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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품은 12인의 제주찬가]우리들 컨트리클럽 대표 김수경 씨 빛의 예술가' 제임스 터렐을 만나다
PS1이나 퐁피두가 아닌 제주도에서 제임스 터렐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건 분명 엄청난 행운이다. 풍수지리학적으로도 명당으로 꼽히는 제주 돈내코 지역의 ‘우리들 컨트리클럽 3번 홀 코스’. 제임스 터렐도 한 눈에 반해 ‘스카이 스페이스’를 설치하기로 마음 먹은 그곳에서 일출과 일몰을 모두 지켜본 소감을 글로 전하기란 역시, 불가능이다.

여명이 밝아 오는 시각, 제임스 터렐의 설치 미술 작품 ‘스카이 스페이스’에 앉아 있으면 황홀경이 무엇인지 체감하게 된다. 분명 뻥 뚫려 있는 하늘인데, 얇은 막에 가려진 것처럼 회화적인 풍경. 자연광과 LED 조명의 치밀한 계산 속에 어느 덧 하늘엔 구름 한 점, 티끌 하나 없는 무결점의 우주가 보인다.


제주가 ‘미술의 섬’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이래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미국의 유명한 설치 미술가 제임스 터렐의 작품이 ‘우리들 컨트리클럽’ 3번 홀 코스에 안착했다는 사실이다. ‘빛의 예술가’로 불리는 털보 아저씨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아시아는 물론 미국과 유럽에서도 비행기를 타고 관람객이 날아올 정도라니 그 유명세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운 좋게도 <행복>은 지금껏 국내의 어떤 매체에도 공개된 적 없는 제임스 터렐의 제주 ‘스카이 스페이스 Sky Space’를 취재하는 기회를 얻었다. 하루 두 번, 일출과 일몰 시각에만 만날 수 있는 그의 설치 작품을 감상한 소감은 한마디로 ‘최고!’였다. 좀 더 그럴듯한 표현을 찾아내고 싶지만 그냥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게 나을 것 같다. 터렐 할아버지도 그랬다지 않은가. “설명하려 들지 말고 그냥 느끼는 대로 받아들여라”고.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미확인 비행 물체’ 혹은 ‘낮에 뜬 달’처럼 보이는 이 사진들로 그의 작품이 주는 감동을 온전히 전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제임스 터렐의 작품을 소유한 주인공이자 그와 오랜 인연을 맺고 있는 우리들 컨트리클럽 김수경 대표의 경험이 그 감동을 조금이나마 채워줄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작품을 두 번째로 감상한 건 뉴욕의 PS1 현대미술센터에서였어요. 무리한 비행 일정으로 녹초가 된 상태였죠. 지인의 전시가 열린다기에 갔는데 제임스 터렐의 작품도 전시 중이더라고요. 1980년인가, 파리의 퐁피두 센터에서 터렐의 작품을 본 적이 있어요, 당시에 별 감흥을 얻지 못한 터라,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할지 말지 고민했어요(그의 작품은 일몰 시각에만 볼 수 있다). 평소 같으면 포기했을 텐데, 그날은 왠지 기다리고 싶더라고요. 작품을 보러 들어가니 초등학교 교실이 만들어져 있었어요. 의자에 앉았죠. 그리고 정확히 5시 48분이 되자 천장이 열리면서 하늘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문이 다 열리자 하늘 위로 북극성이 떠오르는 거예요. 그걸 보는 순간 몸이 허공에 붕 뜨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황홀했죠”.
김수경 씨의 표현에 따르면 터렐의 작품을 보고 나면 마치 ‘멘털 스파 mental spa’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피로와 스트레스로 묵직한 몸이 뜨거운 물에 사르르 녹듯 정신이 말랑말랑해지는 것이다. 그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김수경 씨가 운영하는 청담동의 ‘오룸 갤러리’에 제임스 터렐이 나타난 것이다. 처음 그의 작품을 만난 것이 30대였으니, 곱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사이 한국 여성과 결혼한 터렐은 서울은 물론 제주도도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 그가 오룸 다이닝에 들어선 것은 전적으로 묘한 기운, 즉 영적인 어떠한 이끌림 때문이었다. ‘내면의 빛’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퀘이커 Quaker 교도인 터렐은 아마도 자신의 작품을 ‘알아볼 사람’의 기운에 이끌린 듯싶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은 시작되었고, 김수경 씨는 터렐의 작품을 우리들 컨트리클럽에 설치하기 위해 4년간 공을 들였다. 터렐은 자신의 작품을 갖고 싶다면 보다 많은 작품을 본 후에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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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동굴을 연상시키는 제임스 터렐의 설치 미술 작품 ‘스카이 스페이스’. 사진은 일몰 직전, 작품의 외관을 촬영한 것이다. 2 일몰 시각 작품 내부에서 정면을 바라다 본 풍경. 가장 멀리 보이는 사각형은 벽이나 면이 아니라 뻥 뚫려 있는 것이다.


