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이 사람의 요즘]1930년대 만요 부르는 최은진 씨 아리랑 별에서 온 여자
1930년대 만요 부르는 최은진 씨1930년대 개화기 문화는 대한민국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매력적이고 독특하다. 기억조차 아련한 그 시절의 서정을 ‘풍각쟁이 은진’이 만요로 재현해냈다.
“제주 물고기 카페에서 선생님 노래를 들었어요. 조붓한 일본식 가옥에서 ‘뽕끼 작렬’인 개화기 노래를 듣고 있자니, 마치 구한말 경성의 어느 다방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더라고요. 담장에는 해당화 가득 피어 있지요, 견우와 직녀가 만난 전설의 바다는 잔잔하지요, 눈 감고 어깨춤 추던 그 순간을 어찌 잊겠어요.” “어우, 나 눈물 나려고 해. 그냥 말만 들어도 너무 그려지는 거야. 감사하죠, 감사해….”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금세 눈시울을 붉히는 맑디맑은 이 여인. ‘내 얘기 다 들어줄 것 같은 사람 만났다’며 손수건부터 꺼내 드는 한 많은 여인. 비옥한 몸매에 야들야들한 목소리, 에스닉과 키치를 절묘하게 아우르는 패션 센스, 서럽고 슬프지만 맑고 청아한 서정. ‘풍각쟁이 은진’과 마주 앉아 있자니 무수한 생각이 교차한다.
그의 두 번째 앨범 <풍각쟁이 은진>에 오붓하게 담겨 있는 열세 곡의 노래는 1930년대, 즉 개화기 시절에 불리던 아리랑이다. 그 당시 노래를 일컬어 정확히는 ‘만요 漫謠’라고 부르는 데, 일제강점기 시대에 생겨난 ‘코믹 송 장르’로 당시의 시대상을 꼬집는 익살과 해학이 담겨 있다. 뉴욕의 재즈가 동경을 거쳐 하루 만에 경성에 퍼지던 문화 개방의 시대. 미국,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던 ‘인텔리’는 엔카, 재즈, 블루스 스타일의 노래를 한국에 전파했고, 그 노래들은 ‘경성식’으로 재해석됐다.

최은진이라는 징검다리가 없었다면 다음 세대들은 이 ‘세련된 뽕끼’와 ‘서구식 멜랑콜리’를 모르고 살았으리라. “어릴 때부터 음악을 듣고 자랐어요. 국악부터 재즈까지 안 들어본 음악이 없는데, 어느 날 만요라는 걸 듣게 됐어요. 와, 이게 뭐지? 이건 내가 불러야 하는 노래구나, 그랬어요. 심장으로 막 스며들더라고요.”
종교에 빠져 신학대학에 갔고, 불교, 기독교를 시작으로 고대 경전까지 공부했을 정도로 열렬한 시기를 거쳐 아리랑과 인연을 맺은 건 운명이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도 그저 막연하게 노래가 하고 싶던 젊은 시절, 그는 뜻밖에도 ‘슈퍼 보이스 선발 대회’에 참가해 2등을 거머쥐었다(당시 성대모사의 달인인 배칠수 씨가 1등을 ‘먹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연극판에 뛰어든 그는 1인극, 퍼포먼스, 소리판을 넘나들며 노래도 하고, 연기도 하고, 행위 예술도 했다. 쓰레기 종량제가 막 시작되던 어느 해 겨울, 명성황후 복장을 한 채 길거리에서 주워 모은 재활용품을 긴 줄에 엮어 머리에 주렁주렁 매달고 ‘환경보호 1인 시위’를 하던 기억. 영하 17℃의 날씨에 왜 ‘그 짓’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시대를 잘 타고났다면 한 인물 하고도 남았을, 개방적이고 선진적이던 30~40대의 최은진. 가슴속에 차오르는 그 무엇을 토해낼 길 없던 그 시절, 아리랑에 대한 외사랑을 표현할 길이 열렸다.

2003년에 나온 ‘아리랑 소리꾼 최은진의 <다시 찾은 아리랑>’은 역사적으로도 가치 있는 앨범이다. ‘불설명당경 아리랑’부터 ‘밀양아리랑’까지 춘사 나운규 씨의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는 아리랑 곡을 담은 이 앨범은 비평가들로부터 호평도 받았다. 앨범을 내던 해, 그는 종로구 안국동에 작업실 겸 주점을 마련했다. 최은진이라는 이름 석 자 앞에 없으면 허전한 ‘아리랑’을 이름으로 내걸고 좀 더 본격적으로 아리랑을 연구하고 노래했다. 서양의 살롱 문화처럼 그의 ‘아리랑’엔 소설가, 시인, 정치인, 사업가까지 음악과 풍류를 아는 이들이 몰려들었다. 그가 1930년대 만요를 불러 앨범을 낸다고 했을 때 그와 술잔깨나 기울인 문화계 인사들이 돕겠다며 발 벗고 나섰다. 앨범 부클릿 속 아스라하게 번지는 애잔한 이미지는 사진가 변종모가 포착했고, 음악평론가 김진묵은 ‘역사를 이루는 작은 톱니’라는 제목으로 이번 앨범을 정의했다. 그가 이 가게를 처음 열던 해, 우연히 들러 새벽까지 질펀하게 술잔을 기울인 문화 집단 ‘수류산방’은 이 모든 일을 기획해주었다. ‘술에서 비롯한 문화 집단’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역사적 음반 속에는 개화기의 시대상이 아련하게 녹아 있고, 사람 마음을 달뜨게 하는 서구적 멜랑콜리가 춤을 춘다. 쿵짝쿵짝 경쾌한 리듬의 엔카 ‘고향’, 나태와 방종에 빠진 청년을 풍자한 ‘엉터리 대학생’, 전설의 무희 최승희가 가수로 활동하던 시절 부른 재즈풍의 ‘이태리 정원’ 등 심금을 울리는 노래들은 아카시아 향기 진동하는 봄밤에 들으면 황홀, 그 자체다!

정세영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