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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수녀가 회고하는 장영희 교수 우리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다 기적이더라
명수필가이자 영문학자인 ‘명랑소녀’ 장영희 교수가 5월 9일 더 좋은 세상으로 갔습니다. 친동기간 같았던 이해인 수녀가 그의 삶, 문학을 추억합니다. 희망을 크게 말하면 새봄이 더 빨리 온다고 믿었던 장영희 교수에게 위로의 시인 이해인 수녀가 보내는 고별가입니다.

생전에 친분이 깊었던 화가 김점선 씨는 풀밭에서 뛰노는 빨간 말을 그리고 ‘장영희의 말’이라면서 책 <김점선 스타일 2>에 실었다. 김점선, ‘Horse & Green’, 72.7×60.6cm, 캔버스에 유화

“살아 있는 것은 아픈 것/ 아름다운 것은 어지러운 것/ 너무 많아도 싫지 않은 꽃을 보면서/ 나는 더욱 사람들을 사랑하기 시작하지.// 사람들에게도 꽃처럼/ 향기가 있다는 걸 새롭게 배우기 시작하지.” 내 시 ‘꽃 멀미’의 한 구절처럼 꽃과 같이 향내 나던 영희를 보내고 이 글을 씁니다. 살아 있는 건 아프고도 아름다운 거라고 삶으로 말하던 영희를 위해.
영희와의 첫 만남은 2001년으로 거슬러 오릅니다. 아, 그보다 먼저겠네요. 1980년대 말, 독자인 장순복 님(영희의 여동생)이 노란 수선화를 들고 내가 일하던 명동 가톨릭회관에 찾아왔습니다. 그때 장영희 교수의 영문 수필집도 함께 건네주었지요. 그 후로 생기 있는 영희의 글에 매번 감탄하며, 늘 궁금해하다가 20년 만인 2001년 샘터사의 주선으로 처음 만났습니다. 내숭 떨지 않고 매사에 명랑 솔직하고 활달한 면이 많이 닮아, 계속 만날 인연이라는 걸 금세 알 수 있었지요. 그리고 종교가 같은 것, 영문학을 전공한 것, 독신녀인 것, 보기보다(!) 활달하고 말씨가 빠른 것, 누가 무슨 선물을 필요로 하는지 잘 분별해내는 것, 예쁜 스티커 같은 물건 좋아하는 것… 다른 공통점도 많아 금세 친동기간처럼, 친구처럼 지내게 됐습니다.
나는 부산의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원에, 영희는 서울의 교수 연구실에 파묻혀 살기 때문에 자주 왕래할 순 없었지만, 늘 그 물리적 거리를 아쉬워하면서 전화나 이메일로 다붓한 정을 나눴지요. 내가 서울에 오면 영희의 연구실에 들르거나 분위기 좋은 식당, 아니면 ‘신수정 교수의 식탁’(전 서울대 음대 학장인 소프라노 신수정 선생의 식탁에 장영희 교수, 이해인 수녀, 김점선, 윤여정, 장명수 씨 등 지인들이 자주 모여 교분을 나눴다)에서 못 다한 정을 다독이곤 했습니다. 2004년 7월 26일 ‘신수정의 식탁’ 이동 방명록을 보니 이렇게 적혀 있네요. “근래 가장 기뻤던 일: 장영희 마리아 옆에서 말을 그리다(강요에 의해서)_김점선” “수녀님 사랑합니다. 마음에 기쁨 소망 가득 담아…_장영희(그 옆에 장미꽃을 그림)” “내가 본 나이 든 여자 중에 제일 예쁜 여자 이해인 수녀님과 신촌 프로방스에서 김점선, 장영희, 김성구, 조우석, 이나리와 저녁을 먹었음_조영남”. 우린 소녀처럼 굴러가는 낙엽만 보고도 깔깔, 랄랄, 호호, 재잘거리며 별나게 행복해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삼총사처럼 지냈던 영희와 점선, 해인 수녀가 언젠가 함께 찍은 사진이 있는데, 점선이 “같은 날 죽어서, 손잡고 하늘나라 가서 같은 반 되면 오죽 좋으랴!”란 글을 낙서처럼 썼었지요. 그리고 그 사진을 보며 점선이 말했지요. “이해인 수녀 발목이라도 잡고 천당에 따라 올라가야지. 이 사진을 천당 문지기한테 보여주고 넣어달라고 떼써야지. 우린 한 반, 같은 반 해야 한다고!”


