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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품은 12인의 제주찬가]자연 친화적 공간 '제주유리박물관' 정문건 관장 유리의 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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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로 만든 꽃다발. 그 투명함은 자연의 빛을 닮았다. 2 숲 속에 비가 내리는 풍경. 초롱초롱한 물방울이 사랑스럽다. 3 숲으로 둘러 싸인 박물관 전경. 4 연못과 정원에 띄운 총천연색의 나팔꽃 혹은 뒤집어진 우산, 뭐든 생각하기 나름이다.


중문에서 서귀포 방향으로 1136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니 전에 없던 붉은 횃불이 눈길을 끈다. “저건 뭐지?” 싶어 호기심에 차를 세우니 유리로 만든 설치 미술 작품이다. 그게 끝이 아니다. 한겨울도 아닌데 수십 개의 고드름이 처마 끝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깜빡 하면 속아 넘어갈 만큼 리얼하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고드름이 반가워 발길을 멈춘 그곳은 얼마 전 개관한 ‘제주유리박물관’이었다. 유리 공예가 정문건, 송희 부부가 3년에 걸쳐 완성한 이곳은 갤러리 겸 명상과 휴식을 즐길 수 있는 복합 문화 공간이다. 박물관 외부에서는 잘 볼 수 없지만 그곳에 들어서면 왜 복합 문화 공간인지 자연스레 알게 된다.
“제주에 박물관을 지으려고 마음먹은 후 거의 일 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제주에 내려왔어요. 평생 해보고 싶던 일을 실현하는 거라 그 밑작업부터 탄탄히 다져야 했죠. 저희와 비슷한 시기에 준비한 박물관이 먼저 문을 여는 걸 지켜보면서도 마음을 느긋하게 먹었어요.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면 좋은 일이 생기잖아요. 상예동에 이런 땅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죠. 게다가 도로 옆이라 접근도 용이하고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곳을 들락거렸어요. 볼수록 마음에 들더라고요. 무엇보다 자연 친화적인 공간을 만들고 싶었는데, 이 터가 저희를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어요. 오랜 시간 머릿속에 있던 그림을 대지에 부리는 일만 남은 거죠. 공사를 하고 작품을 설치하고, 그러다 돈이 떨어지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여유가 생기면 공사를 시작하기를 반복했어요. 아마 3~4년쯤 걸린 것 같아요. 아직도 다 완성된 건 아니에요. 서울에서 작품이 완성되면 배로 싫어오는데, 그걸 나르는 것만도 큰 일이죠.”
제주에는 ‘맹지’라고 부르는 땅이 있는데, 산의 계면을 뚫어 입구를 만든 것을 일컫는다. 도로를 개발하기 위해 마련한 땅이지만 덕분에 도로 한가운데서 상상도 할 수 없는 무릉도원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숲이 우거지고 계곡이 흐르는 유리박물관.’ 맑고 투명한 성질을 가진 유리와 오염되지 않은 대자연이 만나 어우렁더우렁 춤을 추는 곳. 공예가가 직접 작품을 만들고 전시를 하는 곳이라 더욱 의미가 깊다.
하늘로 오르는 계단, 빨랫줄에 널린 수건, 찌그러진 전구, 타오르는 횃불, 올챙이와 버섯,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 조용히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온갖 오브제는 유리라는 소재를 통해 아름답게 재현된다. 유리라는 소재가 흥미로운 이유는 고유한 성질 때문에 다채로운 변형과 조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모래에서 비롯한 유물, 유물로 비롯된 형상. 고체에서 액체로, 액체에서 다시 고체로 유연하게 형태를 바꾸는 유리는 매혹적이다. 유리박물관이 아름다운 이유도 거기에 있다. 자연을 해치지 않으면서 자연과 아주 잘 어울리는, 그 속에서 빛을 발하는 유리 작품은 절로 감탄사를 내뱉게 한다. 개관하자마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사람들로 북적이는 이유는 작가만의 언어로 오랜 시간 충실하게 만들어 신선한 자극을 주기 때문이다.
지난 15년간 유리의 근원과 형태를 연구하며 현대 유리 문화 발전에 기여한 정문건 관장은 국내의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유리 작가이다. 소재의 특성상 다루기가 까다롭고, 일상생활에 널리 이용되기는 하지만 대개 식기류에 한정돼 있는 유리는 외국에서조차 대중적인 장르가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에서 유리의 예술적 가치가 남다르다.
“유리는 그 어떤 미술 재료보다 소재 자체가 흥미롭고, 과학적 접근이 필요해요. 그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뜻이죠. 무기질의 물체가 녹았다가 냉각되거나 결정화가 일어나지 않은 채 고체화된 것, 또는 동결된 냉각 액체를 유리라고 부르죠. 유리는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하는 과학적인 소재예요.” 그는 유리 공예 산업이 발달한 영국에서 수학한 후 전 세계를 돌며 유리 공예 장인을 만났다. 또 그 결과를 책으로 엮어 출간했고, 보다 많은 사람에게 유리를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제주에 유리박물관을 지은 것도 유리의 대중화를 위함이다. 단, 거기엔 큰 원칙이 존재한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조화롭게!’ 유리라는 소재로 자연을 벗삼아 보다 많은 사람이 ‘유희 遊戱’를 즐기는 것. 그가 제주에 유리박물관을 짓기로 결심한 이유다. _ 사진 한홍일

백문이 불여 일견! 유리가 궁금하다면 배워보자
제주유리박물관에는 유리의 역사와 만들어지는 과정 등 유리에 관한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는 체험 학습장이 마련돼 있다. 체험 프로그램을 신청하면 비교적 손쉽게 나만의 접시나 꽃병을 만들어 가질 수 있다.1인당 학습 비용은 2만 원.문의 1588-0511 www.glassmuseum.co.kr

정문건 몽골 유목민의 기질이 물씬 느껴지지만 한평생 여리고 깨지기 쉬운 유리를 다뤄온 예술가. 그는 깨지기 쉽지만 그 본질은 강하고 질긴 유리와 묘하게 닮아 있다. 홍익대와 영국 왕실 미술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저서로 <유리의 근원과 현대 유리 미술>이 있다.
정세영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