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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로 떠나는 녹색문화 미술 기행 발밤발밤 걸으니 나는 시가 되고, 그림이 되고
아름다운 산하를 걷는 여행이 요즈음의 화두다. 하지만 마냥 걷기가 좀 싱겁다면, 문학과 미술의 눈으로 그 길을 걸어보도록 하라. 소설가 김주영 선생이 이끄는 문학사랑에서 ‘녹색문학미술기행’이란 자리를 마련했다. 유명 소설가・화가와 함께 제주 올레를 걷는 여행이다. 소설가 윤후명, 화가 민정기 선생과 함께 떠난 첫 여행, 시와 그림이 조우한 산수화 같았던 여행 한 폭에 <행복>이 함께했다.

녹색문학미술기행은 제주 올레를 문학과 미술의 감성으로 느끼는 여행이자, 소설가 윤후명 선생(왼쪽)과 화가 민정기 선생 등 유명 소설가・화가를 가까이 만날 수 있는 여행이다.

서울보다 훨씬 따뜻한 제주의 하늘. 늦겨울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중산책 雨中散策이라! 녹색문학미술기행에 모인 소설가 윤후명 선생 내외, 화가 민정기 선생 내외와 참가자 10명의 얼굴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다들 멀거니 하늘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이런다. “제주까지 와서 비 못 만나면 섭섭해서 어쩌겠어요.” 이 한마디에 긴장감이 누그러졌다. 일행은 곧 버스를 타고 제주 서쪽에 있는 올레 12코스로 향했다.
녹색문학미술기행은 말 그대로 녹색의 제주 올레를 문학과 미술 분야 작가들과 함께 걷는 여행이다. 매월 한 번씩 열리며 매번 다른 작가들이 참여한다. 소설가 김주영 선생이 이사장으로 이끄는 ‘문학사랑’이 작년부터 진행한 녹색문학기행의 연장선에 있는 프로그램이다. 문학사랑 이종주 이사가 설명을 덧붙인다. “예로부터 시화동원 詩畵同源이라 했습니다. 시와 그림은 근원이 같지요.” 선인들은 유명한 시구절을 화폭에 담기도 했고 그림의 흥취를 시로 읊기도 했다. 요즘에도 문학과 미술의 만남은 종종 이어진다. 민정기 화백이 운을 띄운다. “소설가 구보 박태원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그의 소설을 화가들이 회화로 그려낸 전시가 있었어요. 전 <천변풍경>의 이발소 풍경을 소재로 그렸고요. 윤후명 작가님도 글 쓰는 분 중에는 유일하게 그림을 출품하셨지요.” 윤후명 선생은 10여 년 전부터 붓을 들었다. “사군자를 그리기 시작해 어느새 아크릴화를 시작했어요. 미술학도처럼 데생부터 시작할 여력은 안 돼, 붓으로 바로 그렸지요.”

바로 지금, 잔치는 시작되었다 12코스 수월봉 입구에서 본격적인 걷기가 시작됐다. 일행은 해안을 따라 길게 흩어졌다. 각자 편한 속도로 슬겅슬겅 걸었다. 민정기 선생은 자주 멈춰서 해안 곳곳을 카메라에 담았다. 윤후명 선생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말을 붙였다. “제주 여행이 처음은 아니시지요?” “너댓 번 와봤지요. 한데 올레를 걷는 것은 처음입니다. 문득 아내는 제주도에 언제 와봤을까 궁금해, 아침에 출발하면서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안사람 왈, ‘우리 만날 때 제주에 놀러 왔잖아요’하더군요. 화들짝 놀랐지요. 허허 참.” 발길을 나란히 하던 일행, 한바탕 폭소했다.
억새풀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수월봉을 올랐다. 정상으로 훌쩍 오르는 순간, 노란 억새밭과 새파란 바닷물이 선명한 대비를 이루며 눈앞의 풍경을 반으로 갈랐다. 사진으로 찍는다면 학창 시절 배웠던 ‘보색 대비’ 색상표와 흡사할 것이다. 언론인 출신 서명숙 씨가 은퇴 후 고향 제주도로 내려가 동생들과 일일이 발로 걸으며 찾아내 이었다는 아름다운 길, 올레. “올레의 뜻은 아시지요?” 제주도 토박이인 가이드 고미영 씨가 말문을 열었다. “제주에는 바닷가 쪽으로 집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왜적이 침입하면 순식간에 기습을 당했어요. 그래서 보안상의 이유로 대문에서 집까지 쉽게 통하지 못하도록, 한 명 정도만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골목을 만들었어요. 그 골목을 올레라고 해요. 어찌 보면 슬픈 역사가 담긴 이름이지요.”