<행복> 2005년 12월호 ‘귀 기울여 들어보니’ 칼럼에서 만났던 장영희 교수.

‘한 반 친구’였던 우리는 사이좋게도 모두 암과 만났습니다. 영희가 척추암에 걸려 고생하는 게 ‘짠해’ 30년 만에 병원을 찾은 점선이 난소암 말기 판정을 받고 나서, 영희에게 “축! 암”이란 문자를 보냈다더군요. 자신도 암이니 축하해달라고요. 두 사람은 암을 불행이 아니라, “권태에 늘어져 있던 내게 번개를 내리꽂은 축복” “몸의 소중한 발견”이라고 했다지요. 2005년 12월 <행복이 가득한 집>에서 영희를 인터뷰했던 글을 보니 이런 말이 나옵니다. “암 투병 중인 어떤 노래 강사가 이렇게 말해요. ‘암이 안 걸렸으면 좋겠지만 누군가 걸려야 한다면, 사랑하는 누군가가 걸려야 한다면 차라리 내가 낫다. 내가 제일 잘 참으니까’라고요. 저도 생각해보니 제 스케줄이 제일 널널해요. 어머니나 생때같은 동생들보다 제가 아픈 게 훨씬 편한 것 같아요.” 영희는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긍정의 에너지를 가진 사람. “암을 경험하고 보니 호두 껍질처럼 닫혀 있던 자신에게 작은 구멍이 뚫려, 세상의 아름다움과 사람들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됐다”는 영희의 말에서 많은 걸 깨닫습니다.
그 후 나도 암 판정을 받고 나서 ‘암에 걸렸다’고 점선에게 문자를 보냈더니 “암을 상대해주지 않으면 골목길에서 졸다가 가버리겠지!”라는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영희에겐 차마 알리지도 못했지요.
하늘나라에서도 한 반 하자던 점선이 올 3월, 영희가 5월, 둘은 먼저 강을 건너갔네요. 제일 나이 많은 나만 남고. 내 책의 독자들은 절더러 두 사람 몫까지 살라 하지만…. 두 사람의 씩씩함을 본받아 나도 잘 투병해봐야겠다고 생각합니다.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내 사람, 영희 영희는 ‘살아 있음의 향기를 온몸으로 피워 올리는, 꽃나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40℃가 넘는 고열에 시달리면서 생후 1년 만에 소아마비가 된 영희는 ‘운명처럼, 십자가처럼’ 어머니 등에, 목발에 업혀 평생을 살았습니다. 영희를 화장실에 데려가기 위해 두 시간에 한 번씩 어머니가 학교를 들락거려야 했던 인생, 우수한 성적으로 도전한 박사 과정에 “우리는 학부 학생도 장애인은 받지 않는다”는 통보를 받고 “이 사회에서는 내가 바로 킹콩이라는 것. 사람들은 단지 내가 그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미워하고 짓밟고 죽이려고 한다. 기괴하고 흉측한 킹콩이 어떻게 박사 과정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내 생애 단 한번> 중)라고 생각하는 인생. 그런데도 그는 이 삶의 통증을 희망으로 바꾸는 비범한 재주가 있었습니다. “수녀님, 해마다 장애인의 날이 되면 제가 홍보용으로 자주 불려 다녀요!” 하며 깔깔 웃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희망,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희망, 그 희망의 사람, 영희.
언젠가 김점선이 풀밭에서 뛰노는 빨간 말을 그리고 ‘장영희의 말’이라 했었지요(이 그림은 <김점선 스타일 2>의 ‘장영희 교수’ 편에 실렸다). 뛰어가려고 엉덩이를 쭉 빼고 갈기를 휘날리며 코를 벌름거리는 귀여운 말. 금방이라도 뒷다리를 펴고 벌떡 일어날 듯한 이 말은 영희를 참 많이 닮았습니다. 영희는 글에 “그보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바로 저 표정,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듯한 표정 때문에 이 예쁜 빨간 말이 내 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라고 썼지요. 알큰한 숨결로 눈을 녹이며 피어나는 꽃처럼, 그렇게 환하게 웃던 영희.

