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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행복론] '나비'에 관한 두 가지 시선
여기 ‘나비’에 관한 두 편의 글이 있습니다. 하나의 생명체를 두고 긍정과 부정의 시선이 묘하게 겹쳐집니다. 나비를 두고 한 시인은 ‘꽃과 꽃 사이의 거리를 재는 아름답고 우아한 곤충’이라 했고, 또 다른 시인은 ‘쓸데없는 꽃잎처럼 바람에 휘날리는 대기 중의 미소한 범선’이라는 기막힌 표현을 썼습니다. 그들의 시가 궁금하신가요? 나비에 대한 시선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시구를 천천히 음미해보세요.
먼저 시인 안도현의 동화집 <연어 이야기>입니다. ‘나비는 겸손한 곤충이었다. 나비는 물가의 자운영으로 날아가 줄기 끝에 날개를 접고 앉았다. “아직 꽃이 덜 피었네.” 나비는 가느다랗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긴 더듬이로 채 열리지 않은 꽃을 어루만졌다. “꽃과 꽃 사이의 거리를 재는 게 나비가 할 일이야. 나비들이 찾아가 입을 맞추면 꽃은 좋아서 몸을 흔들거든. 이것 봐, 지금은 가만 있잖아.”’ 안도현 씨의 눈으로 바라본 ‘나비의 사생활’은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그 말랑말랑한 상상력이 부러울 정도입니다.

다음은 ‘사물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프랑시스 퐁주의 시 ‘나비’입니다. ‘너무 늦게 도착해서 이미 피어버린 꽃들을 확인할 뿐이다. 상관없다. 등을 밝히는 사람처럼 행동하면서 나비는 각 등의 기름 잔량을 확인한다. 나비는 쇠약한 누더기 몸을 꽃부리에 얹고 애벌레 시절 줄기 아래에서의 기나긴 굴욕을 복수한다. 쓸데없는 꽃잎처럼 바람에 휘날리는 대기 중의 미소한 범선은 정원을 방랑한다.’ 제가 무척 사랑하는 프랑스 시인 퐁주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 ‘나비의 생태’를 꼬집습니다. 사물을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본질 그 자체로 이해한 그의 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의 이면을 말해줍니다.
여러분은 두 편의 글을 읽고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두 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한때는 눈에 보이는 게 다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실망이 컸고, 오해도 많았습니다. 저 너머에 또 다른 진실이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볼 줄을 몰랐습니다. 긍정과 부정,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익숙한 것과 익숙하지 않은 것, 그 모든 것을 품으려 할 때 삶이 토실토실해집니다. 나비에 관한 두 시인의 간극이 아름답습니다.

(왼쪽) ‘복숭아와 나비’ 중 일부분, Inkjet Print, 150×105cm, 2003

프랑시스 퐁주 Francis Ponge는 1899년 프랑스 남부 몽펠리에서 태어나 아비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30년대에 앙드레 브르통 Andre Breton과 함께 초현실주의 문학 운동에 가담했고, 1944년부터는 공산당 신문 <악시옹 Action>의 문학 면을 담당했다. 작품집으로 <사물의 편>(1942), <비누>(1961), <말레르브를 위하여>(1965) 등이 있다.


정세영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