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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장인을 찾아서]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 기능 보유자 조충익 선생 "나는 마음을 부치는 부채를 만들고 있는 거여"
오늘의 참된 가치는 전통에서 오는 것임을 아는 <행복>에서 전통을 보존하기 위해 묵묵히 애쓰는 장인들을 만나는 기획을 시리즈로 준비했습니다. 그 영광 뒤에는 더 빛나는 가족의 헌신과 조력이 있음을 알기에, 장인과 그 가족의 이야기를 함께 담습니다. 첫 번째로 만나본 조충익 선생의 삶 역시 작품을 향한 열정과 가족이 있었습니다.

(왼쪽) “제일 좋은 대나무 고르는 것부터 시작해야 혀.” 선생이 막내아들 조계화 씨와 나란히 걸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오른쪽) 선생의 전시관에 걸린 작품들. 그 아름다움에 눈을 떼기가 어렵다.


한국인은 겨울에도 부채를 들었다. 부채는 단순히 여름에 더위를 쫓는 도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덟 가지 쓰임새가 있다는 뜻으로 ‘팔덕선’이라고도 불렀다. 바람을 만드는 것은 물론 태양을 가리기도 하고, 급할 때는 방석으로도 썼다. 부챗살 개수에 따라 신분을 나타내기도 했으며, 가무나 풍류를 즐기는 용도로도 사용했다. 그러니 계절을 막론하고 부채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부채의 멋과 문화적 의미가 퇴색하고 더위를 쫓는 도구로만 생각하기에 일상생활에서 부채를 보기란 거의 어렵다. 이렇게 사람들의 삶 속에서 부채가 사라질수록 선자장 扇子匠(부채를 만드는 기술과 그 기능을 가진 사람) 조충익 선생은 더욱 아름다운 부채를 만들어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두려고 한다. “부채를 기능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아무리 잘 만들어도 에어컨을 따라갈 수 없어. 진짜로 좋은 작품을 만들어서 쳐다만 봐도 마음을 시원하게 만드는 게 내 목표여. 부채를 예술품으로 승화시켜서 마음의 여유를 찾아주는 것 말이여.”

선생이 꿈을 이룬 건 아내와 세 아이 덕분 선생이 부채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나이 서른이 다 될 무렵이었다. 가업으로 이어받아 어린 나이에 시작하는 다른 장인들에 비하면 늦은 편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깊은 산골의 집을 떠나 전주에서 남의 일도 많이 하고 길거리에서 장사도 했다. 하지만 그리 형편이 좋아지지 않던 와중, 선생의 눈에 띄는 게 있었으니 전주의 특산물인 태극선이었다. 관광 상품으로 잘 팔리기도 했지만 아름다운 곡선과 그와 어우러지는 세 가지 색이 선생의 마음에 들어온 것이다. 태극선을 만드는 일은 만들고 깎는 걸 좋아하는 적성과도 잘 맞았단다. 그렇지만 대부분 가업으로 하는 것이라 가르쳐주는 이가 없었기에 혼자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공부했다. 그러니 기술도 형편도 쉽게 좋아질 리 없었다. 하지만 부채에서 꿈과 미래를 발견한 선생은 다른 길로 돌아가지 않고 악착같이 부채 만드는 일에 전념했다.
“아침에 국수도 끓여 먹지 못할 만큼 가난했지. 그러니 가족들이 참 고생 많이 했어. 어떤 책을 읽으니 온 세상 사람들에게 영웅 대접을 받는 사람은 가족에게는 천대받는다는 얘기가 나오더라고. 무슨 말이냐면 내가 힘들어도 나라를 위해 이걸 참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디, 식구들은 뭐할라고 그러냐는 거여. 가족 입장에서는 가장이 돈 잘 벌어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행복이 가득한 집’이거든. 하지만 내 입장에서 그건 형이하학적이여. 배가 좀 고파도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서 마음이 기쁘면 그게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하거든. 그걸 이해해줬으니 고맙지, 정말 고맙지.”
선생이 만드는 태극선은 한국 홍보 상품으로 인기가 좋아 한국관광공사나 대기업 등에서 홍보 용품으로 주문을 받아 생산하고 있다. 일일이 손으로 수천, 수만 장의 태극 마크를 붙이고 대나무를 자르기 때문에 선생 혼자 하기는 어렵다. 자연스레 선생의 아내와 세 자녀도 거들게 됐다.