‘다 늙어’ 조우한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제주의 명당으로 불리는 돈내코 지역 우리들 컨트리클럽 3번 홀 코스에 ‘스카이 스페이스’를 설치했다. 이 작품은 일출과 일몰 시각에 감상할 수 있는 설치 미술로, 외부에서 보면 거대한 동굴을 연상케 한다. 일출 시각 스카이 스페이스가 작동(내부의 LED 조명이 시간차를 두고 바뀌는 프로그램)하기 시작하면 동굴에서는 분홍빛 광선이 쏟아져나온다. 하지만 외부에서 바라본 이 풍경은 관전 포인트가 아니다. 관람객은 스카이 스페이스 뒤편에 마련된 입구를 통해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관람석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짙은 어둠 속에 있다. 곧 다가올 빛의 세계를 체험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인 셈이다. 어둠 속에서 인간의 시각은 낮은 빛의 조도에 적응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관람석에 앉으면 정면으로는 네모난 창이, 천장에는 둥근 원이 보인다. 사실상 이것은 뻥 뚫린 공간이지만 눈으로 보기엔 얇은 막이 가려져 있는 하나의 면처럼 보인다. 그리고 서서히 해가 뜨는 동안 네모난 창과 둥근 원 안에서는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스카이 스페이스 내부의 LED 조명과 엷게 내려앉은 오후 6시의 석양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밖은 어두워지는데 하늘은 더욱 명료한 푸른색이 된다. 이 오묘한 색의 변화는 아주 치밀하게 계산한 프로그램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그 어떤 자연의 빛보다 아름답다, 황홀하다, 거짓말 같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보면서 빛이 무엇을 밝혀주느냐가 아니라 빛 자체의 정체, 즉 빛의 투명성, 불투명성, 부피와 색 등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 빛의 속성은 자주 변하거나 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시간성이 빛의 경험에 가해진다. 이 점에서 터렐은 특별하다”. -(2008) 중
제임스 터렐이 빛을 연구하기 시작한 건 퀘이커 교도이던 할머니가 들려준 “마음속에 빛을 지닌 사람이 돼라”는 말 때문이었다. 애리조나의 시골 목장에서 유년기를 보낸 그는 독수리가 날아다니고 북극성이 떠오르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빛의 황홀경을 체험했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 빛을 연구하는 데 일생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물리학, 안과학 등 빛에 관한 모든 학문을 섭렵했으며, 어떤 재료도 사용하지 않고 빛과 시각만으로 작품을 형상화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 과정을 통해 어떤 이미지나 페인트의 방해 없이 순수한 빛과 색을 직접 보여주면서 그 원리를 극화하는 경지에 도달한다. 아주 멀리 있다고 생각되는 하늘을 은밀한 공간 속에 마술적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은 1960년대에 등장한 미니멀리즘을 대표한다는 찬사를 받았다.
먼 진실을 눈앞에 놓고자 하는 현대 미술의 야망을 더없이 잘 보여주는 예다. 그리고 인간의 경험이나 관찰이 우리가 보는 내적 빛에 의해 밝아질 수 있다는 증거. 터렐의 작품을 만난다는 건 인간의 가장 깊숙한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과 같다. 그는 지난 30년간 북부 애리조나에 있는 사화산의 분화구를 예술품으로 변형시키는 대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 작품을 통해 빛과 시각의 표현을 초월한 또 다른 차원의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아직 미완성인 거작 ‘로덴 분화구 (Roden Crater)’를 통해 우리는 ‘빛의 예술’을 넘어 ‘우주’를 볼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명당에 앉아 ‘스카이 스페이스’ 감상하기
일출과 일몰 시각에만 관람할 수 있는 ‘스카이 스페이스’는 총 30명이 단체 관람을 할 수 있다. 제주 스카이 스페이스는 천장이 타원형, 정면이 사각형 형태로 뚫려 있는데, 천장과 정면을 함께 바라볼 수 있다는 점(터렐의 작품 중 천장만 뚫려 있는 것도 있다)과 천장이 타원형이라는 점(대부분 천장도 사각형으로 뚫려 있다)이 독특하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감상하기 위해서는 ‘명당’을 사수해야 한다. 정면과 천장을 이루는 지점 즉, 한가운데 자리! 문의 1577-0064

김수경 제주 우리들 컨트리클럽 김수경 대표는 현재 청담동에서 프렌치 레스토랑 오룸 다이닝과 오룸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정세영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