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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기울여 들어보니]배우 전무송 씨 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바로 행복이구나
그가 연극에 바친 47년의 시간은 참으로 희귀한 것입니다. 밥도 안 되고 집도 안 되는 일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그는 여전히 더 좋은 연기를 관객 앞에 내놓고 싶어 대본이 닳아질 때까지 들고 다닙니다. ‘연극 시대의 부활’을 알리는 명동예술극장 개관 기념 공연 현장에서 그 뜨거운 예순아홉 살을 만났습니다.


명동예술극장 재개관 기념 공연인 <맹진사댁 경사>에서 그는 반전을 준비하는 인물 ‘김명정’ 역을 맡았다. <맹진사댁 경사>는 1969년 실험극단이 국립극장(지금의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해 큰 인기를 모은 공연이다.

인생은 각운에서 힘을 줘 읽어야, 아니 노래해야 하는 시인지도 모릅니다. 분장실에서 대본에 몰입해 있는 그의 옆모습을 보며 생각합니다. 미간에 큰 주름을 잡고 있지만 그 얼굴은 세상의 모든 걸 다 보아버린 사람의 것처럼 평온합니다. 저렇게 아름다운 눈그늘은 노년을 제대로 갈무리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인기척을 느낀 그가 첫낯의 우리에게 다감한 표정으로 웃어 보입니다. 우리도 덩달아 웃습니다. 그것 말고 다른 건 할 수 없는 것처럼.
‘명동 연극 시대의 부활’이라는 레테르를 매단 ‘명동예술극장’의 재개관 공연 <맹진사댁 경사>를 앞두고 그를 만났습니다. 1962년부터 시작된 연기 인생이니 반세기 동안 헌신한 배우의 시간입니다. 고작 한나절의 공부로 철학을 깨달은 척하는 허깨비 천지의 세상에서 그가 연극에 바친 47년의 시간은 참으로 희귀한 것입니다. 현역 배우 중 이순재(1934년생), 신구(1936년생) 다음으로 최고령이라는, 올해 예순아홉 살의 배우 전무송 선생입니다.
그가 들려준 ‘전무송의 일대기’는 이렇습니다. 1941년 인천 태생, 가난한 어부 집안에서 자란 3남 4녀 중 장남, 야구선수를 꿈꿨으나 선생님의 회유로 ‘수재 전문’ 명문 인천중 입학, “우리나라가 잘살려면 농업과 공업에 젊은이들이 몸을 바쳐야 한다”는 길영희 교장의 훈화를 듣고 인천공고 입학, 밴드부에서 클라리넷 잘 불고 인물 좋아 여고생들 애간장 녹였던 고교 시절, 한양공대에 합격했으나 등록금이 없어 포기하고 들어간 인천 기계공작창, 깎인 쇳가루가 하루아침에 녹스는 걸 보고 자신의 인생도 녹스는 것 같아 일주일 만에 그만둔 이야기, 서울신문 인천지국에 수금 사원으로 들어갔다가 지국장이 준 연극표 <햄릿>으로 뒤바뀐 인생 목표, <햄릿> 역의 김동원 선생처럼 훌륭한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들어간 드라마센터 연극아카데미, 신구・이호재 씨와 함께 누빈 연극아카데미 생활….
“그게, 처음엔 연극배우보다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영화배우 되면 돈 번다는데, 그러고 또 뭐야, 여학생도 많이 따른다는데. 허허. 그런 허영심에 배우가 되겠다 했지. 뭐, 특별히 연극 공부한 적도 없으니 연극 맛을 몰랐잖아. 괜히 허영심에 충무로 가서 휘적휘적 돌아댕기며 방황하다 오는 거고. 그러다 <햄릿>을 봤는데… 아, 이걸 해야 될 거 같아. 연극을 해야 배우라는 내 뜻을 이룰 거 같더라고. 이렇게 시작한 건데, 그 허영심이라는 것 안에도 자길 표현하고 싶어 죽겠는 DNA가 있는 거 같아.”