12코스 올레 트레킹을 마치고 제주현대미술관으로 향했다. 민정기 화백은 제주현대미술관과 인연이 깊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찾아가는 미술관’ 프로그램을 통해 몇몇 화가들과 제주의 여러 곳을 다니며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그 결과물을 얼마 전까지 이곳에서 전시했지요.” 제주현대미술관은 작가를 위한 게스트하우스도 운영하고 있다. 국내외 쟁쟁한 작가들이 제주의 자연을 느끼며 작품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이다. 현재 전시하고 있는 김성호 화가의 작품도 그렇게 태어났다. “도심의 새벽 풍경에 주목하는 김성호 작가가 제주의 새벽을 그렸습니다. 밤의 끝을 잡고 있는지, 아침의 시작을 망설이는지, 설명하기 어려운 여운이 느껴집니다.” 민영기 화백과 윤후명 작가의 방문 소식을 듣고 마중 나온 김창우 관장의 설명이다.
스케치북과 연필을 받은 뒤 일행은 세미나실에 모였다. 윤후명・민정기 선생의 강연이 이어졌다. 말이 강연이지, 이번 여행 중 글짓기하고 스케치하는 시간을 위한 짤막한 ‘응원가’였다. 윤후명 선생이 마이크를 잡았다. “글을 쓰는 데 정해진 방법론이란 건 없지요. 내키는 대로 쓰시면 됩니다. 그런데 마음대로 쓰기란 참 어렵습니다. 자유를 줬더니 도리어 우왕좌왕하는 격이라고 할까요? 그러니까 정해진 공식은 없되, 자기만의 색을 갖춰 쓰면 됩니다. 늦었다는 때도 없고요. 박완서 소설가가 마흔에 데뷔해서 당시 늦깎이로 불렸는데, 요즘은 사정이 다르지요. 최영미 시인의 시를 빌려 ‘예순, 잔치는 시작되었다’가 맞는 것 같습니다.” 민정기 화백이 강연을 이어갔다. “저는 쭉 서울에서 자라다가 20년 전에 양평으로 내려가 살기 시작했습니다. 도시에서는 닦인 길만 길이었는데 자연 속에 살다 보니 길 아닌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이 걸었습지요. 그러다 보니 화풍이 놀랄 정도로 바뀌었습니다. ‘난 그림 솜씨 없는데’ 하시는 분들도 이번에 올레를 걷다 보면 뭔가 그리고 싶을 겁니다.” 격의 없는 대화는 세미나를 마친 뒤에도 이어졌다. 숙소 근처 호프집에서 말이다. 민정기 화백이 ‘쏘는’ 생맥주를 힘차게 건배했다. 안타깝게도 술을 딱 끊은 윤후명 선생은 참석하지 못했다.

수선화, 돌담길… 작품으로 제주를 읽다 이튿날, 아침 일찍 올레 7코스로 향했다. 올레 방문객들에게 가장 운치 있는 길로 손꼽히는 제주 남단의 해안에 있는 길로, 억새를 비롯한 각종 꽃나무가 소담하게 자라고 있었다. 곳곳에 새카만 현무암이 조각상처럼 누워 있었다. 그 돌 더미 곁에 새하얀 수선화가 피었다. 겨울이고, 바닷바람이 보통이 아닌데 저 곱고 여린 꽃이 어찌 고개를 내밀었을까 싶다. 가이드 고미영 씨가 눈을 찡긋한다. “제주에서 9년 동안 귀양살이한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제주에 대해 유일하게 칭송한 게 있었는데, 그게 바로 돌담 옆 겨울 수선화였답니다. 제주 야생 수선화는 겨울바람을 뚫고 피어 더욱 청초하지요.”

