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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행복의 샘물, 늦둥이]도예가 이종능 씨 부부와 늦둥이 지우 뒤늦게'가 아니라 '다시' '더 강하게' 찾아온 행복
흙의 본성이 느껴지는 도자기를 빚는 이종능 씨. 마흔아홉 살에 낳은 지우를 자신의 도자기처럼 자연의 본성대로 키우고 있다. 일곱 달 후면 지우 동생도 태어난다. ‘날고 있는 새는 걱정할 틈이 없다’는 말을 떠올리며 기쁘게 살아낼 생각이다.
물씬한 비안개 속에 산자락이 나타나자 가슴이 할랑거리고 입가에 웃음이 핀다. 건너편에서 달려오던 지프차가 유리창으로 물벼락을 들씌워도 마음이 찌푸려지지 않는다. 조금 더 지나니 구름과 산이, 집과 나무가 뒤엉켜 있는 퇴촌 절골이 눈에 들어온다. ‘지산 도천방’이라는 입간판 아래 도인처럼 생긴 사람이 마중 나와 있다. 묽은 먹색의 무명옷을 입고 환한 웃음으로 객들을 맞는 이종능 씨다. 번개처럼 온 마당을 뛰어다니며 까르르, 알랑알랑, 칭얼칭얼대던 늦둥이 지우도 달려온다. 올해로 쉰세 살이 된 아빠, 만 43개월짜리 아들이 만드는 기분 좋은 공기에 비그늘이 개이는 것 같다.
아이 하나를 가슴으로 품어 젖을 먹이고, 웃는 낯으로 어르고, 기저귀 갈며 배꼽에 바람 불어넣으면서 키워내는 행복. 그 맛을 이종능 씨 부부는 좀 늦게 만끽하는 중이다. 결혼 후 6년 동안 아이를 갖지 않은 부부에게, 그것도 아버지 나이 마흔아홉에 찾아온 지우는 축복의 아이였다. “지우를 키우면서 남자로서, 사람으로서 비로소 당당해지는 걸 느껴요. 물론 책임감도 생겼지만 그것도 꽤 기분 좋은 감정이고요. 저는 원래 누가 때리면 그냥 맞는 사람이었어요. 상대방의 못된 감정과 판단에 내 감정이 휘둘리는 게 싫어서 그냥 내버려두고 신경 쓰지 않는 성정이었는데, 지우가 태어난 다음에는 좀 달라졌어요. 내가 맞는 건 지우가 맞는 거다, 최소한 상대방이 때리는 걸 방어라도 하자. 그것만 해도 상당한 발전이죠.” 서른여덟 살의 엄마 이지선 씨는 아이를 살뜰히 키우며 ‘내 삶이 어디로 가버린 것이 아니라 이것이 나의 가장 화려하고 행복한 화양연화’임을 깨닫고 있다.

(위) 경기도 광주 퇴촌의 절골마을에서 아내 이지선 씨, 늦둥이 지우, 일곱 달 후면 태어날 둘째와 행복한 일상을 보내는 이종능 씨. 집 바로 옆, 도자기를 굽는 그의 작업 공간은 ‘지산 도천방’이라 이름 붙였다.


기교 없이 흙 자체가 예술이 되는 도자기가 이종능 씨의 ‘토흔’이다. 토흔은 흙의 흔적을 좇는다는 의미.

