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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기울여 들어보니] 30년간 예능의 ‘스테디셀러’로 살아온 이경규 씨 그에게서 ‘나무’를 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지루할 만큼 반복적인 패턴으로 살아라. 그러면 최고에 이른다.” ‘예능’이라는 정글에서 30년을 버티며 견고한 나이테를 형성한 ‘장수 희극인’의 전언이다. 온전한 성장을 마친 거목에게선 은은한 나무 향기가 났다.

‘까칠한 이경규’와 한정된 공간 안에서 숨 쉰다는 건 살얼음판을 딛는 것처럼 심신이 위축되는 일이다. 그는 소문처럼 ‘무서운 호랑이’였다. 불편으로 일그러진 얼굴, 느리고 부정적인 뉘앙스의 고갯짓, 무심한 듯 날이 선 침묵, 화가 나면 순식간에 내지르는 ‘어~흥’. 모든 것이 닮았다. ‘무서운 호랑이와의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곳은 케이블 채널 TVN의 <화성인 바이러스> 녹화 현장. 일찌감치 도착한 그가 대기실에 앉아 김구라 씨와 수다를 떨고 있는 사이 슬며시 들어가 명함 한 장을 건넸다. 반갑다는 말도 없이, 눈인사도 없이 덤덤하게 명함을 받길래 겸연쩍은 마음에 되돌아나와 녹화장 한구석에 몸을 숨겼다. 그 후로 프로그램 진행자인 아나운서 김성주 씨가 도착했고, 녹화 예정 시간이 30분쯤 지났다. 담당 PD가 몇 차례 대기실을 들락거리고 코디네이터와 분장사가 분주해지자, 슬슬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태프의 동선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멀리서 관망했지만 그가 언제 눈길을 주려나 싶어 신경이 쓰였다. 1부 녹화가 끝나고, 10여 분의 휴식이 흐르고, 다시 2부 녹화가 시작될 때까지도 그는 곁을 내주지 않았다. 직무를 유기할 순 없어 적당한 타이밍이라고 생각되는 시점에 몇 가지 부탁을 해봤지만 그럴 때마다 이경규 씨는 주어를 생략한 경상도 억양의 ‘경고성 멘트’로 답을 대신했다. 가령, “아… 지금 안 좋아”라는 말은 프로그램 녹화장에 미리 와서 진을 치고 있는 취재팀이 부담스러운데다 녹화도 잘 풀리지 않아 인터뷰를 수락한 것이 영 후회된다는 의미이고, “예술하지 말자고”는 방송 장비들 속에 우뚝 세워진 사다리에 올라가 무림 고수처럼 폼 나게 사진 한 컷 찍자는 제안을 거절한 말이다. 그의 몸피에서 뜨겁게 뿜어져나오는 ‘불편의 기운’은 심약한 ‘민간인’을 위축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기 센 맹수가 모여 사는 정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의 ‘오라 aura’였다. 역시, 바람에 실려다니는 소문대로 그의 오라는 대단했다. 그날 촬영장에서 가까워진 한 스태프는 “이경규 선배의 컨디션에 따라 촬영장 분위기가 구름처럼 가볍다가도 순식간에 철근처럼 무거워진다”고 귀뜸했다. 무작정 그가 곁을 내어 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예능 생태계’를 기름지게 만든 장본인
매주 수요일 아나운서 김성주 씨와 독설가 김구라 씨, 그리고 호랑이 이경규 씨가 모여 ‘멀리서 온’ 화성인을 맞이한다. <화성인 바이러스>는 일반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이한 습성을 지닌 사람들, 즉 화성에서 온 것처럼 엉뚱한 ‘4차원인’을 불러내 그들의 ‘놀랠 노 자’인 삶을 들여다보고 ‘이경규식 인생 조언’으로 마무리하는 흥미로운 프로그램이다. 겉으론 ‘버럭’047하지만 지천명의 지혜로 출연자를 보듬는 이경규 씨와 거침없는 직설 화법으로 어딜 가나 악역을 도맡는 김구라 씨가 만나 케이블 채널에선 보기 드문 높은 시청률을 이끌어냈다.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옷 입는 데 4시간 이상 걸리는 패션 중독자’, ‘결혼 8년 만에 아파트를 3채나 장만하느라 울트라 짠순이로 살아가는 30대 주부’, ‘여러 명의 남자를 동시에 만나면서 어장 관리에 도가 튼 섹시녀’까지… 평범하고 보수적인 대한민국 중년 남성 대표 이경규 씨가 ‘멀리서 온’ 화성인을 앞에 두고 웃다가 울렸다가 꾸짖다가 달랬다가 보듬고 살핀다.
