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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 동물이라는 가족_유기동물 입양기] 여성학자 오한숙희 씨 가족과 반려견 잔디, 여래, 담덕, 덕만 생명에 대한 예의를 가르쳐주고 떠난 ‘잔디’에게
5년 동안 오한숙희 씨 가족의 막내로 산 잔디가 지난 1월 갑자기 먼 세상으로 떠났다. 가족들은 버림받고 상처입은 유기견 여래, 담덕, 덕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자신들과 그 아이들의 상처 모두를 보듬었다. 모든 생명은 존엄하다는 걸 관념이 아닌 현실로 알게 한 잔디에게 보내는 감사의 이야기.

오한숙희 씨와 어머니 한숙자 씨, 그리고 왼쪽의 덕만, 오른쪽의 담덕. 다섯 달 된 덕만이와 열 달 된 담덕이는
안락사당할 처지에 있던 유기견이었다.


사람들이 순하게 사는 마을엔 햇살이 참 많이도 내린다. 빌빌하고 텁텁한 도시의 햇살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빛과 볕이다. 오한숙희 씨의 집 마당에 따스운 숭늉 냄새를 풍기며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오한숙희 씨 모녀와 강아지 담덕(<태왕사신기>의 주인공 담덕의 이름을 따옴), 덕만(<선덕여왕>의 그 덕만)이 양달에서 해바라기하고 있다. 다리가 불편한 여래는 베란다에 앉아 부신 햇살에 눈을 찡긋거리고 있다.
담덕, 덕만, 여래는 오한숙희 씨 가족이 키우던 잔디의 뒤를 이어 이 집 식구가 된 강아지들이다. 1월 6일 밤, 튼튼하고 늠름하던 잔디가 갑자기 마당 구석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뒤 가족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5년 동안 식구들의 행복과 간난신고를 함께한 그 아이가 너무도 갑작스레 무지개 다리를 건넌(반려인들이 반려 동물의 죽음을 일컫는 표현) 것이다.“그날 아침 출장 가는 나를 골목까지 배웅해준 녀석인데, 출장에서 돌아오니 송아지만 하던 녀석이 작은 항아리만 해져 있었어요. 집 마당도, 뒷산도 좁다 하던 녀석이 유골함 속에 어찌 그리 얌전히 들어 있는지…. 잔디의 사십구재 중 초재를 지내며 온 가족이 목 놓아 울었어요.”그의 말엔 아직도 슬픔의 물기가 어려 있다. 그는 잔디의 사십구재를 지낼 때까지 매일 그림일기를 쓰려 한다.


1 70세 넘어 붓을 잡기 시작한 한숙자 씨는 개인전까지 연화가다. 그의 작업실에 앉은 여래.
2 마당 있는 집이야말로 반려견들의 놀이터다. 
3 여래 또한 유기견이었던 두 달배기 꼬마다.
4 순수한 영혼끼리는 통한다.오한숙희 씨 조카와 여래.


평범한 대한민국 가족이 그러하듯 이 가족도 오랫동안 마당에서 잡종 개를 키우며 ‘개는 개다’생각하고 살았다. 전에는‘개 한 마리 죽은 걸 가지고 왜들 저리 호들갑일까’ 내심 생각하는 평범한 가족이었다. 호두 껍질처럼 닫혀 있던 이들에게 ‘잔디’라는 작은 구멍이 뚫리면서, 이들은 세상의 아름다움과 사람들 마음을 좀 더 이해하게 됐다. “온전히 가족들을 사랑하다 떠난 잔디는 우리 식구들에게 모든 생명은 존엄하다는 걸, 관념이 아닌 현실로 느끼게 해주었어요. 개는 그저 개가 아니라 나와 똑같은 생명체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말 이외의 모든 걸로 오롯이 교감하고 소통하는 존재다, 생각하게 됐어요. 잔디가 준 선물입니다. 이제야 우리 가족은 제대로 된 생명을 알게 된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우월감에 젖은 채 그 생명들을 바라본 것이었습니다.”그의 말에 부드러운 털뭉치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마음이 뻐근해진다. 잔디는 그런 녀석이었다. 여백 가득한 아이 같기도 하고, 세상의 모든 비밀을 다 알아버린 노인 같기도 한. 처마처럼 드리운 눈꺼풀 안에는 온 우주가 담긴 듯했다. 이웃 꼬맹이들이 지분거려도 그 장난질을 다 받아주던 어른 같은 개. 사람에게 매달린다고 구박도 하고, 놀아준다고 공수표를 날려도 늘 한결같고 단단한 애정을 거두지 않던 개. 그 잔디에게 그의 어머니는 “어쩌다 이렇게 영리한 놈이 짐승의 몸에 갇혔니. 다음엔 꼭 사람 몸으로 태어나라”라며 불경을 읽어주곤 했다. 잔디는 원래 방송인 허수경 씨가 4년 동안 살뜰히 키우다 아파트로 이사 가면서 할 수 없이 오한숙희 씨 가족에게 맡긴 개였다. 그 후 5년 동안 이 가족과 살면서 그들에게 생명이 생명을 대하는 방법, 생명에 대한 예의를 가르쳐줬다. 발달 장애가 있는 오한숙희 씨의 딸과 유난히 마음을 나눈 친구이기도 하다. 말을 잘 못해서 눈빛과 표정으로 대화하는 딸은 특히 잔디와 의사소통이 잘됐다. 이 대목에서 오한숙희 씨가 한 블로그에 올린 글이 떠오른다. “생명은 진심을 곧장 느끼는 능력이 있나 봅니다. 인간은 겹겹이 막을 쓰고 있고, 그 막을 뚫어보는 눈이 웬만하면 트이지 않지요. 세상에 적응해 살아가면서 아이의 눈을 잃어버리지요. 마치 어릴 때는 보였던 토토로가 어른이 되면 안 보이는 것처럼. 그래서 잔디 녀석은 말 그대로 맹인 안내견입니다. 사람 볼 줄 모르는 저를 안내합니다.”
잔디를 잃고 가족들은 눈물 바람으로 약을 삼는 대신 새로운 생명으로 상처를 보듬었다. 한국동물구조관리협회에 임시 보호 중이던 유기견 여래, 담덕, 덕만을 새로운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잔디의 죽음을 함께 슬퍼하던 임순례 감독이 누군가 입양하지 않으면 안락사당할 처지에 있는 리트리버 이야기를 건넸고, 그중 세 마리가 이 집 식구가 됐다. 막둥이 여래는 1월 22일 동물구조관리협회에 발견될 당시 심한 영양실조로 구루병을 앓고 있었다. 게다가 ‘고관절 이형성’이라는 기형으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이런 여래를 데려오기 위해 가족회의까지 열었다.

