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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극장]한지 공예가 겸 회화 작가 이종국 씨 종이를 뜨고 그림을 그리고 씨를 뿌리고 밥을 짓고
충북 청원군 문의면 소전리에는 ‘벌랏’이라는 이름의 오지 마을이 있다. 하도 오지여서 전쟁이 나도 모르고 지나갔다는 전설이 있고, 떨어질 락 落 자를 써서 ‘벌락’마을이라고도 불렀던 무릉도원. ‘앞뒤는 막혀 있고 하늘은 열려 있는’ 독특한 지형지세 덕분에 세상과 등지고 유유자적 살기에 더없이 좋은 세상의 끝. 그곳에 15년간 터를 이루고 살아온 ‘야생의 사나이’와 그의 가족이 있다. 한지에 미쳐 닥나무와 씨름하며 평생을 살아온 이종국 씨. 자연의 섭리를 깨달은 순간부터 손수 만든 한지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는 이제 한지 공예가를 넘어 회화 작가, 생태 연구가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마불 갤러리 벽에 걸린 이종국 씨의 한지 회화 작품.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로 시작하는 시가 있다. 고은 선생의 네 번째 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에 실린 표제 시다. 동료 시인 신동문 씨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 장례식을 주관한 선생이 난생처음 가본 충북 청원군의 오지 마을에서 문득 삶과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쓴 시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문의 文義는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경건하고도 경이로운 장소다. 우연치 않게 인연이 닿아 찾아가게 된 한지 공예가 겸 회화 작가 이종국 씨가 사는 마을 또한 문의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오지란 오지는 두루 섭렵하고 다녔던 ‘야생의 사나이’가 무슨 연유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을까? 토양이 기름지고 물이 맑아서? 비행기도 날 수 없는 국가적 보호 지역이라서? 그도 아니면 7년 이상 거주자에 한해 자녀 교육이 평생 무료이기 때문에? 아니, 그는 그렇게 계산적인 사람이 못 된다. 이 엉뚱하고 허술한 남자가 벌랏에 살게 된 건, 청주역에서 만난 어느 택시 운전기사 때문이었다.

부침개가 맺어준 부부의 인연 긴 수염에 두건을 쓰고 삼베옷을 입은 이종국 씨는 영락없는 도인 道人 같았다. 주민등록증이나 통장 계좌번호 따위는 애초에 없는 사람처럼 세상과 등지고 산 흔적이 역력하다. 40대 중반임에도 아이들에게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 것도 이제는 익숙하다. 하지만 욕심 없이 마음을 툭 내려놓고 살아서일까, 눈이 맑고 피부가 곱다.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그는 젊은 시절 잠시 입시 미술 학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잘나가는 학원 원장님 이름표를 떼고 자연인으로 돌아선 것은 30대 중반. 가방 하나 들고 고향 괴산으로 내려가던 중 우연히 들른 청주역에서 그는 무작정 택시를 잡아탔다. “이 지역에서 가장 오지가 어딥니까? 거기로 갑시다.” 뜬금없는 그의 청에 택시 기사는 자신의 고향인 청원군 문의면 벌랏마을로 그를 안내했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벌랏마을에서 그는 15년째 살고 있다. 아내 메루(이경옥 씨의 별명으로 인도어로 ‘사랑의 여신’이라는 뜻이다)를 만난 것도 그곳에서였다. 인도와 네팔 일대를 돌며 요가와 명상에 빠져 살던 이경옥 씨 역시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정착할 마을을 찾고 있던 중 우연히 벌랏마을을 알게 됐다. 함께 명상을 하던 지인이 청주 시골 마을에 기인처럼 혼자 사는 젊은 총각이 있으니 꼭 한번 만나보라고 권한 것이다. 살구꽃이 소박하게 핀 벌랏마을 산 중턱의 아담한 한옥에는 ‘화가네 집’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대문을 두드리자 길게 자란 수염과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젊은’ 총각이 그녀를 맞이했다. 지인의 부탁 때문이었는지, 사심이 가득한 탓이었는지, 벌랏마을 젊은 총각은 객지에서 온 아리따운 여인네에게 지극 정성을 다했다. 밭에서 캐낸 가죽나물에 보리딩겨 고추장을 넣어 노릇노릇 부침개도 부쳐주고, 들꽃 한 송이 꺾어 뒷짐 지고 마을 곳곳을 구경시켜주기도 했다. “가죽나물 부침개가 어찌나 맛있던지 저도 모르게 손으로 죽죽 찢어서 허겁지겁 먹었던 기억이 나요. 그토록 예쁘게 음식을 만들어내는 남자에게 어떤 여자가 반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녀가 반한 건 마불(이종국 씨의 별명으로 ‘이웃처럼 평범한 부처님’이라는 뜻이다)의 음식 솜씨만은 아니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 자연의 섭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춘 그는 들판에 지천으로 핀 꽃에 대해, 흙을 뚫고 올라오는 봄나물에 대해, 그리고 생과 사에 대해 오래 겪고 곱씹어온 아름다운 철학을 들려주었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결혼이라는 것을 하게 됐고, 메루나이 마흔셋에 늦둥이 아들 선우도 얻었다.