<화성인 바이러스>의 이근찬 담당 PD는 프로그램을 이끌어 가는 이경규 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희 프로그램은 연륜이 없으면 진행하기가 힘들어요. 진행자가 출연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진솔한 이야기가 나올 수 없으니까요. 이경규 씨는 본인에게 와 닿지 않는 사람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요. 출연자에게 ‘그렇게 살지 말라고’ 짜증을 내기도 하고, 버럭버럭 화도 내지만 진심은 그렇지가 않아요. 다른 팀 작가들이 이경규 씨가 출연자한테 해주는 조언을 듣고 저희한테 “대본 참 잘 썼더라” 그러거든요. 그런데 그거 이경규 씨가 대본 없이 하는 거예요. 예전에 저희 프로그램에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출연한 적이 있어요. 그분이 이경규 씨에게 말했어요. 아무리 외로워도 전화할 친구가 없는 게 참 서글프다고. 그랬더니 이경규 씨가 방송 중에 휴대전화 번호를 건네면서 ‘앞으론 나한테 전화하라’고 하더라고요. 그게 그날의 솔루션이었어요. 녹화 이후로 이경규 씨와 종종 통화하던 그 출연자 분은 그 후 저희 촬영장에도 종종 놀러 오고 그랬어요.”

이경규 씨가 처음 케이블 프로그램을 맡을 때 시청자들은 의아했다. 대한민국 예능 역사에 길이 남을 ‘몰래카메라’나 ‘양심 냉장고’ 시절에만 해도 그는 ‘예능의 베스트셀러’ ‘예능의 신’ 이었다. 지금처럼 다작을 하지도 않았고, 단독 진행은 당연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그는 요즘 일주일에 케이블 채널 2개 프로그램과 공중파 방송 3개 프로그램을 녹화한다. “한창때는 프로그램을 딱 하나만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다채널 시대가 도래했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하나만 하다가는 감이 떨어진다. ‘생활의 달인’처럼 방송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작 속에 대작이 나오는 것이지, 운이 좋아 ‘대박 프로그램’을 만나는 게 아니다.” 시청률 빵빵 터지는 굵직한 프로그램을 후배들에게 내주고 예능계의 ‘스테디셀러’를 자처한 이경규 씨는 그만의 방송 철학으로 방송 생태계를 기름지게 만들었다. 내로라하는 선후배 동료 중에 가장 먼저 케이블 채널에 진출한 것도, 그로 인해 케이블 TV가 활성화된 것도 자명한 사실이다. 이경규 씨는 MBC 에브리원을 시작으로 ESPN을 거쳐 현재 TVN 채널에서 <화성인 바이러스>와 <러브 스위치> 2개의 프로그램을 맡고 있다.
공중파에서는 결코 다룰 수 없는 소재를 과감하게 시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예능인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다는 점에서 케이블 방송은 아주 매력적이다. 이전에 없던 ‘예능’ ‘리얼 버라이어티’라는 장르가 생겨난 것도 결국은 시청자의 관심사가 세분화되고 다채로워졌기 때문이다. ‘예능’이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재주와 기능을 아울러 이르는 말. 연극, 영화, 음악, 미술 따위의 예술과 관련된 능력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잘 짜인 무대에서 정해진 틀에 맞춰 사람을 웃기던 희극이 장소를 탈피하고 형식도 탈피한 채,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노는 새로운 놀이로 변화한 것이다.
“예능이라는 장르가 굉장히 거대해졌다. 우리가 즐거움을 얻는 방법, 즉 ‘노는 방법’이 달라진 것이다. 과거에는 개그를 짜서 했다. 지금은 그런 짜맞추기보다는 자연스럽고 ‘사람이 보이는 프로그램’을 좋아한다. 포맷도 있지만 사람이 보여야 한다. 시청자의 수준이 높아졌고, PD나 작가가 그걸 맞추면서 이 시장이 커졌다. 사람을 웃기는 방049식이 형태를 벗어나 스타일화 된 것이다.”