1 부챗살을 자를 때는 ‘반듯하게’ 해야 한다며 몇 번이나 강조하는 선생과 계화 씨.
2 조충익 선생의 부채는 크기와 모양이 참으로 다양하고 또 아름답다.



때 묻은 연장에서 선생의 집념과 끈기가 느껴진다. 
4 태극선을 만드는 조충익 선생과 아내 김정순 여사.


“우리 애들은 특별한 집에서 태어나서 특별해서 죽겄대.” 선생의 아내 김정순 여사의 말처럼 ‘특별한 가정’에서 태어난 덕분에 첫째 계웅 씨와 둘째 은실 씨는 선생의 후계자로서 이미 전수를 받았고 곧 셋째 계화 씨가 후계자로 지정돼 전수를 받을 예정이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보고 배운 것이 있기 때문에 이미 웬만한 실력은 갖췄다. 올해 한국전통문화학교를 졸업하는 계화 씨는 졸업 작품으로 출품한 부채가 눈에 띄어 예술의전당 앞 스타벅스에서 전시 중이고, 벌써 팔라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졸업생 가운데 단둘만 전시한다고 넌지시 말하는 선생의 목소리에는 아들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묻어났지만 또 한편 스승으로서의 엄격한 훈계도 잊지 않는다.
“나는 이제 눈이 어둡잖아. 그래서 야가 꼼꼼하게 하는 건 이제 나보다 잘해. 그런데 그것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여. 혼이 담겨야 해. 근디 이치를 깨우치는 건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여. 스스로 골똘히 생각해서 이상이 생겨야 작품이 나오는 거지. 지금은 그냥 습득 과정이여.” 선생은 자식들도 당신과 같은 길을 걸었으면 하고 바란다. 가업으로 내려오는 것은 거부하기도 어렵다는 것. 첫째 아들 계웅 씨는 서울의 유명 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선생을 옆에서 돕는 중이다. 전공을 살려 금융업체 취직을 생각하기도 했으나 선생은 돈벌이를 생각하지 말고 함께 하자고 설득했다. 요즘 세상에 국가에서 후계자 양성 비용으로 나오는 10만 원으로 제자를 찾아 양성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을 생각하면 선생의 선택이 이해가 된다. 하지만 가끔씩 작업실을 찾아오는 이들이 함께 작업하는 자식들에게 중학교는 제대로 나왔느냐는 질문을 해 선생 속을 상하게 한다. 제대로 배운 것이 없어서 가업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부 사람들의 생각이 섭섭할 따름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뒤를 잇고 싶어 한국전통문화학교에 진학한 계화 씨가 든든한 후계자로 옆에 있어서 힘이 된다.“힘든 환경에서 태어나 이만큼 일군 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죽전선자방 한쪽 벽면을 장식한 작품들.