큰 배우가 되려면 ‘허영’과 ‘건성’으로 시작한 연극은 그의 광포한 젊음을 휩쓸었습니다. 연극 <소>의 대사 한마디짜리 역할로 첫 무대에 섰지만 연출자 오사량 씨가 “너 같은 녀석이 무슨 연극이냐? 꼴도 보기 싫으니 때려치워”라는 폭언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당대 연출가들의 인정을 받은 후에도 <생일파티> 공연에서 유덕형 연출가(유치진 선생의 아들)가 “느낌이 없다, 사극조”라 혹평하면서 동기생인 신구의 ‘언더스터디’(임시 대역)를 시키기도 했습니다. 이해랑 선생에게선 “내면이 없어. 다 멋있는데 내면이 없어”란 말도 들었습니다.
<생일파티> 개막 전날 밤 언더스터디라는 것에 울분을 참지 못해 난동을 부린 그를 유치진 선생이 불러 맵게 나무랐다고 합니다. “‘큰 배우가 되려면 먼저 인간이 되라. 훌륭한 배우가 되려면 그 사람이 먼저 진실해야 주인공이 생각하고 겪는 내용을 충실하게 전할 수 있다. 연기는 시원찮으면서 가슴만 뜨거워도 안 된다. 그러려면 네 뼈를 깎아라. 연극배우는 몸에서도 연극 냄새가 나야 한다.’ 이러셨어. 그 말씀에 사생활 깨끗이 하고 양심에 때 묻지 않게 살려고 노력이라도 하게 된 것 같아. 그게 좋은 배우가 되는 길이라니까.” 여기까지 말하는데, 삶에 흠씬 두들겨 맞고 돌아온 사람만의 그늘이 보입니다. 큰 스승은 제자에게 위로도 함께 했습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이 있다. 그건 관객으로 하여금 연민을 느끼게 하는 느낌이니, 잘 기억해라.” 그 후 각혈하듯 인물을 들이파고 탐구했습니다. 동랑극단, 국립극단, 실험극장을 거치며 가시풀더미 같은 연극 인생이 이어졌습니다.
이런 추운 곡절 끝에 그가 반세기 가까이 연기한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고도를 기다리며> <하멸 태자>와 영화
<만다라>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백치 아다다>…. 그리고 축포처럼 터진 이해랑 연극상, 대종상 남우조연상, 영화평론가상, 백상예술대상 연기상, 한국연극예술상, 동아연극상. 올해로 데뷔 45년이 된 배우의 일대기입니다.
“나중에 이해랑 선생님이 내 연극 보시고 분장실에 오셔서 ‘무송이 이제 내면이 생겼어’ 하면서 맥주 한잔 사주시는데 얼마나 기쁘던지. 선생님 돌아가신 후에 내가 이해랑 연극상 받았는데 ‘이 상 받아, 이제 받을 자격이 된다’고 말씀해주시는 거 같아 더 기뻤어요.”
그는 튀지 않는 대사법과 절제된 동작 때문인지 사색적이고 묵직한 연기가 잘 어울리는 배우라는 평을 받습니다. 똑 같은 아버지 연기를 해도 신구 선생은 고집불통 어른에게 야단맞는 묘한 즐거움을 준다면, 전무송 선생은 헤어진 아버지를 보는 것 같고 노스탤지어의 그림자가 비치게 합니다. 스승 유치진 선생의 말처럼 그는 ‘관객으로 하여금 연민을 느끼게 하는’ 분위기를 가졌나 봅니다. “물론 나도 돈 주앙도, 신숙주도 하고 강한 역을 많이 했지만 그 강한 역도 항상 갈등하는 인물형이었어. 겉으로는 강하게 내뱉지만 속으로는 응어리가 져서 해결 못하는 인간.” 그건 아마도 온수처럼 상대방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그 성정과 관계 있는 것 같습니다.
영화 <만다라>를 찍으면서 스크린과 TV로 운신의 폭을 넓힌 후에도 그는 본향인 연극에 대한 마음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귀거래사>의 한 대목 “새는 날다가 지치면 돌아올 줄 안다”처럼 몇 년에 한 번씩은 꼭 고향인 연극판으로 돌아왔습니다. 미인대회 출신으로 갑자기 스타가 된 젊은 배우들은 웃을 이야긴지 모르지만, ‘연극은 영화나 드라마의 모태 같은 거’라서 떠날 수가 없답니다.