아이를 갖기로 결심한 후 이종능 씨는 스키 국가 대표 출신의 최준희 감독에게 레슨까지 받으며 스키를 탔다. 보통 아빠들에 비해 나이가 많지만 그보다 더 건강한 몸으로 아들을 맞고 싶었다. “지우 낳고도 겨울만 되면 열심히 스키 타요. 나중에 지우 친구들이 ‘느이 아버지는 수염도 나고 늙었다, 야’ 하면 그 친구들 죄다 모아 스키 타러 가려고요. 내가 상급자 코스에서 멋지게 내려가면서 ‘지우야, 나이는 숫자 아니냐!’ 이거 한번 하려고요.” 개선장군 같은 그의 목청, 역시 기분 좋은 공기를 만들어낸다.
“늦둥이는 ‘늦게’가 아니라 ‘다시’ ‘새롭게’ 찾아온 행복이에요. 친구들이 늦둥이가 생겼다고 하니 ‘이거 축하를 해야 하나, 위로를 해야 하나’라며 늙은 우리를 걱정했는데 사실 아이들은 우리 없어도 잘 큽니다. 광활한 사막에 나무를 심을 때 저 묘목이 어떻게 자라겠느냐 불안해하면 그 나무는 안 자라요. ‘이 나무가 자라 언젠가 거대한 숲을 만들 거야’라고 믿으면 믿는 대로 되죠. 그 여린 나무만 보면 즐거워졌다, 의기소침해졌다 하게 되지만 숲을 보면 그 속에 너무나 많은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돼요. 숲에는 그 나무에 부족한 걸 대신 채워주는 또 다른 무엇이 꼭 있어요. 지우가 생기고 나서 나무가 아닌 숲을 보게 됐으니, 역시 지우는 제 선생님입니다.”


1, 3 자연의 본성대로 자라길 바라는 부모의 바람대로 지우는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아이로 커가고 있다.
2 이종능 씨는 흙의 본성을 그대로 살린 도자기를 빚는다.


흙의 본성을 살려 빚은 도자기처럼 아이도 그렇게 열 달 배 속에 아기를 품어 낳듯이 스스로 장작을 때서 도자기를 세상에 낳는 작가 이종능 씨. 이 가족 이야기를 풀어내려면 그의 구불구불한 인생길, 그 안에 담긴 도자 인생을 좀 둘러봐야 한다. 경영학도였던 대학 2학년 때 ‘삶을 잘 경영하려면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게 뭔가’ 생각했다. 종이에 하고 싶은 것을 죄다 적고 하나씩 지워나가니 남은 것이 도공이었다. 그때부터 도자기 가마를 찾아다녔다. 4학년 때부터 아예 이천에 자리 잡고 도자기를 배웠다. 다시 전국 유랑길에 올라 안 가본 도자기 가마가 없을 정도로 찾아다녔고, 지리산 일대에서 분청사기 파편을 수집했다. ‘틀을 가지지 말자, 새로움을 만들자’란 깨달음 끝에 외국에서 4년간 방랑도 했다. 조선의 흙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실크로드로, 인도로, 태국으로 떠나 그 나라 흙을 배웠다. 그 길에서 그는 지구 상 어떤 곳과도 다른 색깔과 질감의 흙을 고스란히 그릇에 담아내겠다는 꿈을 꾸게 됐다. 1993년 귀국 후 광주 퇴촌에 자리 잡고 가마도 손수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그의 ‘토흔’이다.
토흔은 청자, 분청, 백자, 청화백자 같은 장르에 끼워 넣기가 애매한 도자기다. 굳이 비교하자면 색감, 형태, 분위기가 원시시대, 삼국시대의 토기를 닮았다. 유약 없이 투박하고 거칠게 구운 표면, 불에 그을린 듯 어두운 색감, 투박한 모양에서 원시, 모성이 느껴진다. “기교 없이 흙 자체가 예술이 되는 도자기를 빚고 싶었어요. 1300℃의 불길 속에서도 원래 흙의 본성을 잃지 않는 도자기.” 도예가 이종능은 빠지고 흙이 절로 만든 도자기, 그걸 위해 지리산과 문경에서 가져온 흙을 물에 씻고, 햇볕에 말리고, 공기에 숨을 쉬게 한 후 빚는다. 소나무와 과일나무를 태운 재로 그만의 유약을 만들고, 불쏘시개도 화력이 좋은 강원도산 50~60년생 소나무를 쓴다.


4 지우는 물레를 돌려 도자기 빚는 시간을 참 좋아한다. 물론 늘 아빠와 함께다.

