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베를린, 드레스덴, 라이프치히로 떠난 가족 여행 예술적인 여행을 원한다면 독일로 떠나라
다시 떠오르기 시작한 철학과 예술의 나라, 독일의 이름난 세 도시로 떠났다. 베를린은 지구촌의 새로운 문화 수도임을 과시했고 드레스덴은 바로크 건축의 전시장이었다. 라이프치히는 불멸의 음악가 바흐와 멘델스존의 도시였다. 도저한 문화적 토양 위에서 다채로운 예술이 탐스러운 꽃을 피운 도시들로 지금 떠난다.

1 베를린 국립 오페라극장.


2 바로크 양식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드레스덴의 아이콘, 츠빙거 궁전.

새로운 세기의 새로운 문화 수도, 베를린 지난해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베를린이 새삼 주목을 받았지만, 몇 년 전부터 이 도시를 달구고 있는 가장 뜨거운 이슈는 예술이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창작을 위한 신흥 무대로 주저 없이 선택한 베를린은 전 세계 예술의 중심축으로 거듭나고 있다. 베를린은 이제 전통과 첨단, 주류와 비주류, 상부와 하위문화가 아름답게 공존하는 예술의 용광로라고 불릴 만하다.
뉴욕과 파리의 예술가들이 자신의 둥지를 등지고 새롭게 찾은 보금자리는 베를린이었다. 베를린은 상대적으로 물가가 싸고 주택 가격도 헐했다. 더구나 빈 건물이 많았다. 유리 지갑의 예술가들에게 제격이었다. 젊은 아티스트들은 옛 동베를린의 버려진 건물과 주인 없는 공장을 자신들의 캔버스로 삼았다. 베를린 도심에 자리한 타헬레스가 그런 경우다.
타헬레스는 원래 백화점 건물이었다. 한때 프랑스 전쟁 포로를 수용하던 공간으로 쓰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공습을 받아 폐허가 됐다. 그렇게 오랜 시간 방치되던 건물은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철거될 운명에 처했지만 1990년 2월 일군의 실험적인 예술가들에 의해 무단으로 점거되면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예술가들의 ‘침입’ 이후 타헬레스는 겉과 속이 다른 건물이 됐다. 외관은 황폐해 보이지만 내부로 들어서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무엇보다 벽면을 빈틈없이 메우고 있는 강렬한 그래피티에 입이 벌어진다. 건물에 상주하는 예술가들과 방문객들이 끊임없이 덧칠해서 생긴 알로록달로록한 결과물이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독특한 오라가 느껴진다. 타헬레스에는 크고 작은 작업실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 다양한 국적의 예술가들이 회화, 조각, 음악, 사진 등에 천착하고 있는데, 이들이 내는 월세는 그야말로 상징적인 수준이다. 정부가 보조금을 지원해주기 때문이다. 독일 정부는 예술가들의 창작 공간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3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무려 2711개에 달하는 관 모양의 콘크리트 구조물이 촘촘하게 들어서 있는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학살된 무고한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4 바흐의 얼굴이 크게 그려져 있는 바흐 박물관.

