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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에 부치는 에세이] 여름밤은 깊어만 가고


(왼쪽) ’ 별들의 고향 1’, 90×90cm, 캔버스에 혼합 재료, 2009 
(오른쪽) 이 글은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총괄부장이며, 수필가, 문화 기획자로 활동하는 변광섭 씨의 새 책 <생명의 숲, 초정리에서>(고요아침) 중 한 편을 발췌한 것이다. 그의 책에는 역사와 문화, 인간과 자연의 어울림이 서정적인 글과 그림으로 담겨 있다. 책 속 예쁜 그림은 채송화, 솔방울 등 한국의 서정을 소재로 해 그리는 손순옥 씨의 작품. 


아침 햇살이 솔숲 사이로 찾아든다. 숲 속에서는 초록 나뭇잎들이 햇살을 받아 황홀하게 목욕을 하고, 하늘은 의연히 솟은 아침 산을 푸른 미소로 바라본다. 이른 새벽, 어디선가 꾀꼬리 우는 소리와 승악골의 바람이 문풍지를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다. 해오라기는 새하얀 깃털을 자랑하며 아침 햇살을 가로질러 날고 지난밤의 새까만 어둠도 환하고 맑은 기운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늘 그렇듯이 오늘도 티 없이 맑은 대자연의 싱그러움 앞에 겸손해지기 위해 하늘을 향해 마음속의 시린 상처를 토해낸다. 그리고 바로 그 빈자리에 싱싱한 햇살을 한 아름 집어삼킨다. 뒷산 솔숲 사이로 솟아오르는 태양과 그 태양의 햇살은 찬연하다 못해 너무 눈부셔 눈을 뜰 수 없다. 청개구리는 토란잎에 앉아 아침 햇살을 즐기고, 기어코 돌담을 타고 올라간 담쟁이도 한가롭다.
아카시아 꽃이 지고 밤꽃이 피면 초정리의 여름이 시작된다. 온 동네가 아카시아 꽃향기로 감미롭고 그윽하며 산천은 온통 젖빛 안개를 두른 듯 그리움의 마을이 된다. 아이들은 동산 위에 올라앉아 활짝 핀 꽃을 꺾어서 포도송이 따 먹듯 먹어치웠다. 향긋하고 달콤한 맛에 넋을 잃은 것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밤꽃이 피는 날이면 온 동네가 젖 냄새로 가득하다. 남편을 일찍 잃은 과부들은 비릿한 젖 냄새에 잠을 못 이루고 청년들은 마을 한가운데 있는 팽나  무 아래에 평상을 만들어놓고 밤늦도록 술판을 벌였다. 헉헉, 숨이 막히게 더운 날에는 낮이든 밤이든 약수로 목욕을 하면 그만이었다.

소년은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에 장단을 맞추며 콧노래 부르다가 잠이 들었는데, 부엌에서 솥뚜껑 여닫는 소리와 샘물 퍼 나르는 소리가 부산하다. 도대체 어머니는 언제 주무시고 언제 일어나시는지, 잠을 자긴 하는 건지, 신령스럽기도 하고 신비하기도 하며 수많은 베일에 싸여 있는 것 같다. 특히 손으로 뭘 하고 있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콩나물을 버무리든, 다림질을 하든, 맷돌을 돌리든, 아궁이에 불을 지피든, 뜨개질을 하든, 우리 4남매 옷매무새를 고쳐주든 부산한 어머니의 손길을 볼 때마다 ‘예쁘고 고운 엄마 손’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른 새벽에는 맑은 시냇가 빨래터에서 방망이질을, 밤에는 안방에서 다듬이질을 한다. 빨래터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마찬가지지만 다듬이 소리는 방망이와 다듬잇돌, 그리고 그 사이의 옷감이 부딪혀야 제 소리가 난다. 반질반질한 다듬잇돌 위에 풀질을 한 옷감을 올려놓고 박달나무로 깎은 방망이로 두드릴 때는 맑고 투명한 소리가 난다. 장단을 맞추고 박자에 따라 그 울림이 타악기 퍼포먼스처럼 들리기도 하고 파릇파릇거리는 대자연의 숨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다듬이 소리에 옆에 있는 호롱불이 장단 맞추고 덩달아 춤까지 춘다. 아주까리기름을 사용했던 호롱불은 으스름하거나 어렴풋하게, 그렇지만 고요한 초정리 밤을 더욱 정겹게 비추곤 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호롱불이 지치도록 바느질을 하셨다.

어머니만의 내밀한 공간이자 애틋한 사랑과 여백이 살아 숨 쉬던 안방에는 소년을 가슴 떨리게 하는 게 여럿 있었는데 노리개, 비녀, 빗에 대한 추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저고리 고름이나 치마허리에 다는 여인들만의 장신구인 노리개는 왕비에서부터 평민 아낙에 이르기까지 널리 애용되었다. 할머니께서 며느리를 위해 만들어주신 노리개는 보석과 매듭 장식이 어우러져 화려함을 맘껏 뽐냈는데 노리개 하나를 만드는 데 겨울 한 철을 꼬박 보내야 했다.

