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이 밝아 오는 시각, 제임스 터렐의 설치 미술 작품 ‘스카이 스페이스’에 앉아 있으면 황홀경이 무엇인지 체감하게 된다. 분명 뻥 뚫려 있는 하늘인데, 얇은 막에 가려진 것처럼 회화적인 풍경. 자연광과 LED 조명의 치밀한 계산 속에 어느 덧 하늘엔 구름 한 점, 티끌 하나 없는 무결점의 우주가 보인다.
제주가 ‘미술의 섬’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이래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미국의 유명한 설치 미술가 제임스 터렐의 작품이 ‘우리들 컨트리클럽’ 3번 홀 코스에 안착했다는 사실이다. ‘빛의 예술가’로 불리는 털보 아저씨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아시아는 물론 미국과 유럽에서도 비행기를 타고 관람객이 날아올 정도라니 그 유명세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운 좋게도 <행복>은 지금껏 국내의 어떤 매체에도 공개된 적 없는 제임스 터렐의 제주 ‘스카이 스페이스 Sky Space’를 취재하는 기회를 얻었다. 하루 두 번, 일출과 일몰 시각에만 만날 수 있는 그의 설치 작품을 감상한 소감은 한마디로 ‘최고!’였다. 좀 더 그럴듯한 표현을 찾아내고 싶지만 그냥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게 나을 것 같다. 터렐 할아버지도 그랬다지 않은가. “설명하려 들지 말고 그냥 느끼는 대로 받아들여라”고.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미확인 비행 물체’ 혹은 ‘낮에 뜬 달’처럼 보이는 이 사진들로 그의 작품이 주는 감동을 온전히 전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제임스 터렐의 작품을 소유한 주인공이자 그와 오랜 인연을 맺고 있는 우리들 컨트리클럽 김수경 대표의 경험이 그 감동을 조금이나마 채워줄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작품을 두 번째로 감상한 건 뉴욕의 PS1 현대미술센터에서였어요. 무리한 비행 일정으로 녹초가 된 상태였죠. 지인의 전시가 열린다기에 갔는데 제임스 터렐의 작품도 전시 중이더라고요. 1980년인가, 파리의 퐁피두 센터에서 터렐의 작품을 본 적이 있어요, 당시에 별 감흥을 얻지 못한 터라,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할지 말지 고민했어요(그의 작품은 일몰 시각에만 볼 수 있다). 평소 같으면 포기했을 텐데, 그날은 왠지 기다리고 싶더라고요. 작품을 보러 들어가니 초등학교 교실이 만들어져 있었어요. 의자에 앉았죠. 그리고 정확히 5시 48분이 되자 천장이 열리면서 하늘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문이 다 열리자 하늘 위로 북극성이 떠오르는 거예요. 그걸 보는 순간 몸이 허공에 붕 뜨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황홀했죠”.
김수경 씨의 표현에 따르면 터렐의 작품을 보고 나면 마치 ‘멘털 스파 mental spa’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피로와 스트레스로 묵직한 몸이 뜨거운 물에 사르르 녹듯 정신이 말랑말랑해지는 것이다. 그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김수경 씨가 운영하는 청담동의 ‘오룸 갤러리’에 제임스 터렐이 나타난 것이다. 처음 그의 작품을 만난 것이 30대였으니, 곱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사이 한국 여성과 결혼한 터렐은 서울은 물론 제주도도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 그가 오룸 다이닝에 들어선 것은 전적으로 묘한 기운, 즉 영적인 어떠한 이끌림 때문이었다. ‘내면의 빛’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퀘이커 Quaker 교도인 터렐은 아마도 자신의 작품을 ‘알아볼 사람’의 기운에 이끌린 듯싶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은 시작되었고, 김수경 씨는 터렐의 작품을 우리들 컨트리클럽에 설치하기 위해 4년간 공을 들였다. 터렐은 자신의 작품을 갖고 싶다면 보다 많은 작품을 본 후에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조언했다.
1 마치 동굴을 연상시키는 제임스 터렐의 설치 미술 작품 ‘스카이 스페이스’. 사진은 일몰 직전, 작품의 외관을 촬영한 것이다. 2 일몰 시각 작품 내부에서 정면을 바라다 본 풍경. 가장 멀리 보이는 사각형은 벽이나 면이 아니라 뻥 뚫려 있는 것이다.