베를린 장벽과 인접해 있는 퀸스틀러하우스 베타니엔도 예술가들의 점거로 생존한 경우다. 병원으로 사용하던 건물이 1968년 문을 닫자 정부는 기존 건물을 헐고 새로운 병원을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자 100여 명의 예술가들이 기습적인 불법 점거에 나섰다.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경찰과 격렬한 마찰도 있었지만 결국 1975년부터 예술가들의 작업실로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오직 외국 작가에게만 문호를 개방하는데, 입주 작가들에게는 달마다 일정 금액을 지급한다. 이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잊고 실험적인 작품 세계에 몰두할 수 있는 이유다. ‘미친 생각을 생산해내는 지식 테러의 장’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베타니엔은 도발적이고 전복적이며 자기 혁신적이다. 베를린의 문화적 단면을 구체적 사례를 들어가며 기술한 <다시 베를린>의 저자 이동미 씨는 “잘 다듬어진 오버그라운드 예술이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서브 컬처가 베를린을 매혹적으로 만든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타헬레스와 베타니엔을 보면 그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타헬레스를 두고 “합법적인 지위와 실험성을 맞바꿨다”며 매서운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이렇게 자기 성찰에 주저하지 않는 예술가들의 무정형한 연대의 그물망과 본질을 고민하는 분위기가 예술의 도시 베를린을 지탱하는 버팀돌인지도 모르겠다.
베를린을 상찬하는 문구 중에 ‘건축의 교과서’ 혹은 ‘건축물의 전시장’이 있다. 발상의 전환을 보여주는 유쾌하고 상큼한 건물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배 모양을 한 정당 건물, 그리스 신전에서 빼 온 것 같은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건물, 건물 위에 전혀 다른 형태의 건물이 올라앉은 건물, 자국의 이미지를 차별화된 건축미를 통해 뽐내는 각국 대사관 등 도심 속 건물들의 차림차림이 제가끔 상이하다. 독일 관청이 건축 허가를 내줄 때 중요하게 고려하는 사항도 바로 차별화된 디자인이다. ‘아름다운재단’을 이끄는 박원순 변호사는 언젠가 베를린 시내를 둘러본 후 “우리나라에 ‘동일 건물 건축 금지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엉뚱한 발상을 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개성 없고 일률적인 한국의 건축물을 빗댄 것이다.
베를린은 작가 정신이 숨 쉬는 타작 他作의 공간인 동시에 예술혼의 발현을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는 감상의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베를린 곳곳에 산재한 박물관과 갤러리는 도시의 풍만한 문화적 자산과 유장한 전통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프랑스 인상파와 독일 사실주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구 내셔널 갤러리, 고대 오리엔트의 페르가몬에서 발견된 제우스의 대제단을 만날 수 있는 페르가몬 박물관, 베를린 최초의 공공 박물관이자 이오니아식 원기둥이 인상적인 구 박물관 등이 그 화려한 면면이다. 중세부터 현대까지 독일 유대인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유대 박물관에서는 질곡의 역사를 회피하지 않는 독일인의 올곧은 정신을 체감할 수 있다.


1 관광객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 연방 의회 건물.
2 베를린은 그래피티의 도시. 도심 곳곳의 담벼락에는 독특한 그림과 글씨가 넘쳐난다.


드레스덴에서 시공 초월의 바로크 축제를 바로크는 꿈틀거린다. 16세기 말부터 18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 유행한 이 예술 양식은 이전 시대를 풍미한 르네상스에 비해 한결 동적이며 감각적이다. 공간 표현은 극적이고, 장식은 풍부하다 못해 과잉의 혐의를 받을 정도다. 작센 주의 고풍스러운 도시 드레스덴에 가면 바로크 양식의 걸작들을 직접 쓰다듬을 수 있다.
표표한 건축물이 즐비한 드레스덴에서도 가장 우뚝한 지점에 츠빙거 궁전이 있다. 직접 대면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로크 궁전의 달작 達作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궁전은 작센-폴란드 왕이었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의 여름 별장용으로 1732년에 지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누구던가. 강력한 통일 왕조 없이 군소 군주와 귀족들이 난립하던 독일에서 드레스덴이라는 이름을 만방에 떨친 인물이다. 지금도 그의 호칭 앞에는 ‘강력하다’라는 뜻의 형용사가 붙는다. 거대한 권력은 역사 役事를 동반한다는 것이 역사 歷史의 오랜 가르침이다. 아니나 다를까, 드레스덴이 자랑하는 츠빙거 궁전과 브륄의 테라스, 궁정교회 등은 아우구스트 1세와 그의 아들인 아우구스트 2세가 재임하던 시절에 첫 삽을 떴다. 어쨌든 광활한 궁전 이곳저곳을 소요하다 보면 엄격한 대비와 빈틈없는 설계, 바로크 양식 특유의 장식미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다. 츠빙거 궁전 안에는 알테 마이스터 회화관이 있다. 이곳에서는 라파엘로, 렘브란트, 루벤스, 코레조 등 역사의 명부에 길게 이름을 드리우고 있는 불멸의 화가들을 만날 수 있다. 장르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기적으로는 14세기부터 18세기까지, 작품 수로는 무려 3000여 점에 달한다. 주로 18세기 아우구스트 2세와 그의 아들 아우구스트 3세가 수집한 목록인데, 알프스 산맥 이북의 미술관 중에서 이탈리아 회화를 가장 많이 소장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아우구스트 2세는 자신의 아버지가 도자기에 천착했던 것과 달리 미술과 음악에 대한 애착이 컸다. 전쟁에서 패퇴하고 프로이센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에는 정치에 뜻을 접고 미술에 더욱 탐닉했다고 전해진다. 회화관의 슈퍼스타는 라파엘로의 ‘시스티나 성모’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의 발밑에서 아기 천사 두 명이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는 그림이다. 궁전은 회화관 이외에도 무기 박물관, 수학 박물관, 도자기 박물관 등을 갖추고 있다.