평소 어여삐 여긴 수선화가 엄동설한에도 지천에 피어 있으니, 먼 땅 유배지에서도 때때로 흐뭇했으리라. 막 꽃망울을 터뜨린 수선화를 두고 추사는 “희게 퍼진 구름 같고, 새로 내린 봄눈 같다”고 했다. 시도 읊었다. “한 점의 겨울 마음 송이송이 둥글다/ 성품은 그윽하고 담박하여 차갑고 우뚝 솟았네/ 매화가 높다지만 뜨락을 못 떠났네/ 맑은 물 해탈한 신선을 진실로 보노라.” 김정희의 시 ‘수선화’
밭이며 집은 물론이고 무덤까지도 돌담을 두른 제주도. 걷기의 속도로 찬찬히 돌담을 바라보니 켜켜이 쌓인 돌 틈으로 먼 시간이 느껴졌다. 불규칙한 틈새, 그러나 반복적으로 쌓은 모양새…. 눈앞에서 시계추가 왔다 갔다 하는 듯했다. 서서히 의식과 무의식 사이쯤으로 들어갔다. 윤후명 선생이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단편소설 ‘돌담길’을 쓸 때도 이와 비슷한 기분이 아니었을까? “나는 돌담길을 하염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이 돌담길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부터 걸어온 길이었다.” 이렇게 시작하여 작중 화자는 꿈인지 착각인지, 혹은 징그럽도록 선연한 현실인지 모를 어떤 시간을 걷는다. 낯선 곳에서 잠을 이룰 때면 유년의 기억처럼 풀지 못한 채 덮어둔 마음의 숙제가 꿈에 나오는데, 이 작품이 그런 꿈 같다. 언뜻 난데없지만 촘촘하게 추적해보면 내가 볼 수 없는 내 뒷모습 같은 이야기.
이중섭 미술관과 석부작 테마파크를 들른 뒤 주변을 거니는데, 반짝 하늘이 개었다. 오후의 은근한 햇살을 반가워하며 민정기 선생이 바위에 앉아 스케치북을 꺼냈다. 다른 일행도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고 스케치를 시작했다. 풍경을, 다시 오지 않을 이 시간을.

(왼쪽) 첫 녹색문학미술기행에 동행한 소설가 윤후명 선생, 화가 민정기 선생.




1 올레 1코스에서 바라본 전경. 걷다 보면 완만한 언덕길과 해안 풍경이 번갈아가며 나타난다. 
2 여행 이틀째, 올레 7코스를 따라 네 시간 정도 여유롭게 걸었다. 
3 때론 홀로, 때론 일행의 온기를 느끼며 길을 걷는다. 자연, 문학, 미술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로 모였기에 처음 만났지만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걷기의 끝, 내가 작품이 되던 날 마지막 날에도 흩뿌리는 비를 맞으며 걸었다. 올레 1코스의 끝 부분인 알오름에 들러 섭지코지로 향했다. 듣던 대로 드라마틱한 풍경이다. 바람의 무대이고, 바다의 정거장이고, 돌의 전당이다. 그리고 저 멀리 등대가 서 있다. 등대를 향하는 윤후명 선생을 잰걸음으로 좇았다. “사람들이 요즘 걷는 여행을 참 많이 해요. 왜 그럴까요?” “자연스러운 거예요. 우리 모두의 인생이 길 위에 있지 않습니까. 계속 가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목적이기보다는 과정입니다, 인생은요. 길을 걷는 여행도 그렇고요.” “선생님은 걸을 때 어떤 생각하세요?” “오래 걷다 보면 특별한 생각이 없는 시간이 지속되지요. 현대인들은 목적 없는 생각을 하기가 참 드문데, 올레처럼 자연 속을 길게 거닐 때는 가능해요. 뭐랄까, 명상은 아니지만 분명히 잡념도 아니에요. 그 생각은 매우 자유롭지요. 우주 유영까지 할 수 있어요. 길가에 핀 꽃의 정체를 모른다고 해서 잡초라 이를 수 없듯, 그런 생각은 잡념이 아니에요. 소중한 상념입니다.”
문득 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틈틈이 좋은 글귀와 그림이 알싸하게 나를 자극하는 가운데 무심히 걸었던 2박 3일. 내 안에 잊고 살았던 형용사, 부사가 슬그머니 살아 올라왔다. 끝끝내 쥐고 있느라 엉켜버린 시시콜콜한 명사들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몸과 마음에 더부룩하게 찬 가스가 빠져나간 기분이다.
등대에 다다랐다. 뿌연 하늘 아래 먼 파도가 검실검실하다. 거추장스러운 생각을 내려놓고 바라보니, 내 눈에 바다는 먹빛이다. 요 며칠 걷는 동안 마음속에서 썩썩 갈아놓은 먹으로 바다를 칠해봐야겠다. 옛 어르신 왈, 먹은 여섯 가지 색을 띤다고 했겠다. 칠하지 않으면 희고, 칠하면 검고, 바짝 마르거나 축축하고, 진하거나 옅은 게 먹빛이라 일렀으니…. 저리 요동치는 파도는 서너 가지 먹색을 써야 할 것이고, 그 끄트머리에 짙은 먹색을 둘러 흰 포말을 살릴 것이며, 그 위에 축축하게 번진 듯한 먹색으로 하늘을 적시리라…. 