(위) 밭에서 1년 동안 키운 닥나무를 잘라 솥에서 푹 삶아낸 후 겉껍질을 벗기고, 햇볕에 널어 건조시킨 다음
다시 찬물에 불리고, 잿물을 만들어 삶고, 잿물을 뺀 후에는 방망이로 두들겨 분해하고…. 종이 한 장이 나오기까지 햇빛, 바람, 불, 흐르는 물, 두들김, 헹굼의 과정이 정성스럽게 반복된다.



1 밭에서 얻은 천연 재료로 개발한 물감. 한지 위에 쓰면 맑고 고운 색을 낸다.
2 1~2년생 닥나무는 여리고 부드러워서 종이를 만들기에 가장 적당하다.



3 세 식구의 웃음과 온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정겨운 한옥. 겨울나기가 만만치 않지만 봄이 되면 살맛 나는 벌랏마을 선우네.

닥나무와 벗하고 한지와 씨름하며 15년 “15년 전 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 지장 紙匠(종이 뜨는 사람)이 두 분 계셨어요. 문에 창호지를 바르고 살던 시절에는 각 고을마다 종이 뜨는 장인이 있었죠. 그분들에게 한지 만드는 법을 배웠어요. 한지 韓紙는 차가운 겨울에 만든다고 해서 찰 한 寒 자에 종이 지 紙 자를 써서 한지 寒紙라고도 하고, 일백 백 百 자에 종이 지 紙 자를 써서 백지 百紙라고도 하는데, 종이 한 장이 만들어지기까지 참 손이 많이 간다는 뜻이에요. 밭에서 1년 동안 키운 닥나무를 잘라 솥에서 푹 삶아낸 후 겉껍질을 벗기고, 햇볕에 널어 건조시키고 다시 찬물에 불리고, 잿물을 만들어 또다시 삶고, 잿물을 뺀 후에는 방망이로 두들겨 분해하고…. 종이 한 장이 나오기까지 햇빛, 바람, 불, 흐르는 물, 두들기기, 헹굼을 모두 거쳐요. 그렇게 만든 종이는 천년을 간다고 할 정도로 견고하죠.”
그는 스승에게서 배운 전통 방식의 한지를 넘어서 입체적 한지 작업에도 몰두하고 있다. 불린 닥나무에 왕겨와 톳밥 등을 넣어 도톰하게 빚어 말린 종이는 더욱 견고할 뿐만 아니라 액자에 넣어두면 한국적 정서가 느껴지는 독특한 입체 작품이 된다. 그뿐인가. 도톰한 한지 위에 감물로 만든 천연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면 맑고 고운 청색이 감돌면서 한 폭의 수채화가 탄생한다. 그 자체로 훌륭한 예술품인 한지 위에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화조화 花鳥畵를 그리니 값을 매기는 것조차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선 종이에 대한 독창성을 인정해주지 않죠. 하지만 외국에 나가면 분위기가 다르다는 걸 느껴요. 지난해 함부르크 미술관의 초청을 받아 전시회를 열었는데, 갤러리를 찾은 관람객들이 작품만 보고도 한지 만드는 노고를 인정해주더라요. 10년이 넘도록 시골에 파묻혀 고생한 보람이 있다 싶었어요.” 언젠가 인사동에서 전시를 열었을 때,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 어느 일본 노부부에게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들이 구입한 작품이 덩치가 좀 컸는데, 그날따라 억수같이 비가 와서 일본까지 작품을 안전하게 운반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그런데 다음 날 그 노부부에게서 메일이 왔다. 안방에 고이 모셔둔 그의 작품 사진과 함께 간단한 메시지도 적었다. “어제 우연히 선생님의 작품을 만난 일본의 하야시입니다. 오늘 저녁에 작품과 우리 모두 무사히 도쿄에 도착했습니다. 작품은 사진처럼 우리 집에 잘 있으니 안심해주시기 바랍니다.” 번거롭고도 고된 그의 작품 세계를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마불은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었다. 심심산천에서 겨울나기가 만만치 않지만, 봄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기운이 솟고 몸이 깨어나는 것처럼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희망을 얻는다.
