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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명사에게 배운다]성주그룹 김성주 회장에게 듣는 성공적인 인생 전략 뜨겁게 열렬하게 인생을 사랑하라
세계경제포럼이 선정한 차세대 지도자 100인의 주역이자 글로벌 패션 브랜드 MCM의 회장인 김성주 씨. 빠른 속도로, 정직하고 정확하게, 인생의 목표를 달성해온 그녀에게 진정한 글로벌 리더가 될 수 있었던 성공적인 인생 전략을 들어본다. 김성주 회장이 풀어놓은 흥미롭고 유익한 인생 스토리는 20대부터 50대까지 모든 여성에게 희망이 되고, 특히 엄마가 딸에게 들려주는 인생의 조언이라고 생각하면 그 의미가 더욱 깊다.


영국의 설치미술 작가 리처드 우드가 디자인한 청담동 MCM HAUS에서 만난 김성주 회장.

‘여자 김성주’에게 20대는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대성그룹 막내딸로 태어나 상류사회의 부와 명예를 누린 대가로 통과의례처럼 겪어야 했던 일들. ‘유학 금지령’ ‘사회생활 반대’ ‘재벌가와 결혼’…. 보수적인 아버지를 설득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부모의 뜻을 거역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김성주는 뉴잉글랜드 애머스트 대학으로 과감히 유학을 떠났고, 미국 최대의 백화점에서 회장 직속 기획자로 일했으며, 하버드 대학에서 만난 외국인과 결혼했다. 그리고 호적에서 제명됐다. “외국인과 교제한다는 사실이 집안에 알려지면서 아버지로부터 ‘귀국 명령’이 떨어졌죠. 그때 한국으로 돌아왔다면 정략혼을 해야 했을 거예요. 피할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죠. 생활비로 남아 있던 150달러를 가지고 남자 친구와 결혼식을 올렸어요.” 그에게 결혼은 상징적인 의미였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 사회적・경제적・문화적 ‘독립선언’이었다. 모든 걸 다 잃을 각오로 투쟁하지 않았다면 결코 살아낼 수 없었던 20대를 거치며 김성주는 크게 성장했다. 손에 쥐고 태어난 것을 내려놓지 않았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던 20대의 무수한 편린들. 아담한 교회에서 치른 예식은 조촐했지만 의미 있었다. 가정을 이루고 달라진 점이 있다면 가난한 고학생 남편 대신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것 정도. 풍족하게 쓰고도 남을 정도로 생활비를 지원받았던 유학생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단한 생활이 시작됐지만 고생 끝에 낙이 있었다. 물불 안 가리고 적극적으로 일하는 김성주를 눈여겨본 지인의 소개로 뉴욕 블루밍 데일스 백화점에서 일하는 행운을 얻게 된 것이다. 한 달 교통비도 안 되는 돈을 받으며 눈물의 밥을 먹은 지 3년. 스스로 번 돈으로 집세를 내고 고물 자동차지만 자가용도 살 수 있다는 사실이 타국 생활의 고단함을 씻어주었다. 그가 다시 한국 땅을 밟은 건 서울올림픽이 있던 이듬해인 1989년, 전 세계가 경제 위기에 시달리고 있을 즈음이었다. 고통과 긴장의 연속이었던 외국 생활 끝에 건강에 적신호가 온 것이다. 치료를 받으러 한국에 들어왔을 땐 집으로 갈 수 없어 친오빠 집에 은신했다. 그런데 때마침 아버지가 하시는 사업에 도움을 드릴 일이 생겼다. 당시 아버지는 에너지 사업뿐만 아니라 자동차 부품 사업도 크게 하셨는데, 미국의 벤딕스사가 한국과 합작해 공해를 방지하는 전자 분사기를 만들려고 준비 중이었다. 기회는 이때다 싶었다. 미국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벤딕스사와 대성그룹의 합작을 도왔고, 일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여자는 일하면 안 되는 줄 알았던 아버지는 자신이 쫓아낸 막내딸이 중요한 일을 성사시키는 걸 보고 놀라셨다. 그 일을 계기로 아버지는 그에게 사업 자금 3억원을 내주었고, 그것이 지금의 성주그룹을 있게 한 자본금이 되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시작하는 첫 사업. 김성주 회장은 사무실 청소부터 영업까지 모든 일을 했다. 그만의 스타일대로 정직하고 투명하게 사업을 운영하다 보니 믿어주는 사람도 하나둘 늘어갔다.


