처였다. 고려 때 정승 박유가 일부이처제를 주장하기도 했지만(우리나라는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아 시집을 못 가는 이가 많고, 또한 여자가 남아돌아 외국인이 고려 여인을 신부로 데려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일부이처제를 시행하면 시집 못 가는 여자도 구제하고 아이를 많이 낳아 국력도 높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조강지처 부인들이 무서워 차마 이를 시행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죽부인은 아무리 많이 둔들 어느 여자가 탓할 것인가. 죽부인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가정 稼亭 이곡 李穀(1298~1351)의 <죽부인전>이란 소설 덕이다.이곡은 고려 말 대유학자 이색 李穡(1328~1396)의 아버지다. 그는 <죽부인전>이란 소설에서 이 물건을 이렇게 찬양했다.
“부인의 성은 죽 竹씨로, 이름은 빙 憑이고, 은사 隱士 운의 딸이다. 그의 조상은 음률을 잘 알아 황제가 그를 뽑아 음악을 관장하는 일을 하도록 했다. 우 虞나라 때 피리 역시 그의 후손이다. 선대부터 사관으로 대대로 내려오다 진나라 때 분서갱유로 한미해졌다. 부인은 처녀 때부터 아름다운 자태가 있어 뭇 남자들의 유혹이 있었으나 거절하여 뿌리쳤다. 뒤에 송공 松公(소나무)에게 청혼하니 그가 군자라 하여 부모가 허락하여 시집갔다. 남편 송대부는 죽부인보다 18세 위이다. 부인의 성품이 날로 온후하고 아름다워 호사가들이 몰래 그려서 간직하였다. …남편이 신선이 되어 떠나갔지만 굳은 절개를 지키며 수절을 해 나라에서 이를 알고 절부 節婦의 직함을 주었다. 그런데 후사가 없으니 하늘이 무심하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구나.”
이 소설은 당시 음란하고 타락한 궁중과 절개를 지키는 부인이 드문 것을 한탄한 내용이다. 여기서 말한 죽부인의 대나무는 악기 재료가 되었으니 음률을 아는 것이 하나요, 대나무로 만든 붓으로 역사를 기록했으니, 대는 사관의 역할을 한 것이다. 또한 사람이 아니기에 비록 대를 이을 수는 없지만, 청절의 절개로 상징되어 선비의 칭송을 얻어 당당히 매화, 국화, 난과 함께 사군자의 대열에 들게 된 것이다.

죽부인, 남자들의 로망이 모두 담긴 물건 그야말로 죽부인은 남자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갖췄다. 첫째, 죽부인은 요란하게 치장하지도 않고 거기에 성품까지 온화하니 얼마나 좋은가. 둘째, 애인이나 첩을 두어도 화내지 않고 질투도 하지 않는다. 세상 천지에 이런 부인이 또 있을까. 셋째, 가까이 두었다가 품고 싶으면 언제라도 안을 수 있고, 또 내물리친다 해도 싫은 내색도 하지 않고 귀찮게 굴지도 않는다. 오히려 여름이 지나 소용이 없으면 다소곳이 물러나 앉으니 얼마나 좋은가. 남정네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끝까지 달라붙는 여자라 하는데, 죽부인은 그럴 걱정이 없다. 게다가 절개는 굳기가 이를 데 없고 조상 대대로 청절로 일관되게 살아와 남에게 몸을 굽히는 걸 부끄럽게 여겼으니 어찌 남성들이 좋아하지 않겠는가. 한마디로 죽부인은 남자들이 좋아하는 면을 다 갖춘 셈이다. 따라서 아버지가 쓰던 죽부인은 자식에게 대물림하지 않고 태워 없애버렸다.

사랑방 대신 죽부인을 선물합시다! 죽부인이 기거하는 곳은 다름 아닌 사랑방이다. 우리의 주거 형태가 서구식으로 변하면서 사랑방이 없어져 졸지에 아버지의 공간이 사라졌다. 사랑방의 소멸은 단순히 죽부인만 쫓겨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도 쫓겨난 것이나 다름없다. 사랑방은 단순한 방이 아니다. 전통 사회에서 사랑방은 그야말로 부권의 마지막 보루이자 상징이었다. 사랑방과 함께 남자의 가부장적 권위도 함께 사라진 것이다. 사랑방의 소멸은 그야말로 우리나라 문화 변동사에 한 획을 긋는 대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방이 없어졌다는 것은 남자가 곧 부인에게 모든 것을 싸들고 안방으로 들어와 백기를 든 것이나 진배없다.
여성들이여! 올여름, 남편만의 공간인 사랑방을 마련해주지는 못할망정 죽부인이라도 선사해 잠시나마 주눅 든 어깨와 기를 펴주고 무더운 여름을 나게 하면 어떨까.

물맞이로 찌든 심신을 달래다 죽부인을 애첩처럼 끼고 보내는 피서 외에 우리 조상들의 여름 나기는 참으로 소박했다. 산이나 계곡, 바다로 놀러 나가는 피서는 언감생심 생각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유둣날(음력 6월 15일. 올해는 7월 26일) 또는 삼복에 술과 음식을 마련해 물 맑은 계곡이나 산정을 찾아 하루를 즐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누마루가 딸린 사랑 대청에 앉아 더위를 식힌 것이다.
유두는 복중 伏中에 들어 있다. 유두란 동류두목욕 東流頭沐浴의 약자로 ‘동쪽에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한다’는 뜻이다. 유두 풍속은 신라 때부터 전해지는데 유두를 소두 梳頭, 수두 水頭라고도 부른다.수두란 ‘물맞이’라는 뜻이다. 이 때문에 신라의 옛 땅인 경상도 지방에서는 오늘날에도 유두를 ‘물맞이’라고 부른다. 유둣날에는 맑은 시내나 산간 폭포에 가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은 뒤, 가지고 간 음식을 먹으면서 시원하게 하루를 지냈다. 이렇게 하면 머리에 부스럼이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름에 질병을 물리치고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믿었다.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가서 머리를 감는 것은 동방이 청 靑이요 해가 솟는 곳으로, 양기가 가장 왕성한 곳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유두 무렵에는 새로운 과실이 나기 시작하는 철이므로 참외, 수박 등의 과실과 햇밀가루로 국수와 떡을 마련해 조상에게 유두 차례를 지냈다. 나라에서는 피, 기장, 조, 벼를 종묘에 바치는 유두천신 流頭薦神을 행했고, 또 약수터에서 ‘노구메’를 드리기도 했다. 노구란 놋으로 만든 작은 솥, 메는 밥으로, 곧 밥을 지어 올려 기원한다는 뜻이다. 이렇듯 선조들은 햇곡식이나 햇과일을 수확하면 자기가 먼저 먹지 않고 조상에게 예를 올린 후 먹었다. 유둣날 절식으로는 유두면, 수단, 건단, 연병 등이 있다. 유두면은 햇밀가루를 반죽해 구슬 모양으로 만들어 오색으로 물들인 뒤 세 개씩 색실에 꿴 것으로 몸에 차거나 문에 매달면 액과 잡귀의 출입을 막는다고 여겼다. 또 이 유두면을 먹으면 장수하고 더위를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특히 선비들은 유두천신의 예가 끝나면 술과 안주를 장만해 계곡이나 물가의 정자를 찾아가 시를 읊으며 하루를 즐겼다. 이를 유두연이라 하는데 최근까지도 행해졌다.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