(위) 이해인 수녀가 여덟 살 위였지만 서로 친구같은 사이였다고 한다.

다시 읽는 영희의 글이 내 마음에 물결을 일으킵니다.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게 많이 넘어져봤기에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살아 있음’의 축복을 생각하면 한없이 착해지면서 이 세상 모든 사람, 모든 것을 포용하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가슴 벅차다. 그러고 보니 내 병은 더욱더 선한 사람으로 태어나라는 경고인지도 모른다.”(<문학의 숲을 거닐다> 중)

솔직하고 평범해서 비범한 작가 장영희 영희야말로 ‘쓰고 싶어도 어렵게 못 쓰는 재주’를 가진 정말 비범한 작가였습니다. 무엇보다 미사여구로 실속 없이 치장한 글이 아니라, 교훈을 주려 하지 않고 체면을 차리지도 않는 글, 너무 솔직해서 ‘나와 가까워지는’ 글을 썼습니다. ‘내가 자랑할 것은 약점밖에 없다’면서, 내숭 떨지 않고 다 말하는 그 솔직함은 누구에게나 통쾌함과 호감을 안겨줬지요. 나는 아직도 수녀라는 신분 때문에 그런지, 체면을 좀 의식하면서 글을 쓰는 편입니다. 사실 작가가 완전히 솔직한 것도 쉽진 않지요. 그래서 영희가 더 대단해 보이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진통의 삶을 살면서도 그 고통 안에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고통을 겪는 다른 이에게 깊은 연민을 갖고 글을 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글을 읽으며 작고 소심하고 웅크린, 그러나 착한 자신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영희의 글을 읽고 나면 오래 기도하고 난 후의 위로 같은 걸 받곤 했지요. 나 역시 그의 충실한 독자였지요. 특히 산문집 <내 생애 단 한번>과 영미시 산책 <생일>과 <축복>을 좋아합니다. 딱히 한 문장을 꼽기보다 작가가 책을 낼 적마다 적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생동감이 있어 즐겨 봤습니다. 이번 책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샘터)도 그것부터 찾아 읽고 눈물 흘렸지요.


아버지인 번역학자 장왕록 교수와 딸 장영희 교수. 아버지는 딸이 사회로 잘 걸어나갈 수 있게 투쟁가로 살았다고 한다.

영희가 아버지(저명한 영문학자이자, 우리나라 번역 문학의 태두로 알려진 장왕록 서울대 명예교수로, 이 부녀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스칼렛> <살아 있는 갈대> 등을 공역했다)의 10주기 기념집을 위해 번역한 <귀부인의 초상>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이사벨, 결국 고통은 사라진다. 그러나 사랑은 남는다.” 그 글 뒤에 영희는 “그렇다. 육신은 사라지지만, 결국 추억은 남고, 그 추억은 오기와 분노를 이기고 사랑으로 영원히 남는다”라고 썼습니다. 또 새뮤얼 버틀러의 말 “잊히지 않는 자는 죽은 것이 아니다”를 인용하면서, “떠난 사람의 믿음 속에서, 남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삶과 죽음은 영원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끝맺었습니다.
영희는 환부를 덮어주는 듯한 또 하나의 책을 남기고 갔습니다. 바로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입니다. 그의 표현대로 영희가 지금까지 살아온 나날이 기적이었다면, 이제 살아갈 기적은 우리 몫입니다. 물론 영희에게도 하느님 나라에서 살아갈 기적이 있겠지요.