1 어린 시절 대구에서 큰언니 김정주 씨와 막내오빠 故 김영철 씨, 그리고 김성주 회장이 함께 찍은 사진.


2 스위스 제네바로 떠났던 가족 여행. (왼쪽부터) 둘째 언니 김영주 씨, 어머니, 김성주 회장, 첫째 언니 김정주 씨.

1990년대 초 세계 굴지의 패션 유통 회사 막스앤스펜서가 한국 내 독점 대리점 운영을 맡아줄 파트너를 물색하고 있을 때였다. 국내 대기업을 필두로 40개가 넘는 글로벌 기업이 앞다퉈 지원한, 체급에서부터 밀리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우려했던 것과 달리 성주인터내셔널은 당당하게 최종 심사를 통과해 3개 재벌 기업과 막판 각축전을 벌였다. 그리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30여 개국에 630개 대리점을 두고 연 매출 8조 원 이상을 올리는 막스앤스펜서가 내로라하는 대기업을 마다하고 중소기업인 성주인터내셔널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들이 성주인터내셔널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파트너 선정을 책임졌던 막스앤스펜서 극동 지사장은 정확히 세 가지 이유를 꼽았다. 정경 유착이 없는 ‘투명한 기업’, 10년 넘게 한 우물만 판 ‘소매 유통 회사’, 수직적인 명령 체계도 없고 결재 라인도 단순한 ‘횡적인 조직’. 그들은 모든 면에서 합리적인 경영이 가능한 성주그룹을 알아본 것이다. 막스앤스펜서를 비롯해 구찌, 입생로랑, MCM 등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가 하나하나 그의 손을 거쳐갔고, 국내 최초로 유러피언 럭셔리 브랜드 MCM을 중소기업이 매각하는 기염을 토했다.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질주하니 못할 것이 없고,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자신이 원하는 지점으로 향할 수 있었다. 김성주 회장은 이것을 ‘향속 경영(inte-speed management)’이라고 부른다. 목표가 있는 방향성, 방향성을 갖고 내는 스피드. 깎아지른 듯 날렵한 헤어스타일과 강렬한 메이크업, 심플하지만 컬러 포인트를 준 패션 스타일. 김성주가 지향하는 ‘경영 방식’과 ‘패션 스타일’은 묘한 상관관계가 있다. 그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정직함’과 ‘투명성’이다. 글로벌 기업 코카콜라 회장으로부터 본사에 와서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그의 성정은 여지없이 드러났다. “도대체 언제까지 아이들 이빨을 썩게 하는 탄산음료만 생산할 것이냐! 그렇게 번 수천억 원 중 10%만 떼어서 콜라 먹고 자란 청소년들에게 투자해라” 등 청중을 압도하는 발언은 화제가 됐다. 더욱 놀라운 건, 그 강연을 들은 코카콜라 회장이 그에게 보낸 이메일 내용이다. “지금까지 강연한 그 어떤 사람보다도 당신은 ‘정직한 연설자’였다. 나는 반드시 당신의 충고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 후 코카콜라는 30년 동안 함께 일한 마케팅업체를 바꾸고, 건강 음료 브랜드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가 세계적인 거대 기업 총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건 진심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 어려운 자리에 가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됐죠. 해답이 떠오를 때까지 기도를 했어요. 어느 순간, 하느님이 해답을 주시더라고요.”
신학 대학을 졸업하고 청렴한 어머니 손에서 자라난 김성주 회장은 청교도 정신을 바탕으로 한 나눔의 실천에도 앞장서고 있다. 매년 모교인 연세대학교 학생 500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것부터 봉사 활동까지 ‘가진 자에게 더 큰 의무가 있다’라는 말을 숙제처럼 안고 사는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북한에 기부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밝히기도 했다. MCM을 3년 안에 중국 시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브랜드로 성공시키고, 5년 안에 그 무대를 세계로 이동하고, 7년 뒤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패션 그룹으로 성장시키는 것. 그렇게 번 돈으로 나라의 위상을 높이고, 60대쯤에는 북한에 가서 이웃을 도우며 사는 것(올해 54세인 그는 10년 뒤에는 북한에 가 있을 거라고 말했다). 김성주 회장의 아름다운 인생 전략은 결코 어렵거나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3 김성주 회장의 집무실은 거대 패션 그룹 회장실이라고 하기엔 너무 소박하다. 그는 최소한의 공간에서 최대한의 효율을 내는 것이 중요할 뿐이라고 말한다.

