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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갤러리]영국 미술가 대런 아몬드 '시간'을 추모하는 심미주의자
윌리엄 터너의 풍경화를 닮은 고요하고 정적인 사진, 극한의 고통을 이겨내는 사람들을 기록한 영상물. 사진을 넘어 영상과 설치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통해 ‘시간’과 ‘기억’이라는 오브제를 담아내는 영국 미술가 대런 아몬드. 그가 국내에서 첫 개인전을 연다.
“토요일 아침, 우리 가족은 동네 일본 식당에 가서 스시를 먹어요. 아이들이 조용한 식당 분위기를 좋아해요. 젓가락도 잘 사용하죠. 학교에 일본인 여자 친구가 있는 것 같아요. 그 아이에게 잘 보이려고 젓가락 사용법을 배운 거죠.” 런던 북서쪽 아이리시 커뮤니티 킬번에 살고 있는 미술가 대런 아몬드는 토요일 오전 11시를 좋아한다. 정적이 흐르는 스시 레스토랑에서 달그락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몸짓하는 두 아이를 바라보며 아내와 대런은 말없이 눈웃음을 주고받는다. 영국 <보그>의 패션 에디터인 아내와 사랑스러운 두 아이와 함께 오붓하게 둘러앉아 식사를 즐기는 시간. 옅은 미소가 감도는 주말의 아침 풍경은 그의 사진에서 느껴지는 고요를 닮아 있다.

조각, 사진, 영상물, 설치 작품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간을 기록하는 미술가 대런 아몬드 Darren Almond. 조각가로 출발했으나 영상물과 사진 작업으로 더 유명한 그는 2005년 할머니와의 추억을 담은 영상물 로 터너 프라이즈(영국의 테이트 브리튼이 1984년 제정한 현대미술상으로 한 해 동안 가장 주목할 만한 전시나 프로젝트를 보여준 50세 미만의 영국 미술가에게 수여한다. 현대미술의 지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지닌 좌표라 할 수 있는 상이다) 최종 후보에 올랐다.
“몇 년 전 할머니가 뇌졸중으로 입원해 문병을 갔어요. 쇠약한 모습으로 누워 계시던 할머니는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몹시 그리워했죠. 두 분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인 허니문을 떠올리면서요.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길거리에서 춤을 추셨대요. 그 아름다웠던 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으셨던 거예요. 전 할머니를 모시고 그곳에 갔죠. 그리고 아주 오래 전 그날처럼 길거리에서 춤을 추게 해드렸어요.” 그는 이 작품으로 ‘가족사를 바탕으로 기억과 장소에 대한 탁월한 감성을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할머니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할아버지는 영국의 광산 도시 위건에서 한평생 광부로 일하다 돌아가셨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 늘 그르렁대는 소리가 났던 가엾은 할아버지. 대런은 할아버지의 삶을 통해 피를 토하는 고통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TV에서 광부들의 삶을 왜곡 보도하는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다. 삶과 죽음의 위태로운 경계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광산 노동자들. 그들의 삶을 재조명하는 일은 할아버지가 살다 간 시간을 추모하는 일이기도 했다.

(위) 청담동 PKM 트리니티 갤러리에서 만난 대런 아몬드.


Darren Almond, Marathon Monk, 2010, edition of 3, single-channel HD video with sound, Duration: 35mins Courtesy the artist and PKM Trinity Gallery.

할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함
그 일을 계기로 대런은 인도네시아 자바 섬 근처의 화산 지대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극한의 고통을 참아내며 유황을 캐내는 광부들의 일상을 담은 35분짜리 영상물 을 창작해냈다. 뿌옇게 피어오르는 유황 연기 속으로 100kg이 넘는 들것을 들고 걸어가는 광부의 모습. 영상물의 한 장면을 캡처 받은 사진은 역설적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흐릿한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황 먼지 속에서 숨을 쉬기 위해 천 조각을 입에 물고 찡그린 표정을 짓고 있는 광부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실제로 그곳은 유황이 물에 닿자마자 황산이 되는, 세계에서 가장 독성이 강한 화산 지대에 속한다. 그곳에서 광부들은 가죽처럼 두꺼워진 맨발로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유황을 캐 나른다. 대런이 그곳에 머물렀던 며칠 사이에도 위험천만한 일이 도처에서 발생했다. “광산 측정을 하던 광부 한 명이 얼굴에 화상을 입었어요. 잠깐의 실수로 벌어진 일이었죠. 순식간에 피부가 벗겨지더니 얼굴이 점점 부풀어 올랐어요. 동료가 그를 업고 달리는 순간 정말 두려웠어요.” 지독한 유황 성분 때문에 평균수명이 35세밖에 되지 않는 극한의 세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는 할아버지가 겪었던 ‘고통의 시간’을 기록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죽음까지 담보로 한 그들의 삶이 얼마나 헌신적인 것인가, 그들이 도대체 왜 그렇게 한평생을 살아가야만 하는가에 대하여.


Darren Almond, Bearing, 2007, edition of 3, single-channel HD video with sound, Duration: 35mins, Courtesy the artist and PKM Trinity Gallery.
인도네시아 자바 근처의 극산성 화산 지대에서 유황을 캐내는 광부의 모습.


