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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품은 12인의 제주찬가] 장석주 시인의 '만년의 꿈' 느림의 땅, 바람의 섬 제주


나는 내륙 출생이다. 그러므로 나의 내면은 바다가 배제된 견고한 뭍의 정서와 유교에 바탕을 둔 농본 사회의 오래된 관습에 물들어 있다. 당연하다. 열일곱 살 때 가출해 동해안에서 처음으로 바다를 봤다. 집이 싫어서 나왔는지, 바다가 보고 싶어서 집을 나왔는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어쨌든 나는 조릿대가 밀생하는 언덕에 서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바람이 서걱거리며 불어갔다. 그때 나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스스로 팽개치고 나와 방황을 시작한 터라, 바다를 마주하고 서 있는 내 가슴은 차라리 불안과 두려움으로 떠는 한 마리 작은 짐승이었다. 한참 뒤에 읽은 조지훈 趙芝薰의 시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을 읽고 깜짝 놀랐다. 불안과 두려움에 떨며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한 소년의 심경이 고스란히 겹쳐졌기 때문이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나는 아직도 작은 짐승이로다.// 인생은 항시 멀리/ 구름 뒤에 숨고// 꿈결에도 아련한/ 피와 고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괴로운 짐승이로다.// 모래밭에 누워서/ 햇살 쪼이는 꽃조개같이/ 어두운 무덤을 헤매는 망령인 듯/ 가련한 거이와 같이// 언젠가 한번은/ 손들고 몰려오는 물결에 휩싸일// 나는 눈물을 배우는 짐승이로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그 뒤로 마흔 해쯤 흘렀다. 과연 나는 ‘눈물을 배우는 짐승’으로 오늘날까지 헤매왔다. 이제 내게 남은 소망은 한 가지, 평화로운 땅에서 느림의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다시 바다가 강렬하게 내 마음에 찍힌 것은 서른 해 전쯤 제주도를 찾았을 때다. 바다는 무국적 無國籍이다. 항상 일렁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자를 새로운 몽상으로 이끈다. 나는 그게 좋다. 바다는 정주 定住를 허락하지 않는다. 바다는 떠도는 자의 몫이다. 바다는 모든 삶을 야성과 길들임 ‘사이’로 이끌고, ‘사이’에서의 삶이란 늘 오디세우스의 항해일 터다. 바다는 섬을 고립시킨다. 그래서 섬에서는 삶이 자연스럽게 유배 형식을 띤다. 유배는 저 너머에 대한 꿈을 꾸게 한다. 그 점도 마음에 든다. 제주도는 느림의 땅, 바람의 섬이다. 그 제주도를 향한 간절한 마음이 때로 시로 흘러나오곤 했다. 가장 최근의 시는 협재 바다와 서귀포를 노래한 시다. “푸른 일획이다./ 이 세상 다시 오면/ 여기를 가장 먼저 달려와 보고 싶다./ 아련한 가을비 속에/ 죽은 고모 이마보다/ 찬 바다!”(‘협재 바다’) “연필과 노트를 산 뒤/ 인근 대학교 계단에 걸터앉아/ 웃통 벗고 농구하는 애들을 본다./ 새순들이 초록 입술 내밀어/ 햇빛을 쪽쪽 빨아들인다.// 어느 해 늦봄/ 햇빛은 비둘기 빛으로 내리고/ 바다 쪽에서 귀 없는 바람이 불어왔다./ 천도복숭아 먹은 뒤/ 복숭아 씨 같은/ 서귀포에 다시 가고 싶다.”(‘서귀포’)
지금까지 서른 번쯤 제주도를 다녀왔다. 그사이에 증오와 질풍노도의 시기가 내 삶에서 지나갔다. 이제 만년 晩年의 삶은 제주도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제주도에서 한라산과 수많은 오름들, 아열대 기후, 내륙에서는 볼 수 없는 열대식물들, 청명한 하늘, 비자림 숲, 산굼부리, 동서와 남북으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들, 협재 바다, 돌과 바람들…. 사람이 어디에 사는가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장소가 실존의 의미를 규정하는 까닭이다. 나는 제주도에서 살기를 꿈꾼다. 그것은 느린 삶에 대한 열망과 닿아 있다. 그동안 너무 빨리 달려왔으니 이제는 그 속도를 늦추고 싶다. 셰익스피어는 우리에게 속삭인다. “빨리 달리면 넘어지기 십상이다.” 이제 더는 넘어지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제주도에서의 내 삶은 온전하게 고요의 동학 動學 속에 있게 되리라.
나는 제주도에 작은 집을 마련하고 집필실을 옮길 계획이다. 뜰에는 모란과 작약을 심고, 낮은 돌담가에는 열두 그루의 자두나무를 심겠다. 여름에는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환절기에는 가끔 감기에 걸려 기침을 하며 따뜻한 생강차를 마시며 <주역>이나 아우구스티누스의 <명상록>을 백 번씩 천천히 읽겠다. 저녁에는 창가에 램프를 걸어두고, 혼자 밥을 끓이시는 노모와 멀리 있는 딸과 돌아오지 않는 새들과 오래된 이야기들을 끌어모아 몇 편의 인상적인 서정시를 쓰리라. 한번 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들 때문에 삶은 하염없는 감미로움으로 물들며 대책 없이 깊어질 터이다. 새벽마다 마당을 비질하고 나무를 가꾸며 오후에는 오름을 산책하다가 밤에는 독학으로 그리스어를 익히고 악기 樂器를 배워 멋지게 연주하겠다. 벗들이 찾아오면 바다에서 건져온 해산물로 요리를 해서 그들을 배불리 먹이리라. 제주도에서 보내는 내 만년의 삶이 양명하기는 하겠으되 결코 한가롭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에서 내 삶에 지워진 유일한 의무는 충만한 삶이 불러오는 행복일 테니까!_ 장석주

장석주 시, 소설, 비평, 에세이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는 이 시대의 문장가. 2만 5천 권의 책이 들어찬 작업실에서 독서와 집필에 몰두하는 그는 제주에서 보내는 만년을 꿈꾼다. 낮에는 정원을 가꾸고 밤에는 그리스어를 익히는!

정세영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