마불과 메루는 몇 년 전부터 효소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세포가 살아 있어 음식에 넣으면 몸에 활력을 불어넣고 물감 재료로 쓰면 묘한 색감을 내는 효소는 화학조미료나 약품을 대신할 최적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갤러리 곳곳에 놓인 커다란 항아리에는 이미 만들어놓은 각종 효소가 담겨 있어 새콤달콤한 향을 낸다. 그가 지난겨울 내내 몰두한 화조화의 색도 감을 발효시켜 만든 효소 물감으로 그린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자연으로부터 얻은 재료를 그림에 적용하며 새로운 회화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피어오르는 물’을 보며 깨닫다 마불은 시골에서 나고 자라 봄이 되면 주먹밥을 싸 들고 나물을 캐러 다니고, 겨울이면 고드름을 따 먹으며 팽이치기를 했다. 자연은 너무 익숙한 것이어서 새로울 게 없는 삶의 일부였다. 사회생활을 접고 산속에 들어가 원시인에 가까운 자급자족의 삶도 살아봤지만 그 당시엔 자연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눈에 보이는 산과 강과 하늘에 묻혀 살았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정선 아우라지 강가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커다란 깨달음을 주는 풍경을 보게 되었다. “비 온 뒤 해가 뜨면 강가에서 안개 같은 물꽃이 피어올라요. 물소리는 들리는데 물은 보이지 않고 하늘로 피어오르는 물안개만 보이는 거죠. ‘아! 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피어오르는구나.’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자연의 법칙이 모두 깨지는 순간이었죠. 그때 이후 자연의 다른 모습에 눈뜨게 됐어요. 산짐승이 지나가고 벌레와 새가 울고 땅속의 미생물이 올라오는 현상들 속에 일정한 흐름이 있다는 걸 깨달았죠.” 그는 그 이후로 한 번도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딛고 서 있는 땅이 곧 낯선 여행지요, 봄이면 올라오는 참나물과 냇가의 도룡뇽이 곧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는 이런 깨달음을 얻고 나서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고유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바람에 날아든 씨앗이 토양에 뿌리내리고 열매 맺는 동안 그 지역의 기온과 수분, 바람과 햇살의 영향을 받게 되죠. 그렇게 키운 음식을 먹고 자란 사람의 성정 또한 지역의 고유성을 갖게 되는 거예요. 자연이 사람과 더불어 순환하면서 자연스럽게 빛깔을 만들어내는 거죠.”


1 아들 선우가 무심코 던지는 법문과도 같은 한마디는 가족의 웃음을 자아낸다.
2 6개월 전, 문의마을에 문을 연 마불 갤러리. 한지 회화 작품을 감상하면서 발효차 한잔을 즐길 수 있다.