달빛으로 찍은 풍경화
낮에 본 풍경을 머릿속에 기억해두었다가 달이 떴을 때 다시 그 자리로 가서 장시간 노출로 사진을 찍는 기법. 대런 아몬드가 1998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작업해오고 있는 ‘Fullmoon’ 연작은 가히 ‘달빛으로 찍은 풍경화’에 가깝다. 19세기 유럽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윌리엄 터너의 그림과도 흡사한 이 연작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바뀌는 자연현상을 한 장의 사진에 담으려고 노력한 작품이다. 실제로 어떤 사진에서는 하얗게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별을 관찰할 수 있는데, 15분 이상 긴 노출을 통해 ‘찰나’가 아닌 ‘무렵’을 기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특별한 작업 방식으로 탄생한 사진은 은빛이 감도는 독특한 색감을 지니고 인기척 없는 고요한 정서마저 느끼게 한다. 대런은 “밤의 어둠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고독감을 만들어내며 어떤 공허함마저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기억이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시발점이 되곤 하지요”라고 설명한다. 또한 그는 윌리엄 터너나 카스퍼 다비드 프리드리히 같은 유명 화가들이 그림을 그렸던 장소를 사진으로 담아내면서 지구의 지형적 변화와 역사를 기록하고, 그 안에서 인간의 고립과 하찮음까지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은 사진이 아닌 한 편의 시가 된다.


(왼쪽) Darren Almond, Arctic Plate. 7, 2003, edition of 5, C-print face mounted onto glass, 79x79cm, Courtesy the artist and PKM Trinity Gallery. 영하 43℃에 달하는 극한의 추위를 견디며 내면의 고독함을 담아냈다. 
(오른쪽) Darren Almond, Fullmoon@Wall, 2007, edition of 5, C-print mounted onto aluminium, 128x128cm, Courtesy the artist and PKM Trinity Gallery.


북극이 나를 끌어당긴다
그는 이라는 작품명처럼 “북극이 나를 끌어당긴다”고 말한다. 2002년 남극 사절단과 함께 남극을 탐험했던 그는 지구 반대편의 신기루인 북극을 여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작업은 늘 그렇게 무언가의 이끌림에서 시작된다. 티베트 여행을 통해 일본의 수도승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시간의 경계를 관찰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의 국경 지역을 순례한 것처럼. 그는 실제로 남극을 여행하던 해, 강한 이끌림으로 북극의 툰드라 지대를 여행했다. 그리고 북극 야간 탐험을 담은 영상 작품 을 완성했다. 이 작품 또한 대런 아몬드가 시도해온 다른 작품들처럼 인간의 육체적, 심리적 인내를 담고 있다. 툰드라 지대를 묵묵히 걸으며 기록하고 있는 작가의 모습을 그가 끌고 있는 썰매에 설치한 카메라로 촬영하는 방식. 영하 43℃도에 이르는 혹한 속에서 북극이라는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고 개척해나가는 한 개인의 힘든 여정은 묘한 울림을 준다. 그가 썰매를 끌어당기듯 북극이 그를 끌어당기고, 북극이 그를 끌어당기듯 그의 작품이 우리를 끌어당긴다.
1천 일 동안 달리며 궁극의 자아를 깨닫는 승려들
이번 국내 전시를 통해 세계 최초로 소개하는 대런 아몬드의 최신작 는 일본 교토의 히에이 산에서 촬영했다. 788년에 세워진 일본 최초의 천태종 불당인 엔랴쿠지는 카이호우교우쟈교라는 승려들이 수행을 하는 곳이다. 이곳 승려들은 특정 규칙에 따라 마라톤 같은 오래달리기를 긴 시간 동안 하는데, 이를 통해 육체적 고통을 이겨내는 일종의 수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들은 지구 적도 둘레에 달하는 거리를 1천 일 동안 완주해야 하는데, 대런은 이 중 1백 일 동안 이루어지는 수행의 일부분을 영상으로 촬영했다. 카이호우교우쟈교 승려들은 1백 일 동안 하루에 두 번 마라톤을 해야 하고, 이 1백 일을 성공적으로 마쳐야만 1천 일 수행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7년의 수행 기간 동안 승려들은 매일 정해진 경로를 따라 쉼 없이 84km를 걷거나 달리는데, 그들이 유일하게 멈출 수 있는 곳은 과거 승려들이 수행 도중 생을 마감한 장소다. 바로 그곳에서 수행에 성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승려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쉼 없이 달리다가 어느 지점에서 불현듯 멈춘 수도승들이 기도를 하기 시작했어요. 캄캄한 밤이었고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죠. 그들은 죽은 수도승을 추모하는 의식을 치렀죠. 그 순간 나는 문득 할아버지가 떠올랐어요. 정말 신기하게도 두려움이 사라졌죠. 할아버지가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어두운 밤이 환한 낮처럼 밝아졌어요.” 대런 아몬드는 에서 철저히 관찰자 입장이 된다. 살아 있는 부처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스스로 몸과 마음을 시험하는 한 개인의 고독한 여정. 그는 힘든 여정을 따라 다니며 스스로를 깨우듯, 수도자들의 고행을 관찰하며 인간의 고독한 내면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고통의 여정에서 아주 오래 전에 헤어진 할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대런 아몬드의 국내 첫 개인전은 청담동 PKM 트리니티 갤러리에서 3월 18일부터 4월 16일까지 열린다. 그의 초기작부터 최신작까지 사진과 영상물 30여 점을 전시한다.

대런 아몬드 1971년생. 영국의 광산 도시 위건에서 태어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영국 윈체스터 아트 스쿨을 졸업하고 조각가로 활동하다가 현재 사진, 영상 등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2005년 할머니에 관한 영상물 로 터너 프라이즈 최종 후보에 오르면서 국제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남극과 북극, 광산 도시와 화산 지대 등 극한의 오지를 여행하며 고행의 여정 중에 있는 인간의 고독함을 감성적인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다. 19세기 유럽 인상주의 화가의 화풍을 닮은 ‘Fullmoon’ 연작은 그를 대표하는 작품.

정세영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