(왼쪽) 잔디의 유골함. 땅이 녹아 수목장 하기 전까지 오한숙희 씨가 글을 쓰는 거실 앞에 두고 있다. 
(오른쪽) 잔디 대신 이 집 막내가 된 여래. 호기심이 많은 녀석이다.


일어서지 못하니 대소변은 누가 받아낼 것인가, 어떻게 병구완을 할 것인가를 상의했다. 여래는 4.1kg으로 동물병원에 입원했다가 6일 만에 5.8kg으로 퇴원하는 ‘병상 투혼’으로 가족들을 안심시켰다. 지금은 다리를 좀 절뚝이지만 ‘어린이 개’답게 발발하게 뛰어논다. “담덕이는 태어난 지 열 달, 덕만이는 다섯 달, 여래는 두 달 된 녀석이니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처럼 잔디가 점점 젊어지고 있는 거예요.
이 아이들이 크는 동안 잔디는 몸을 벗고 자유롭고 멋진 영혼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기도해요.” 세상엔 진 꽃보다 꽃망울 터뜨리려 하는 봄꽃이 더 많은 것처럼, 가족으로 보듬어야 할 어린 동물이 더 많다는 걸 이들을 통해 깨닫는다. 잔디가 무지개 다리를 건넌 후 오한숙희 씨는 동물 보호 시민단체 ‘카라 KARA’ 활동에 참여하게 됐다(임순례 감독이 카라 대표를 맡고 있다).“허수경 씨가 처음 엄마이고 제가 나중 엄마로서 잔디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 둘이 카라 이사가 되기로 했어요. 잔디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이사 가면서 우리 엄마들을 카라로 이사시킨 셈이 되었지요.” 담덕, 덕만, 여래를 입양하는 과정에서 카라의 많은 도움도 받았다. 이 새로운 인연도 모두 잔디 덕에 이어졌으니 잔디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잔디가 떠날 즈음 출간한 책 <너만의 북극성을 따라라>의 초판 인세를 카라에 기증했다.
잘 빨아 말린 광목 같은 햇살 아래 여래가 순하게 앉아 조는 오후, 사람도 동물도 순하게 사는 세상을 떠올리며 ‘잔디네 가족’을 떠나왔다. 오한숙희 씨가 블로그에 올린 글 한 구절, 여러분에게도 선물로 전하며. “제가 글을 쓰는 이 거실 창밖에 잔디가 있습니다. 늘 그랬듯이. 다만 이제는 뼛가루로 함에 담겨 있지요. 그러나 여전히 순한 눈으로 웃고 있습니다. 영원히 그럴 것입니다. 제 눈에는.
집 마당에 쌓인 눈에는 잔디의 노란 오줌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눈이 녹아도 우리 집 마당의 눈은 안 녹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심정은. 장기하의 노래처럼 ‘지금 사랑해. 당장 사랑해’…. 주위에 있는 가족과 모든 동물을 지금 당장 사랑하세요. 잔디가 제게 준 교훈을 나눕니다.”
 
(왼쪽) 고관절 이형성이라는 기형과 심한 영양 결핍 상태로 이 집에 온 여래를 위해 꼬박꼬박 약을 챙겨야 한다.
(오른쪽) 잔디가 떠나기 전인 12월 29일 카라 기금 마련 박재동 판화전에서 카라 회원들이 찍어준 사진.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