쪽 진 머리가 풀리지 않게 고정하는 비녀 역시 화사하고 은은한 멋과 향이 가득했다. 머리 장신구에는 비녀 외에도 비녀를 꽂은 쪽에 덧꽂는 장식품인 뒤꽂이와 큰머리를 장식할 때 쓰는 떨잠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이것들을 자개로 장식한 패물함에 넣고 귀하게 다루었다. 일 년에 몇 번, 친정이나 읍내로 나들이 갈 때 사용했던 아주 특별한 꾸미개였다. 지금이야 플라스틱으로 만든 갖가지 빗들이 쏟아져나오지만 예전에는 쓰임에 따라 빗들이 구분되어졌고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귀하게 관리해야 했다. 어머니는 반월소와 음양소라는 빗을 즐겨 사용했는데 반월소는 빗살이 굵고 성긴 빗으로 그 생김이 반달을 닮았다 하여 이름이 붙여진 것이고, 음양소는 한쪽은 빗살이 성기고 다른 한쪽은 빽빽한 것이 특징이었는데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 문양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시절 이후 그토록 촘촘하게 정렬돼 있고 들기름 향 가득했던 빗을 본 적이 없다.

여름밤은 애나 어른이나 깊은 잠을 잘 수 없다. 덥고 후텁지근한 열대야가 계속되면 모두들 마당 한가운데에 마련한 평상으로 올라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어머니와 시집 안 간 막내 고모는 감자와 옥수수를 쪄내고 설익은 참외와 수박까지 우물 속에서 꺼내 썰어대느라 부산했다. 모기를 쫓기 위해 소똥으로 불을 지펴 연기 피어오르게 하고, 더위에 약했던 아버지는 연신 부채질이다. 그마저도 부족한지 우물가로 달려가 등목을 했는데 펌프질 하는 소리와 어둠 속에서 찬물이 철썩철썩 등짝을 때리는 소리만 들어도 더위가 가셨다. 빛과 방향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대나무 발이 대청마루에서 담담하고 은은한 멋을 자랑한다. 보름달 밝은 어느 날 밤에는 대나무 발과 달빛, 바람이 서로 트라이앵글이 되어 속삭이듯이 흔들리고 반짝반짝거렸다. 달빛의 애절한 사연이 바람의 노래로, 발의 춤사위로 연출되는 순간을 어디 한두 번 목격했겠는가.
초정리 아이들에게도 여름밤의 놀이가 있었다. 마을 앞 시냇물 속에서 고기를 잡거나 목욕을 하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수박 서리, 참외 서리는 스릴 만점의 한여름 밤 빅 이벤트였다. 서리를 할 때는 항상 짱구가 앞장섰는데 귀신 많고 들짐승들로 들끓는다는 초정고개를 야밤에도 혼자 잘 다닐 정도로 담대했기 때문이다. 녀석은 해가 지기 전에 사전 답사를 통해 서리할 곳을 찾고 만약을 대비해 은폐와 엄폐를 할 만한 장소까지 준비를 해두는 등 그 준비가 철저했다. 행여나 주인에게 들키는 날에는 엄청난 후폭풍이 뒤따르기 때문에 치밀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했다. 아이들은 거사를 무사히 마치고 뒷산에 모여 앉아 수박이나 참외를 배 터지도록 먹고, 노래를 부르며 밤이 다 가도록 놀았다. 어른들은 전날 밤 누구네 집 아이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를 알고 있으면서도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철부지 아이들의 놀이라는 생각과 후덕한 인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순진한 것만큼 철딱서니도 없었지만 어른들은 우리를 용서하고 이해해주셨다.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 우물가 펌프질에 등목 하는 소리, 서리하는 소년의 발자국 소리, 자근자근 옥수수 씹는 소리, 수박씨 발라 먹는 소리, 시집 못 간 늙은 고모의 달그림자와 한숨 소리, 이웃집 아저씨의 술주정 소리, 뻐꾸기 부엉이 우는 소리, 후투티의 파닥거리는 소리, 치열한 생존의 현장에서 노래하는 여치와 매미의 합창 소리, 개골개골 와글와글 별빛 소리와 맹꽁이 소리…. 초정리 여름밤을 하얗게 수놓았던 아름다운 소리들이다.
초정리의 아릿한 향수와 그리움이 왈칵 치밀어 눈물까지 핑 돌 것 같다. 지금 당장이라도 초정리 옛 동산에 오르고 싶다. 정답던 동무들과 어깨동무하고 아지랑이라도 되어준다며 더욱 좋겠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