자연이 곧 밥상이다 생활에 필요한 모든 먹을거리를 자연에서 얻는 선우네 가족은 아주 특별한 날이 아니면 장을 보러 가지 않는다. 특히 만물이 깨어나는 3~4월이면 ‘자연이 곧 밥상’이 된다. 우리가 마불과 메루를 만나러 간 3월 8일은 봄나물 중에서도 생명력이 가장 강하다는 참나물이 막 올라오는 시기였다. 메루는 소쿠리와 칼을 들고 뒷산으로 올라가 참나물, 냉이, 달래, 원추리를 풍성하게 뜯어 왔다. 이를 받아 든 마불은 커다란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향긋한 봄나물을 종류별로 씻었다. “참나물은 생명력이 강한 봄나물이에요. 일 년 중 요때(3월 초순경 3~4일 정도) 먹어야 참맛을 느낄 수 있죠. 이 시기에 캔 나물을 씻다 보면 흙이 얼마나 보드라운지 두어 번만 헹궈내도 깨끗하게 씻겨 나가요. 들판에 초록색이 푸릇푸릇 올라오기 시작하면 봄나물은 이미 끝난 거죠.” 마불은 맛깔나는 설명과 함께 봄나물을 깨끗이 씻어두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참 후에 돌아온 그의 손에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은행이 한 바구니 들려 있다. 그사이에 뒷산에 올라가 떨어진 은행을 주워 온 것이다. 봄나물을 씻었던 대야를 한 번 헹궈내고 은행을 쏟아붓는다. 그러고는 쌀을 씻듯 박박 문질러 여러 번 헹궈 반질반질한 알맹이만 건져낸다. 예쁘게 씻어 담아둔 은행을 본 선우는 “어? 맛있는 거다!” 하면서 은행이 담긴 바구니를 아궁이 쪽으로 가져간다. 장작불에 구워 먹는 은행은 선우가 제일 좋아하는 간식이다. ‘톡톡’ 타는 소리를 내며 튀어 오르는 은행 앞에 바짝 다가앉은 선우는 뜨거운 은행을 호호 불어가며 맛있게도 먹는다. 도시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면 영어 학원에 가지만 선우는 개울가로 나간다. 도롱뇽 알도 채집해야 하고 반찬으로 해 먹을 미나리도 캐야 하니까. 지역에서 나고 자란 푸성귀를 먹고, 산과 들에서 마음껏 뛰어놀며 자란 선우가 짓는 웃음은 벌랏마을의 청정한 공기처럼 100% 무공해다. “선우야, 아이스크림이 맛있어, 은행이 맛있어?” 엄마가 묻자 선우가 대답한다 “은행이 맛있지!” 구운 은행 맛을 제대로 아는 다섯 살짜리 꼬마가 사는 곳, 여기는 벌랏마을이다.

한지 공예가 겸 회화 작가 이종국 씨와 명상가인 아내 이경옥 씨가 작품 활동을 하는 마불 갤러리. 닥종이 공예를 그림과 접목시킨 독특한 회화 작품과 닥나무를 이용한 다양한 생활 소품을 만날 수 있다. 갤러리 안쪽에 마련한 내실에서는 부부가 만든 발효차를 마시며 책을 읽을 수도 있다. 충북 청원군에서 문의 IC를 빠져나와 문의중학교 맞은편 슈퍼 골목으로 들어가면 우측에 마불 갤러리가 있다. 문의 043-222-5808

<선우야, 바람 보러 가자> (마불・메루 지음, 랜덤하우스)
한지 공예가 겸 회화 작가 이종국 씨와 명상가 이경옥 씨의 자연 생활을 있는 그대로 소개하면서 천방지축인 아들 선우가 보여주는 천진난만한 일상까지 두루 담고 있다. 가족이 살 집을 짓고, 가구도 직접 만들고, 입을 거리, 먹을거리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선우네 이야기는 도시 생활에 지친 사람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할 뿐만 아니라 행복한 삶에 대해 되돌아보게도 한다.

정세영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