한국의 얼굴을 넘어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로 선생의 부채는 88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 태극선 기증 업체로 선정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선수단이 입장할 때 손에 들고 나오던 그 부채가 바로 선생의 것. 선생은 참 자랑스러웠다며 그때를 회상한다. “올림픽, 아시안게임은 전 세계에 방영을 하잖아. 입장하는 선수들이 상당히 오랫동안 이것을 들고 나왔다고. 몇십억 들여 선전하는 것보다 부채 들고 ‘코리아’ 하는 걸 훨씬 잘 알아볼 거야. 그 후로 나는 내 부채를 한국의 얼굴이라고 생각해.” 이후 태극선을 주문하는 곳이 늘면서 선생의 표현에 따르자면 밥벌이는 하게 됐다. 최고가 아니면 직성이 안 풀리는 성격이라 부챗살도 65개만 써도 될 것을 백 개를 쓰고, 태극선의 작도법(예전에는 눈짐작으로 그리던 터라 삼태극의 크기와 비율이 제각각이었다)도 만들었다. 이제 태극선을 만들어 밥을 먹는 것은 선생의 아내가 주로 하고, 선생이 몰두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선생의 전시관 ‘죽전선자방’에 걸린 작품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작품’으로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언뜻 한 폭의 그림으로 보였던 부채는 대나무를 하나하나 휘어서 모양을 만든 작품. 그 섬세함과 우아함에 입이 벌어진다. 그 외에 연꽃 모양의 햇빛을 가리는 부채 등 수십 개의 작품이 걸려 있다. 이 작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빚까지 얻어 전시관을 열었다. 어쩌다 한 번 하는 전시에 한두 작품 내보내는 것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야심 차게 전시관 문을 열었으나 관리하기가 쉽지 않아 지금은 거의 창고처럼 변했지만 그 안에서 창작열은 더욱 붉게 피어오르고 있다.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혀. 같은 걸 계속 흉내 내는 건 재주꾼이여. 내가 학벌이라고는 국민학교 5년뿐이고 재산이라곤 아침에 끼니 겨우 때우는 게 전부여. 얼굴도 노주현만큼 이쁘지도 않아. 그래도 사람들이 주목하고 오늘같이 기자가 나를 찾아오는 건 남이 하지 않는 것을 시도하고 창조하기 때문이여.”

6 언뜻 그림을 그려 넣은 것으로 보이나 자세히 보면 하나하나 대나무를 구부려 만든 작품이다.

죽어서도 부채로 기억되고 싶어 부채의 명맥이 끊어질까봐 전시관을 열고, 관계자 만나길 요청하는 등 선생은 꽤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편이다. 그렇지만 아직 문화재나 전통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후원을 받기란 거의 어렵다고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자식들을 설득해 가업으로 잇게 하고 싶어도 혹여나 궁핍한 삶까지 물려줄까 봐 걱정이 크다. 하지만 특유의 긍정적인 성격과 웃음으로 더욱 노력할 것이란다.
“그저 작품이나 만들면서 살고 싶은데 혼자 많은 걸 감당하려니 힘들긴 혀. 그래도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으니 언젠가는 다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지. 허허허.” 그가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은 명확하다. 예술적으로 인정받는 작품을 더 열심히 만들어 우리나라 순회전을 하고, 그다음은 유럽이나 미주 쪽에도 한국의 미를 알리고 싶단다. “내가 열심히 하면 작게는 전주가 발전할 것이고, 전주가 발전하면 전라북도가 발전하고 또 우리나라가 발전하고, 그러면 전 세계에 우리가 알려질 것 아니여.” 그리고 지금 운영하고 있는 전시관을 더 발전시켜 부채 박물관으로 만들어 후세에 물려주고 싶단다. 그날을 위해 옛 부채와 흔히 구할 수 없는 귀한 부채 등을 계속 모으는 중이다.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마음을 담는 그릇이여. 내 마음을 담아놨기 때문에 설명하기 이전에 사람들이 공감을 하는 것이지. 팔아가지고 돈 남기려는 건 작품이 아니여.” 선생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작품과 예술에 대한 긍지가 넘쳤다. 죽어서도 우리에게 작품으로 기억되기 위해 오늘도 작업실에 앉아 전념하는 그의 삶이 아름답다.

무형문화재, 명칭이 헷갈리셨나요?
인간문화재, 중요무형문화재, 서울무형문화재 등 무형문화재에 관한 명칭이 다양하지요? 그렇지만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고 이해하면 쉽습니다. 우선 국가에서 중요하다고 인정해 심의를 거쳐 지정한 ‘중요무형문화재’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간문화재는 중요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를 말하지요. 그리고 시와 도에서 자체적으로 무형문화재를 지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시도무형문화재’라 하기도 하고,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등 지역에 따라 부르기도 합니다. 또 하나,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에게만 ‘장인’이나 ‘명인’이라는 호칭을 붙일 수 있는지 궁금하시지요? ‘장인’은 예술가를 두루 일컫는 말이고 ‘명인’은 어떤 분야에서 뛰어난 기예로 유명한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를 구분 짓는 명칭은 아닙니다.
김현정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