그는 아직도 대본을 받아 들면 연기하려는 상이 떠오를 때까지 탐구하고 기다린다. 연극에 등장하는 상황과 등장인물의 반응 방식까지 충분히 소화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연기가 시작된다. 그래서 그를 두고 ‘텐션 tension의 배우’라는 평이 나온다. 함께 배우의 길을 걷고 있는 딸 전현아 씨가 아버지의 연습 현장에 함께했다.

“연극이 숙명이라 어쩔 수가 없어” 그도 물론 나이 서른줄에 첫사랑 이기순 씨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는 평균적인 삶도 살았습니다. “내가 연극한다고 생활 감당을 못하니까 마누라가 피아노 레슨도 하고, 남대문시장에서 옷장사도 하고, 광명시에서 양품점도 하면서 뒷바라질 했어요. 어느 날 집에 갔더니 집사람이 시집올 때 해 온 피아노가 실려 나가는 거야. ‘어떻게 된 거냐’ 했더니 ‘그동안 뭐 먹고 살았는데?’ 해요. 그날 내가 연극 안 하겠다며 대본을 던졌어요. 마누라가 대본을 가만히 집어주면서 ‘난 배우 전무송하고 결혼했지, 장사하는 전무송하고 결혼한 건 아니다’ 하는데, 내가 한마디도 못하고 다시 연습실로 갔어요. 우리 마누라가 좀 바보야. 똑똑한 사람 같으면 다 도망갈 텐데 그 고생을 하면서 가만히 쫓아다니는 걸 보면. 허허.”
‘연극하는 이들은 연극이 바로 숨 쉬는 의미이고 숙명이어서, 생활에선 반쯤 금치산자여도 어쩔 수가 없다’는 말에 슬쩍 반발하고 싶은데, 이 말 한마디가 날 누그러뜨립니다. “우리 마누라는 남편이 연극하는 게 자랑스럽대. 자긴 시장에서 장사를 해도 남편이 배우여서 늘 당당했대.” 좋은 남자 뒤에는 더 훌륭한 여자가 있는 법입니다.
자식이 승업 承業하는 것만큼 큰 효도가 없다고 하지요? <여인천하>의 금이 역으로도 유명한 배우 전현아 씨도, 아들 전진우 씨도, 또 사위 김진만 씨(<호랑이 선생님>의 아역 배우였고 지금은 연극 연출가로 활동)도 모두 연극에 투신해 있습니다. “마누라도 일을 하니 아기 맡길 데가 없어서 현아를 연습장에 데리고 다녔어요. 누가 얘를 보고 ‘야, 니네 아빠 탤런트지?’ 물으면 ‘아니야, 우리 아빠 연극배우야’ 할 정도로 그렇게 연극배우에 대한 동경과 존경이 있었던 것 같아.” 극장에서 뛰놀던 딸은 ‘극장의 탄 듯하고 퀴퀴한 냄새가 좋아’ 배우가 됐답니다. 1999년 <하회의 한>으로 동서희곡문학 신인작가상을 받고, 직접 쓴 <종이꽃>으로 연출가 데뷔도 했습니다. 연극 <상당한 가족>에서는 사위가 연출하고 전무송 씨가 아들딸과 함께 출연해 ‘연극 가족’의 진가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같은 길을 걷는 자식들 이야기에선 그가 말을 아낍니다. 그러나 가끔씩 “하려면 제대로 해라. 그렇지 않으면 관둬” 라는 말로 그 마음 한 자락을 엿보게 합니다.