삶이 신의 선물인 것처럼 오늘 아침, 장순복 님(영희의 여동생)이 영희의 유품 중 영희가 강의 다닐 때마다 갖고 다니던 하트 시계, 작은 대리석 박스, 천사 휴대폰 고리를 보내왔습니다. “늘 영원으로 이어지는 순간을 살고자 했던 언니를 상징하는 물건인 것 같아 보내드려요”라는 글과 함께. 평소에도 남에게 선물 보따리 안기길 즐기던 영희, 수녀인 내게 꽃무늬 잠옷을 선물해서 날 기쁘게 했던 영희, 이제 하늘의 천사가 된 영희가 땅에 있는 내게 주는 선물인가 봅니다. 그런 영희에게 난 영희가 바라던 결혼 축시는 못 써주고, 대신 영희를 보내는 고별시를 쓰고 말았습니다. “그대가 어느 봄날/ 나에게 그려준/ 순정만화의 주인공처럼/ 맑게 밝게 순결하게 살아온 영희// 수녀님의 축시를 받기 위해/ 결혼을 할까 보다 하고/ 웃으며 고백했던 영희.”


여동생 장순복 씨가 유품과 함께 보낸 편지, 천사를 좋아한 장 교수에게 학생이 선물한 인형.

영희가 엄마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에서 나는 또 다른 선물을 만났습니다. “엄마, 미안해. 이렇게 엄마를 먼저 떠나게 돼서.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 찾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 속도 썩였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엄마,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더 기다리면서 나중에 다시 만나.” 맞아요. 이 아름다운 세상….
요즘 가끔씩, 영희가 다리 때문에 못 입었을 원피스나 꽃 치마를 차려입고 웃는 환영을 보게 됩니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 사후에 베스트셀러가 된 걸 기뻐하면서. 지금 바닷가에 나가 영희 이름을 부르려 합니다. “영희, 사람이 죽어 물에 뿌려지고 결국 물이 되어버린다면 윗물과 아랫물은 같은 물인 거지? 죽음도 아니요, 삶도 아니라고 이 물이 말해주는 것 같아.” 이제 나도 받아들여야겠지요. 삶이 신의 선물인 것처럼 죽음도 또한 신의 선물이라는 것을. 우리가 살고 죽어가는 하루하루가 다 기적이라는 것을.
“지난번보다 훨씬 강도 높은 항암제를 처음 맞는 날, 난 무서웠다. …지저분한 얼룩마저도 정답고 아름다운 이 세상, 사랑하는 사람들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 세상을 결국 이렇게 떠나야 하는구나. 순간 나는 침대가 흔들린다고 느꼈다. 악착같이 침대 난간을 꼭 붙잡았다. 마치 누군가가 이 지구에서 나를 밀어내듯. 어디 흔들어보라지, 내가 떨어지나. 난 완강하게 버텼다. …언젠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어느 학생이 내게 물었다. 이런 허망한 희망은 너무나 비참하지 않느냐고. 그때 나는 대답했다. 아니, 비참하지 않다고. 밑져야 본전이라고. 희망의 노래를 부르든 안 부르든 어차피 물은 차오를 것이고, 그럴 바엔 노래를 부르는 게 낫다고. 갑자기 물때가 바뀌어 물이 빠질 수도 있고 소녀 머리 위로 지나가던 헬리콥터가 소녀를 구해줄 수도 있다고. 그리고 희망의 힘이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듯이 분명 희망은 운명도 뒤바꿀 수 있을 만큼 위대한 힘이라고.”(<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에필로그 중)


장영희 교수의 삶은 <내 생애 단 한번> <문학의 숲을 거닐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축복> <생일>과 여러 권의 번역서로 세상에 남았다. 생전에 장영희 교수가 이해인 수녀에게 선물한 기도 항아리.

정리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