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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JTS자원봉사자 김정준 씨가 전하는 둥게스와리 마을 이야기 1200원 짜리 분유 한 봉지가 한 아이를 살립니다
인도에서도 가장 낮은 신분 계급인 불가촉천민이 모여 사는 둥게스와리 마을은 과거 ‘시체를 갖다 버리던 곳’이었다. 16년 전, 이 죽음의 땅 위에 병원을 짓고 학교를 세운 사람들이 있다. UN 경제사회이사회 산하 조직인 JTS(조인투게더 소사이어티)는 인도 정부조차 외면한 천민들을 돌보며 이 지역을 전 세계에 모범이 되는 ‘자원봉사의 장’으로 만들었다. 둥게스와리 마을에서 6년 동안 봉사활동 중인 김정준 씨가 이 마을의 기적을 들려준다.

누구나 인생에서 한번쯤 커다란 계기를 만나게 된다. 지금껏 살아온 인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섬광 같은 한순간. 그 변화의 시작은 어떤 사건에서 비롯되기보다는 오랜 고민 끝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 같다. 2004년, 내 나이 서른다섯에 손에 쥐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인도 둥게스와리 마을로 떠난 것도 그랬다. ‘인생을 이렇게 무의미하게 살아도 되는 걸까?’라는 총체적인 물음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6년 전, GE(General Electric) Medical System라는 의료기기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CT나 MRI를 찍는 의료기기 엔지니어로 그리고 심장진단 장비의 운용에 관한 교육과 프로모션을 담당하는 스페셜리스트로 사는 동안 참 많은 사람의 아픔을 지켜봤다. 누군가의 고통을 지속적으로 간접 경험하다 보면 인간은 누구나 이상주의를 꿈꾸게 된다. ‘아픈 사람이 최소한의 치료라도 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모든 사람이 최소한의 행복은 누리고 살았으면….’ 그 막연한 열망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그즈음,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인생의 답을 찾기 위해 배낭여행을 떠났다.


첫 여행지는 국제구호개발단체인 JTS가 사업을 펼치는 인도 비하르 주 가야 지역의 ‘불가촉천민(인도의 카스트 제도에서 사성 四姓에 속하지 않는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 마을 둥게스와리였다. 평소 관심을 갖고 지켜본 마을인데, 그곳에 JTS가 지은 지바카 병원이 있었다. 결핵 치료를 비롯해 저체중아 및 임신부의 영양 지원 등 다양한 모자 보건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엄마 젖이 나오지 않아 영양실조에 걸린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눈은 쾡 하고 얼굴엔 덕지덕지 파리가 내려앉은 아이의 모습은 길거리에 버려진 쓰레기의 처지와 다를 바 없었다. 출산을 마친 산모 역시 몸조리는커녕 당장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지경이었다. 당시 병원에는 그들을 도울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철저한 계급 사회인 인도에서 불가촉천민의 생명은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참담한 현실 앞에 나는 무작정 그곳에 머물기로 마음먹고 일의 우선순위를 정했다. 수백 명의 마을 사람을 고작 서너 명의 인력으로 골고루 돕는 것은 불가능했다. 갓 태어난 아기부터 살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나는 신생아가 태어난 가정을 돌아다니며 아이의 건강 상태를 돌보고 분유를 나눠주었다. 500그램짜리 분유 한 봉지면 아이가 보름 동안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데, 한 인간의 수명을 15일간 연장하는 데 드는 비용이 단돈 1200원.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 고약하고 버려진 땅에서 서서히 행복을 느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 이전에는 몰랐던 행복감을 안겨주었다. 내가 행복하면 그들도 역시 행복해진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나는 그들에게 일종의 롤 모델이 되었다. 죽음의 경계에 서본 사람은 간절히 바란다. ‘나도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래서 나는 언제나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그들을 가르치고 바꾸려 하기 이전에 내가 먼저 솔선수범해야 한다.
둥게스와리 마을을 거쳐간 수많은 자원봉사자와 지난 16년 동안 꾸준히 지역 주민을 돕고 있는 인도 JTS 덕분에 지금껏 의존적이기만 하던 둥게스와리 사람들이 스스로 뭔가 해보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곳에서 태어난 아이는 세상에 나오는 순간 불가촉천민이라는 신분의 굴레를 뒤집어쓴다. 그들의 아버지, 할아버지 또한 그렇다. 자원봉사자가 그들이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다른 인생’인 셈이다. 그들은 나 혹은 또 다른 자원봉사자를 통해 달라졌다. 병원에서 급식을 나눠주고, 거리에서 자전거를 수리해주기도 한다. 또한 둥게스와리 주민들은 공동 노동을 통해 마을의 대소사를 해결한다. 최근에는 무보수 자원봉사 조직인 ‘마하트마’를 발족해 각 마을에서 자원한 주민이 마을 자체 일뿐만 아니라 JTS 일까지 돕고 있다.
나는 그들과 함께하는 삶 속에서 다시금 행복을 배우고, 그들은 내 모습을 거울 삼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누군가를 돕는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나는 마하트마 간디의 말을 떠올린다. “바로 우리 자신이 세상에서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그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구술 김정준(인도 JTS 자원봉사자) 정리 정세영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