‘다 늙어’ 조우한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제주의 명당으로 불리는 돈내코 지역 우리들 컨트리클럽 3번 홀 코스에 ‘스카이 스페이스’를 설치했다. 이 작품은 일출과 일몰 시각에 감상할 수 있는 설치 미술로, 외부에서 보면 거대한 동굴을 연상케 한다. 일출 시각 스카이 스페이스가 작동(내부의 LED 조명이 시간차를 두고 바뀌는 프로그램)하기 시작하면 동굴에서는 분홍빛 광선이 쏟아져나온다. 하지만 외부에서 바라본 이 풍경은 관전 포인트가 아니다. 관람객은 스카이 스페이스 뒤편에 마련된 입구를 통해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관람석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짙은 어둠 속에 있다. 곧 다가올 빛의 세계를 체험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인 셈이다. 어둠 속에서 인간의 시각은 낮은 빛의 조도에 적응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관람석에 앉으면 정면으로는 네모난 창이, 천장에는 둥근 원이 보인다. 사실상 이것은 뻥 뚫린 공간이지만 눈으로 보기엔 얇은 막이 가려져 있는 하나의 면처럼 보인다. 그리고 서서히 해가 뜨는 동안 네모난 창과 둥근 원 안에서는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스카이 스페이스 내부의 LED 조명과 엷게 내려앉은 오후 6시의 석양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밖은 어두워지는데 하늘은 더욱 명료한 푸른색이 된다. 이 오묘한 색의 변화는 아주 치밀하게 계산한 프로그램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그 어떤 자연의 빛보다 아름답다, 황홀하다, 거짓말 같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보면서 빛이 무엇을 밝혀주느냐가 아니라 빛 자체의 정체, 즉 빛의 투명성, 불투명성, 부피와 색 등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 빛의 속성은 자주 변하거나 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시간성이 빛의 경험에 가해진다. 이 점에서 터렐은 특별하다”. -
제임스 터렐이 빛을 연구하기 시작한 건 퀘이커 교도이던 할머니가 들려준 “마음속에 빛을 지닌 사람이 돼라”는 말 때문이었다. 애리조나의 시골 목장에서 유년기를 보낸 그는 독수리가 날아다니고 북극성이 떠오르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빛의 황홀경을 체험했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 빛을 연구하는 데 일생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물리학, 안과학 등 빛에 관한 모든 학문을 섭렵했으며, 어떤 재료도 사용하지 않고 빛과 시각만으로 작품을 형상화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 과정을 통해 어떤 이미지나 페인트의 방해 없이 순수한 빛과 색을 직접 보여주면서 그 원리를 극화하는 경지에 도달한다. 아주 멀리 있다고 생각되는 하늘을 은밀한 공간 속에 마술적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은 1960년대에 등장한 미니멀리즘을 대표한다는 찬사를 받았다.
먼 진실을 눈앞에 놓고자 하는 현대 미술의 야망을 더없이 잘 보여주는 예다. 그리고 인간의 경험이나 관찰이 우리가 보는 내적 빛에 의해 밝아질 수 있다는 증거. 터렐의 작품을 만난다는 건 인간의 가장 깊숙한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과 같다. 그는 지난 30년간 북부 애리조나에 있는 사화산의 분화구를 예술품으로 변형시키는 대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 작품을 통해 빛과 시각의 표현을 초월한 또 다른 차원의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아직 미완성인 거작 ‘로덴 분화구 (Roden Crater)’를 통해 우리는 ‘빛의 예술’을 넘어 ‘우주’를 볼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명당에 앉아 ‘스카이 스페이스’ 감상하기
일출과 일몰 시각에만 관람할 수 있는 ‘스카이 스페이스’는 총 30명이 단체 관람을 할 수 있다. 제주 스카이 스페이스는 천장이 타원형, 정면이 사각형 형태로 뚫려 있는데, 천장과 정면을 함께 바라볼 수 있다는 점(터렐의 작품 중 천장만 뚫려 있는 것도 있다)과 천장이 타원형이라는 점(대부분 천장도 사각형으로 뚫려 있다)이 독특하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감상하기 위해서는 ‘명당’을 사수해야 한다. 정면과 천장을 이루는 지점 즉, 한가운데 자리! 문의 1577-0064
김수경 제주 우리들 컨트리클럽 김수경 대표는 현재 청담동에서 프렌치 레스토랑 오룸 다이닝과 오룸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