이경규 씨는 지난 30년간 대한민국 희극의 변천사를 몸소 체험하며 개그의 ‘스타일화’를 추구했다. 방송에서 흔히 말하는 ‘콘셉트’. 그게 없으면 예능인은 살아남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경규식 예능 코드’는 무엇일까. 그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을 택했다. “방송에서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을 그대로 이야기한다. 보통 나이를 먹으면 자신을 포장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 권위를 내세우거나 외모를 포장하려 들지 않는다. 그건 콘셉트가 아니고 그냥 내가 가지고 있는 ‘성향’이다. 나는 출연자에게 친절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시청자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금껏 방송 중에 화를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속으로는 화가 나지 않지만 방송에서 화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화를 낸다. 그것이 10대에게 먹히든, 50대에게 먹히든 중요하지 않다. 나 혼자만의 길을 간다. 그래서 ‘이경규만의 스타일’이 생기면 되는 거다. ‘이경규가 보이면’ 되는 거다.”

‘예능의 정석’ 제1조, ‘사람 냄새 풀풀 풍길 것’
3년 전, KBS에서 ‘남자의 자격’이라는 프로그램을 준비할 때 가장 먼저 캐스팅된 사람은 이경규 씨였다. ‘남자들이 죽기 전에 해야 할 101가지’라는 부제만 봐도 대한민국 중년 남성의 환호성이 들리는 듯했다. 어깨를 짓누르는 가족 부양의 의무를 떠안고도 자식과 아내에게 소외받는 이 시대의 아빠에게 ‘남자의 자격’을 부여하겠다니! 이경규 씨는 이 프로그램이야말로 사람이 보이는, 사람 냄새 풀풀 풍기는 ‘예능의 정석’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담당 PD와 머리를 맞대고 좌청룡 우백호를 고민하던 시절, 그는 평소 친분이 두터운 김태원 씨와 김국진 씨를 떠올렸다. “태원이나 국진이나 다 사연이 많은 사람이다. 연륜도 있고, 인생 경험도 풍부하고… 그 경험치만 뽑아내도 이 프로그램은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는 윤석이, 형빈이를 놓았다. 두 후배는 정말 착하다. 그들은 방송에서 튀려고 하지 않는다. 같이하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그 속에서 조화를 이룬다. 사실 주변에선 이 멤버 구성을 보고 프로그램이 안 될 거라고 점쳤다. 잘나가는 아이돌 한 명 없고, 눈 요기 할 꽃미남도 없고. 시청자가 보기엔 딱 ‘루저의 모임’이었다. 하지만 그게 포인트였다. ‘남자의 자격’은 시청자 위에 서 있지 않고 아래에 있다. 연예인 중에서 대본 보는데 잘 안 보인다고 안경을 들추고 보는 사람은 없을 거다. 나이 먹어 눈 안 보이는 걸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태원이는 보여준다. 대중에게 눈높이를 맞추는 거다.” 강호동 씨를 비롯해 재능 있는 예능인을 발굴해낸 것으로 유명한 이경규 씨는 후배를 볼 때 웃기는 재주보짓누다 마음이 선량한가를 우선으로 본다. 남을 웃기는 사람은 선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웃길 수 있기 때문이다. 모난 성격을 가진 사람은 특히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살아남기가 힘들다. 그런 면에서 이경규 씨가 가장 주목하는 후배는 이수근 씨다. 그에게선 사람 냄새가 풀풀 난다. 방송에서 볼품없는 몸매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지하 월세방 시절과 마이너스 통장을 가진 자의 비애를 솔직히 털어놓는다. 그러면 시청자는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이 저렇게 성공해서 TV에 나오는구나’에 뿌듯함을 느낀다. 연예인이 별나라 달나라에서 온 희귀종이 아니라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에 살맛이 난다. ‘예능의 정석’ 제1조는 그렇게 ‘사람 냄새가 폴폴 풍기는 것’이다.