흙이 ‘절로’ 만들어내는 토흔처럼 그는 지우도 그렇게 키울 생각이다. 여염집 아이들이 서너 살 되면 가는 유치원도 학교 가기 6개월 전쯤에나 보내고(그것도 단체 생활을 익힐 기회를 위해 택한 최단기간) 산으로 들로 맘껏 뛰어다니게 하고 싶다. “원시인처럼 스스로를 보호하고 행동할 수 있는 감각, 본능적인 힘이 점점 더 필요한 세상이 될 거예요. 세계가 문명화될수록 아마 그런 힘이 더 필요해질걸요. 과거부터 있어왔던 최고의 감각이잖아요. 그런 걸 지우가 갖게 해주고 싶어요. 여행과 생태 수업이 지우에게 많은 걸 가르쳐주겠죠.” 부모는 ‘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걸 아이가 스스로 터득하게 아이를 아이로 들여다보고, 그냥 놓아둘 생각이다. 아이는 스스로 먹고 자란다. ‘스스로 해내는 걸 기뻐하는 아이를 보며 기뻐하기’가 부모 역할이라고 믿는다. 이종능 씨 부부는 ‘아이가 지금 제대로 사는지, 웃고 있는지, 그래서 내가 행복한지’만 살필 것이다. 흙이, 도자기가 준 가르침처럼 아이는 ‘절로’ 제 색깔을 찾아갈 것이다.
일곱 달 후면 지우 동생이 태어난다. 두 아이는 서로가 서로의 큰 나무 그늘이 될 것이다.늦은 나이에 또다시 아이를 낳는 게(둘째 아이와 아버지의 나이 차는 53세가 된다. 엄마 나이도 38세다) 걱정도 되지만 ‘날고 있는 새는 걱정할 틈이 없다’는 어른들 말씀을 떠올리며 기쁘게 그날들을 살아낼 생각이다.


5 지우가 태어난 지 54일째 아빠와 찍은 사진이다.

도예가 이종능의 창작의 샘물, 늦둥이 지우 지우를 낳고 그의 도자기가 변화했다. “아이 눈에 세상은 신기하고, 구태의연하지 않고, 신비하듯이 나도 그렇게 세상을 보려고 했더니 좀 다른 작품이 나왔어요. ‘흙의 반란’이 그 시작이지요.” ‘흙의 반란’은 눕힌 도자기를 두 개씩 이어 붙여 새로운 형태를 만들고는 윗부분을 거칠게 뜯어낸 작품이다. 그 틈 안에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미륵반가사유상이 솟아나오는 작품으로 어찌 보면 천년 전 옹관 같기도 하다. 말 그대로 지우는 도예가 이종능의 창작의 샘물인 것이다.
꿈과 이상이 아직도 붉은 아버지 이종능 씨는 올해 말 도쿄에서 큰 규모의 전시회를 계획하고 있다. 11월 16일부터 한국문화원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이다. 스스로 ‘도쿄 대첩’이라고 부르는 이번 전시에서 그는 한번 제대로 보여주고 싶다. 토흔, 곧 우리 흙의 흔적을. 일본 전시가 끝나면 중국와 미국으로 해마다 움직일 계획이다. 그 붉은 꿈도 지우가 꾸게 했다. “최고의 은행털이범 옆엔 최고의 미인이 있어요. 이 금고를 잘 털어야 해변에서 그 미인과 와인을 한잔하죠. 좀 더 일하라고 신이 지우라는 기회를, 지혜를 준 거잖아요. 저는 늘 이야기합니다. ‘지우야, 네가 이 지산 도천방 주인이고, 아버지는 생산 담당 직원이다. 그것도 평생 직원이다’라고.”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좋아해 전화 벨소리도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인 아버지의 붉디붉은 가슴. 그 불을 지핀 지우란 아들. 누가 이 부자를 뒤늦게 예고 없이 맺어진, 늦둥이와 늙은 아비의 관계라 할 것인가. 다시 빗길을 달려 절골마을을 떠나오는 내내 이종능 씨의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던 노래가 입에서 맴돌았다.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한 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빛나는 불꽃으로 타올라야지….” 그 비장한 가사에 웬일인지 마음의 비그늘이 개인다.

6 지우와 엄마가 그린 그림. 나뭇잎을 붙여 튼실한 줄기를 만들고 물파스 뚜껑에 물감을 찍어 나뭇잎을 표현했다.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