3 프리드리히 1세가 아내를 위해 지은 여름 별궁인 샤를로텐부르크 궁전.


4 프랑스 인상파의 작품과 19세기 독일 회화, 로댕의 조각상 등을 소장한 구 내셔널 갤러리.
5 루벤스, 라파엘로, 고야 등 유럽 회화의 거장들이 포진한 컬처포럼의 회화관.


높이 85m에 이르는 궁정교회는 작센 주 최대의 교회로 역시 바로크 양식을 띠고 있다. 예의 그 아우구스트 2세가 작센 지방을 다시 가톨릭화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었으며, 1980년부터는 드레스덴-마이센 교구의 대성당으로 사용되었다. 건물 상층부는 많은 성상으로 장식돼 있어 고개가 아프도록 올려다보게 된다. 드레스덴을 불과 며칠 사이에 잿더미로 만든 제2차 세계대전의 공습으로 궁정교회는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전쟁이 남긴 상처는 성모교회에서도 발견된다. 궁정교회보다 10m가량 키가 더 큰 돔이 유난히 인상적인 궁정 교회는 11세기에 지어 전해 내려오던 것을 1726~1743년 사이에 재건했다. 그러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폭격으로 건물 자체가 아예 무너져 내렸다. 다시금 제 모습을 찾기까지 걸린 세월이 자그마치 50년. 동독 시절 예산이 부족해 복원이 힘들어지자 독일 국민들은 돌 하나하나에 번호를 매기고 설계도를 그려 후일을 기약하기도 했다. 지금도 교회 외벽을 들여다보면 군데군데 검은 돌이 시야를 어지럽힌다. 전쟁의 참상 속에서 찾아낸 벽돌을 재활용한 것이다. 성모교회 주변을 서성이다 불의의 화마로 소실된 국보 1호 숭례문이 문득 떠올랐다. 보물이 주저앉자 불과 수년 만의 복원을 약속한 행정기관의 어설픈 대처가 생각났고 마음이 살짝 가라앉았다. 무조건 빨리 옛 모습을 되찾는 것이 능사는 아니기 때문이다.


6 언더그라운드 예술가들의 창작 근거지인 타헬레스.