김성주 회장이 조언하는 성공적인 인생 전략 5
차라리 ‘미운 오리 새끼’가 돼라 “나는 집안의 반항아였다. 유교적인 전통이 꼿꼿이 살아 있는 집안의 7남매 가운데 막내, 특히 딸이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애초부터 발언권이라곤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가풍에 끊임없이 도전했다. 어머니는 내가 삐딱하게 굴면 혀를 끌끌 차시며 중얼거렸다. ‘에그, 저 미운 오리 새끼.’ 그럴 때마다 나는 받아쳤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전 이제 곧 백조가 되어 훨훨 날아다닐 거예요.’ ‘저 입 좀 봐라. 모른다. 나는 너 포기했다.’ 나는 ‘포기했다’라는 소리를 참 많이 들으며 자랐다. 그렇게 방치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른들이 나를 포기하도록 대들고 도전한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다.
창조적으로 사고하라 “‘교수님, 이 노트 좀 보세요. 교수님이 분명히 이렇게 강의하셨잖아요. 저는 교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썼는데 왜 학점이 C+밖에 안 나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미국 애머스트 대학에 다닐 때 일이다. 사회학 강의 성적표를 받아 든 나는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다. 잔뜩 흥분한 나를 바라보며 교수가 말했다. ‘바로 그게 문제야. 자네가 쓴 답은 자네 생각이 아니라 내 생각일세. 그렇기 때문에 그 점수 이상은 줄 수가 없어.’ 순간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정신이 번쩍 든 나는 당장 공부 방식을 바꾸었다. 교수의 생각과 반대되는 자료를 찾고 나만의 독창적인 생각과 비판적 사고를 갖기 위해 노력했다. 어떤 상황에 부딪히더라도 스스로 결론을 찾아내는 능력, 창조적 사고는 성공의 지름길이다.”
가진 자에게 더 큰 의무가 있다 “미국 최대의 백화점 블루밍 데일스에서 가장 편하게 일하는 사람은 수위 아저씨고, 가장 고달프게 일하는 사람은 마빈 트라우브 회장이다. 마빈의 방은 건물 7층 맨 구석에 있다. 회의실까지 합쳐 7평도 채 안 되는 조그만 사무실에서 그는 매년 10조 이상의 매출을 올린다. 나는 마빈 회장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회장님, 세계에서 가장 잘산다는 나라, 그것도 가장 화려한 백화점 회장실이 왜 이렇게 작고 초라합니까?’ ‘성주, 정신이 나갔소? 이 비싼 맨해튼 땅에서 생산성을 창출하려면 얼마나 힘이 드는 줄 알아요? 내가 무엇 때문에 쓸데없이 큰 방을 갖겠소. 그럴 공간이 있다면 차라리 매장 하나를 더 만들지.’ 핀잔부터 준 다음 그는 덧붙였다. ‘내 책상을 고급으로 바꿀 돈이 있다면 손님을 위해서 쓰는 게 맞소. 그게 바로 우리의 의무요.’ 나는 ‘바로 이거야!’라고 작게 외쳤다.”
거트를 가져라 “서양 사람들은 ‘거트 gut’가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거트란 직역하자면 ‘창자’라는 뜻이지만 ‘배짱’이라는 우리말에 더 가까운 표현이다. 거트가 있다는 말은 용기와 도전 정신,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버텨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회사 입장에서는 이런 사람이 필요하다. 직원을 뽑는다는 건 전사를 뽑는 일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누구하고든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한다. 거트를 가진 사람은 지도력이 있기 때문에 상사의 성장에도 도움을 준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속해 있는 조직을 발전적으로 이끌어나갈 것이다.”
큰 그림을 그려라 “글로벌이라는 대양을 혼자 힘으로 항해하려면 전략 수립이 더더욱 필요하다. 전략을 세우려면 ‘큰 그림’을 그릴 줄 알아야 한다. 그 큰 그림 속에는 무엇을 그려 넣어야 할까. ‘소울 서칭 soul searching’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과 자질, 가능성을 발견하고 자신의 책무를 깨달아야 한다. 그런 다음, 3년, 5년, 7년 후까지 내가 이루어야 할 목표가 무엇인지 단계적인 계획을 세우고 최대한 구체적으로 그려나간다. 또 머지않은 미래에 나에게 벌어질 크고 작은 일들을 짐작해보라. 보다 정확한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정세영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