제대로 보고 듣고 느껴야 진짜 사람 한국 영화가 하늘로 오르는 잭의 콩나무처럼 호황일 때 스님 역은 그가 거의 도맡았습니다. <만다라> <아제 아제 바라아제> <원효 스님> <산산이 부서진 이름>…. 그래서인지 그는 법문 같은 이야기를 일상처럼 나눕니다. ‘자신을 깨라’ ‘깨끗한 물이 되어라’ ‘제대로 사물을 보라’ ‘느껴라’ 등의 명령어들. 특히 주연을 맡았던 영화 <만다라> 속의 유명한 대사를 가장 좋아한다고 합니다. “백척간두에 서봐. 그리고 거기서 한 발 내디뎌. 부디 견성하거든 나도 제도해주게(백 척 장대 끝에 앉아 있는 사람이 설사 경지에 들었다고 할지라도 아직 참된 것은 아니다. 백 척 장대 끝에서 반드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다 알면 무슨 재미로 사나, 투덜거리면서도 자꾸 그의 말을 듣게 됩니다. 정말 그는 연기를 통해 세상과 인생과 운명을 깨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스님들 사리처럼 몸속에서 만들어진 철학이라고 할까요.
“유치진 선생님 말씀이 평생 숙제야. ‘큰 배우가 되려면 좋은 인간이 먼저 되라’. 내가 아직 훌륭한 배우가 못 된 건 훌륭한 인간이 안 되어서야. 그 숙제 풀이를 지금까지도 해오고 있는 거지. 진실한 인간이란 게 뭐야. 지켜야 할 사람, 책임져야 할 일, 해야 할 의무를 스스로 우러나서 하는 사람을 인간답다 하잖아. 그러기 위해선 세상 모든 사물을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듣고 제대로 느끼고 제대로 해야 되지 않나? 보고 듣고 느끼는 건 누구나 다 하지. 하지만 그걸 제대로 해야 된다는 거야. 그럼 제대로라는 건 또 뭐냐. 그것도 영원한 숙제인 거야. 그게 풀려야 숙제를 다 한 건데, 그러고 나면 아마 성인이 되겠지. 허허.”그의 말은 부드러운 털 뭉치로 생각을 두들겨 때리는 듯합니다. 바로 말랑말랑한 힘.
좋은 사람들의 세계를 동경하면 내 삶도 은연중 그들을 닮아 속되지 않게 된다고 믿는 그는 임권택 감독, 정일성 촬영 감독, 소설가 한승원 선생, 배우 이호재 씨, ‘다정 茶亭’이란 법명을 지어준 지관 스님, 법륜 스님 등과 두터운 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모두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함이라지요.

내 인생, 불후의 명작처럼 연기에 헌신한 반세기였지만 그동안 그는 6개월에 한 번씩 사글셋방을 찾아 스무 번이나 이사 다니고 임대아파트에 들어가 살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성공한 인생이랍니다. “우리 집사람 하고 이런 이야길 한 적이 있어요. 우리 소원은 방 한 칸이었는데, 방 한 칸이 이뤄졌으니 성공한 거라고. 작은 방 한 칸이지만 거기서 행복을 느낀다면 그게 성공한 거라고. 그러면서 또 깨달았지. 아, 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바로 행복이구나.”
연기만 하면서 머리 위에 구름을 얹고 살아온 동안 그가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허무감만 쌓아놓은 노년은 그에게 없는가 봅니다. 아직도 그는 대본을 받아 들면 목욕도, 좋아하는 술도, 약속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연기하려는 상이 떠오를 때까지 어두운 방 안에서 연구하고 기다립니다. 여전히 더 좋은 연기를 내놓고 싶어 갈급해합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세상이 필적할 수 없는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이렇게 밥도 집도 안 되는 일에 일생을 헌신한 그야말로. 이제 그에게 ‘불후의’ ‘거대한’ 같은 형용사를 헌정하고 싶어졌습니다. 새경도 없이 밭을 가는 농부처럼 연기해온 그 앞에. 역시, 인생은 각운에서 힘을 줘 읽어야 하는 시인가 봅니다.

“진실한 인간이란 게 뭐야. 지켜야 할 사람, 책임져야 할 일, 해야 할 의무를 스스로 우러나서 하는 사람을 인간답다 하잖아. 그러기 위해선 세상 모든 사물을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듣고 제대로 느끼고 제대로 해야 되지 않나?”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