라이프치히에서 엿본 바흐와 멘델스존과 괴테의 삼각관계 ‘음악의 아버지’ 바흐는 그가 세상을 뜬 지 60여 년 후에 태어난 멘델스존에 의해 부활했다. 멘델스존은 12세 때 괴테를 만난 자리에서 바흐와 모차르트의 작품을 연주했다. 괴테는 “바흐의 음악은 천지창조 이전에 하느님이 자신과 나눈 대화였다”고 극찬했다. 그렇게 세 명의 거장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연을 나눴다. 라이프치히에서 바람만바람만 그들의 뒤를 밟았다.
바흐와 멘델스존과 괴테는 라이프치히에서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다. 그들은 세월을 두고 엇갈렸다. 바흐와 멘델스존은 아예 생의 시간이 달랐다. 두 사람의 탄생 연도 사이에는 124년이란 아득함이 존재한다. 멘델스존과 괴테가 교유를 시작했을 때, 멘델스존은 지학 志學에도 못 미친 나이였고 괴테는 고희를 넘긴 나이였다. 바흐와 괴테가 지구의 공기를 함께 마시고 산 세월도 3년에 불과했다. 삼인 三人은 라이프치히라는 공간을 제가끔 소유했다. 세기를 달리해 가장 먼저 세상의 빛을 본 바흐가 ‘라이프치히 엔트리’에 제일착으로 이름을 올렸고, 파란중첩한 삶도 라이프치히에서 마감했다. 괴테는 본인의 의지는 아니었지만 셋 중 가장 젊은 나이에 라이프치히를 찾았다. 멘델스존은 불혹도 못 채우고 요절했는데, 그의 ‘음악 열차’가 멈춘 종착역 역시 라이프치히였다.
라이프치히 음악 여행은 토마스 교회에서 시작하면 된다. 바흐는 1750년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토마스 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매주 토마스 교회와 인근 니콜라이 교회의 예배를 위해 다수의 성악곡을 작곡했다. 쉴 틈 없이 바쁜 일정이었지만 그는 부단히 작곡과 교습에 매달렸다. 그 유명한 ‘마태 수난곡’도 이때 완성했다. 교회에는 바흐의 무덤이 있다. 바흐 서거 200주년이 되던 해인 1950년 이곳으로 옮겨져 제단 아래 묻혔다. 바흐의 친구 보제의 집은 1958년 보수 공사를 거쳐 바흐 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바흐가 남긴 악보를 비롯해 라이프치히 생활의 흔적을 모아놓았다.


7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는 거리의 예술가.

바흐가 생계형 음악가였다면 멘델스존은 집안 환경부터가 남달랐다. 은행가인 아버지와 부유한 가문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멘델스존은 어려서부터 유명 가정교사들에게 교양, 그리스어, 음악, 데생 등을 배웠다. 바이올린, 피아노, 화성, 작곡 담당 교사를 따로 둘 정도였다. 멘델스존은 1820년 괴테와 절친한 사이이자 그의 작곡 선생님인 첼터가 이끄는 징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여기서 바흐의 작품을 대면한 멘델스존은 괴테의 집을 찾아가 불세출의 대문호 앞에서 바흐의 곡을 직접 연주했다. 괴테는 소년의 재능을 기특하게 여겨 자신의 시를 선물로 주었다. 시간을 뛰어넘은 멘델스존과 바흐의 재회는 1835년 멘델스존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부임하면서 이뤄졌다. 그는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바흐의 작품을 무대로 불러냈다. 콘서트는 성공적이었고 청중들은 그의 남다른 안목과 특출한 재능을 칭송했다. 하지만 멘델스존은 마흔도 채우지 못하고 요절했다. 누이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탓이다. 그가 유명을 달리한 순간까지 머물던 멘델스존 하우스는 독일 통일 이후 세계 각지에서 밀려든 후원금을 통해 기념관으로 복원됐다. 꼼꼼하게 보존된 자료와 유품들이 그의 낭만주의와 짧지만 강렬했던 생애를 말없이 알려준다.

여행 정보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루프트한자 독일항공이 인천~프랑크푸르트 구간의 직항편을 매일 운항한다. 비행시간은 약 11시간. 독일 내에서 이동할 때는 역시 기차가 유용하다. 초고속 열차인 ICE를 이용할 경우 프랑크푸르트~베를린 구간은 약 4시간, 베를린~드레스덴 구간은 약 2시간, 드레스덴~라이프치히 구간은 약 1시간 10분 소요된다.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