이경규식 아포리즘
인터뷰 잘 안 하기로 유명한 이경규 씨를 어렵사리, 굳이 지면으로 불러낸 데에는 이유가 있다. 몇 달 전, 그가 진행하고 있는 ‘남자의 자격’에서 ‘남자, 강단에 서다’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경희대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단에 선 7명의 출연자는 인생 선배로서 후배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각자 개성이 드러나는 주제로 풀어냈다. 이경규 씨의 증언에 따르면 이날 강의는 대본 없이 진행된 100% 리얼 드라마였다고. 그날 방송을 본 시청자는 알겠지만 그의 강의는 놀라웠다. 나는 이경규 씨의 강의를 ‘본방 사수’ 한 다음, 인터넷에 올라온 동영상을 다시 보며 그의 말을 지면에 옮겨 적어 보았다. 아무리 말 잘하는 사람도 구어체를 문어체로 옮기면 문장이 뒤죽박죽이게 마련인데, 그의 구술은 거의 완벽했다. 그의 강연은 그 자체로 잘 짠 하나의 콩트였다. 대본과 구성이 완벽하고 웃음과 감동을 동시에 주는… 투덜이 스머프처럼 말끝마다 짜증을 섞는 이경규식 화법으로 간간이 솔직한 유머와 재치를 섞어 웃음을 주고, 그렇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마지막에 또다시 폭소를 자아내는 ‘이경규식 아포리즘(깊은 진리를 간결하게 표현한 말이나 글)’. 지면이 부족한 관계로 그중 일부만 소개한다. 그냥 읽지 말고 이경규 씨의 억양과 표정과 몸짓을 상상하면서 읽을 것. 강의 주제는 ‘참을 忍-화를 내지 말자’다.

“내가 방송 생활을 30년 했다. 그 시간 동안 무진장 참았다. 방송이 60분이면 녹화는 300분이다. 7~8년 전부터 녹화가 길어졌다. 240분르는 가족 부양의 의무를 떠안고도 자식과 아내에게 소외받는 이 시대의 아빠에게 ‘남자의 자격’을 부여하겠다니! 이경규 씨는 이 프로그램이야말로 사람이 보이는, 사람 냄새 풀풀 풍기는 ‘예능의 정석’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담당 PD와 머리를 맞대고 좌청룡 우백호를 고민하던 시절, 그는 평소 친분이 두터운 김태원 씨와 김국진 씨를 떠올렸다. “태원이나 국진이나 다 사연이 많은 사람이다. 연륜도 있고, 인생 경험도 풍부하고… 그 경험치만 뽑아내도 이 프로그램은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는 윤석이, 형빈이를 놓았다. 두 후배는 정말 착하다. 그들은 방송에서 튀려고 하지 않는다. 같이하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그 속에서 조화를 이룬다. 사실 주변에선 이 멤버 구성을 보고 프로그램이 안 될 거라고 점쳤다. 잘나가는 아이돌 한 명 없고, 눈 요기 할 꽃미남도 없고. 시청자가 보기엔 딱 ‘루저의 모임’이었다. 하지만 그게 포인트였다. ‘남자의 자격’은 시청자 위에 서 있지 않고 아래에 있다. 연예인 중에서 대본 보는데 잘 안 보인다고 안경을 들추고 보는 사람은 없을 거다. 나이 먹어 눈 안 보이는 걸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태원이는 보여준다. 대중에게 눈높이를 맞추는 거다.” 강호동 씨를 비롯해 재능 있는 예능인을 발굴해낸 것으로 유명한 이경규 씨는 후배를 볼 때 웃기는 재주보을 잘라낼 거면서 왜 그렇게 길게 하나. 60분 방송할 거면 녹화는 67분에 끝내야 한다. 후배들에게 녹화 짧게 하라고 강요한 거 사실이다. ‘조인트 까면서’ 그랬다. 그랬더니 주위에 사람이 하나둘 사라지더라. 맡고 있던 프로그램도 하나둘 없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깊이 반성했다. 참아야겠구나. 지난번에 ‘남자의 자격’에서 마라톤 하는 거 봤을 거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운동이 마라톤이다. 그걸 5시간 했다. 이걸 하고 나니까 시청자가 난리가 났다. 내가 좋아서 뛴 줄 아나. 사람들이 그러더라. 이경규 너무 잘한다고. 후배들 잘 이끈다고. 이건 내가 참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으라는 거다. 