1 제주현대미술관 입구. 이 건물은 한국건축가회 대상을 차지했다.
2 이번 여행에 참가한 정영미 씨가 걷던 도중 스케치를 하고 있다.
3 추사 김정희가 제주에 귀양 왔을 때 유독 아낀 야생 수선화. 돌담 밑에 피어 제주의 겨울을 환하게 만든다.
4 자동차가 아닌 두 발로 걸어 제주도를 여행하니 해안 절벽이 느린 속도로 천 가지 표정을 드러낸다.

녹색문학미술기행에 참가하고 싶다면 녹색문학미술기행 행사는 오는 6월까지 제주 올레에서 매달 한 차례씩 진행한다. 2월 21~23일에는 김주영 작가와 이인 화가, 3월 27~29일에는 박상우 작가와 한생곤 화가, 4월 24~26일에는 성석제 작가와 최석운 화가, 5월 29~31일에는 박범신 작가와 안종연 화가, 6월 26~28일에는 오정희 작가와 서용 화가와 함께 떠난다. 각기 다른 풍광의 올레를 걸으며 문학과 미술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간이다. 작가와 화가의 강연회가 열리며 사생대회 및 이야기 공모 시간도 마련한다. 매월 선착순으로 120명을 모집한다. 문의 온누리여행사 02-564-4442, www.onnuritravel.com


녹색문학미술기행 참가자들의 소감 한마디
결혼 34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부부, 지난해 녹색문학기행부터 빠지지 않고 늘 출석한 사람들, 딸 둘을 데려온 여성 등 이번 녹색문학미술기행에는 다채로운 사람들이 참가했다. 우연히도 참가자 10명 중 2명이 <행복>의 오랜 독자여서 반가움이 더했다.

장진순・이조일 씨 부부 “결혼 20주년을 맞이하면서부터 우리 부부를 위해 뭔가를 챙겼어요. 1월 21일 결혼기념일에 이 여행 소식을 접하고 바로 신청했는데, 이렇게 멋진 곳을 멋진 분들과 걸으니 참 좋았습니다. 이야기 공모와 사생대회 자리를 빌려 틈틈이 글도 적고 손 가는 대로 그림도 그려봤고요, 졸작을 대가 선생님들이 평가해주셔서 영광이었습니다. 자연, 문학, 미술이 인생의 종합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모두 모였으니 이보다 아름다운 여행은 없지 않을까요?”
<행복> 독자 최미경 씨 “대학생, 고등학생 딸과 왔어요. 남편과 막둥이 아들은 집을 보고 여자 셋만 온 거죠. 다 큰 딸들이 처음에는 내키지 않는 눈치였는데 막상 와보니 신이 났네요. 제가 첫날에는 함께 걸으며 딸들에게 이것저것 가르쳐주려고 했는데, 둘째 날부터는 꾹 참았어요. 걸으면서 저희 스스로 깨우치는 게 많겠더라고요. 그랬더니 애들이 속에서 차오르는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네요. 모녀의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 같습니다.”
<행복> 독자 이희복 씨 “작년 9월 소설가 김주영 선생님이 이끈 녹색문학기행 이후 매월 참석했어요. 첫 회 참가자들이 무척 친해져서 서울에서 뒤풀이도 하고, 김주영 선생님과 함께 부암동 길을 걷기도 했어요. 혼자 왔던 여성 참가자와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고요. 이런저런 일로 무척 힘들 때 우연히 여행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걸으면서 마음이 많이 안정되었어요. 제가 동경하는 작가들과 함께 밥 먹으며 일상적인 면도 보고, 인생의 가르침도 들을 수 있어 유익했습니다.”

나도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