난 등산도 했다. 20kg이나 되는 배낭을 메고 18시간 동안 산을 올랐다. 올라가면서 화가 났다. 왜? 다시 내려와야 하니까. 김성민은 병이다. 잠시도 입을 쉬지 않는다. 산을 올라가면서도 계속 떠든다. 그것도 꾹 참았다. 3분의 2쯤 올라가니까 그 아이도 말을 안 하더라. 그렇게 참고 나니까 사람들이 또 그러더라. 이경규의 새로운 면을 봤다고. 나이를 먹었는데도 후배들 이끌고 산에 올라갔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속은 뒤집어진다. 산에 올라갈 때 등에 멨던 배낭을 버리고 싶었다. 그것도 꾹 참았다. 막상 산에 올라가니까 배낭에 먹을 것이 들어 있더라. 인생의 무거운 짐을 함부로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내 어깨엔 무거운 짐이 있다. 딸 예림이 대학도 보내야 하고, 마누라도 먹여 살려야 한다. 그뿐인가. 칠순 넘은 부모도 모셔야 하고, 영화사 식구들도 책임져야 한다. 나 방송 오래오래 해야 한다. 이 모든 게 내 어깨를 누른다. 하지만 이걸 함부로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 여러분 어깨에도 짐이 있을 것이다. 영어 공부, 취직, 결혼, 부모님… 그 짐을 내려 놓아서는 안 된다. 먼 훗날, 내가 운명을 달리할 때 나는 비로소 그 짐을 내려놓을 것이다. 그리고 외칠 것이다. ‘방송, 더러워서 못 해먹겠네!’”

생활의 달인처럼 살아가면 그게 성공인 거다
‘무서운 호랑이 아저씨’와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머릿속에서 아빠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방송이 아닌 사석에서 만난 이경규 씨는 얼굴에 분칠하고 사는 사람들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주말이면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 리모컨을 독차지하고, 목이 늘어난 ‘난닝구’에 김칫국물 묻혀 가며 라면을 후루룩거리고, 고단한 몸을 이끌고 매일 새벽 촬영장에 나오는 이 시대의 평범한 아빠. 가끔 낚시와 축구를 즐기며 숨통을 틔우고, 동료와 소주잔을 기울이며 일상의 고민도 나누는, 그렇게 반복되는 삶 속에서 생활의 달인처럼 살아가는 남자. 그 견고한 ‘반복과 규칙’ 속에 어느덧 최고가 되었고,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으므로 바닥으로 떨어지지만 않으면 되는 방송인. 인터뷰 말미에 이경규 씨가 털어놓은 인생에 대한 소회가 눈가를 홧홧하게 했다.

“성공하려면 반복된 생활을 계속하면 된다. 사실 나이가 들면 의지할 사람이 없다. 후배한테 의지하겠나, 선배를 찾아가겠나. 믿을 건 내 자신뿐이다.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나는 반복적인 생활에서 그 답을 찾는다. 일주일을 기준으로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며 산다.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면 근육이 생기는 것처럼 똑같은 패턴으로 생활하면 어느 순간 ‘내가 발전했구나’라는걸 느끼게 된다. 돈에 대한 욕심, 인기에 대한 욕심, 사람에 대한 욕심 다 버리고 생활의 달인처럼 살아가면 그게 성공인 거다.” 그를 만나면 꼭 하고 싶었던 질문을 마지막으로 던졌다. “자료를 찾다 보니 그동안 인터뷰를 거의 안 했던데 정말 귀찮아서 그런 건가요? 오늘 말씀을 너무 잘 하셔서 사실 좀 놀랬습니다.” “아, 오늘 말을 너무 많이 했다. 이래서 내가 인터뷰를 잘 안 하려고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솔직히 창피하다. 나한테 뭐 배울 게 있나. 말을 너무 많이 해버리면 사람이 식상해진다. 이경규는 이미 너무 식상한 사람 아닌가. 이렇게 나와서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다 해버리면 수명이 짧아진다. 나도 살아남아야 한다. 내가 인터뷰를 잘 안 하는 이유? 그건 내 생존 방식이다”.

정세영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