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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컬렉터를 찾아서 세기의 컬렉터, 카몽도 가문을 추억함
유럽 명문가의 컬렉션을 살피면 그 가문과 나라의 영광과 쇠락의 역사, 그리고 유럽의 역사가 읽힌다. <행복>에서는 유럽 예술사의 큰 기둥을 담당한 명문가의 컬렉션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 첫 시작은 콘스탄티노플의 유대인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니심과 모이즈 드 카몽도 Nissim & Moise de Camondo의 컬렉션이다. 카몽도 가문이 남긴 모네, 마네, 드가를 비롯한 인상파 컬렉션과 18세기 프랑스 왕실 가구 컬렉션은 오르세 박물관의 가장 노른자위 전시실에 소장되는 영광을 누렸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아우슈비츠에서 마지막 자손이 사망한 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카몽도 가문의 비극적인 이야기, 모이즈의 집이 카몽도 박물관이 된 사연이 펼쳐진다.

1 루이 16세의 화가이자 부셰의 제자인 장바티스트 위에 Jean-Baptiste Huet의 그림 7점이 벽화처럼 걸려 있는 살롱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 살롱 안의 가구를 비롯한 장식품, 샹들리에 등이 모두 18세기 장인들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완벽주의자인 모이즈는 루이 16세 시대의 분위기를 재현하기 위해 루이 16세가 사용하던 병풍, 세브르산 도자기로 장식한 리센베르크의 탁자, 고블랭산 카펫,
마담 퐁파두르의 중국 도자기 컬렉션, 베르사유 궁에서 소장했던 세네의 의자 등으로 살롱을 가득 채웠다. 한 사람의 컬렉션치고는 엄청나게 방대한 양이다.
2 평생을 함께한 이삭과 모이즈의 어린 시절. 가족 관계가 돈독하기로 유명한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난 그들은 여느 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촌 형제였다. 비록 성격은 서로 달랐으나 이삭은 모이즈의 멘토 역할을 했다.


여느 부촌이 그러하듯 거리는 조용하다. 이 동네는 19세기 파리에서 제일가는 부촌 중의 부촌이었다. 특히 몽소 공원을 둘러싼 몽소 길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의 바로 그 세계다. 31번지에는 마담 마들렌 르메르의 살롱, 33번지는 몰리토 후작, 47번지는 로스차일드, 51번지는 은행가이던 르네 피리노, 69번지는 모파상 공작….
이 동네에 살았던 19세기 유명 인사들의 이름을 하나씩 꼽아보면서 63번지로 들어섰다. 하얀 화강암으로 지은 고전풍의 건물 때문에 앞마당에는 그림자가 깊숙이 드리워져 있다. 집 안은 무섭도록 고요하다. 18세기 베르사유 성을 본떠 검은색과 하얀색 대리석으로 마감한 바닥 위로 딱딱 발소리가 울려 퍼진다.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18세기식 계단 중간 참에는 루이 16세의 가구 장인 베르나르트 반 리센베르크의 작품이 놓여 있다. 검은색과 금색의 일본 자개를 붙인 이 작은 삼각형 모양의 가구는 루브르 박물관에 가야 한두 점 볼까 말까 한 귀한 작품이다. 유리창으로 스며든 오후의 강렬한 햇살 때문에 검은 자개에서는 반들반들 빛이 난다. 카를랑, 리센베르크, 히에즈네…. 전 세계 장식미술 박물관에서 탐내는 18세기 장인들의 가구가 가득한 집이다. 자신의 컬렉션을 사랑한 나머지 전용 하녀까지 두고 노트 한 권에 달하는 청소 관리법을 적어놓았다는 이 집 주인이 액자 속에서 웃고 있다. 연미복을 날렵하게 드리운 뒤태, 풍채가 지긋한 신사의 곁으로 활달한 딸 베아트리스 Béatrice와 호기심이 많았던 아들 니심 2세 Nissim이 계단을 뛰어오른다. 정갈하게 차려입은 하녀들이 아이들을 따르고, 흰 수건을 손에 두른 집사는 이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이 신사의 이름은 모이즈 카몽도, 이 집 주인이자 가장 방대한 규모의 18세기 가구와 오브제 컬렉션을 남긴 컬렉터다.


3 눈에 익은 그림이 즐비한 이 방은 이삭의 샹젤리제 아파트에 있던, 일명 ‘드가의 방’이다. 드가의 ‘세탁부’를 비롯해 모네, 르누아르의 그림이 걸려 있다. 피아노 건반을 짚어가며 작곡하던 이삭의 환영이 떠오르는 듯하다.

카몽도 가문은 19세기 콘스탄티노플에서 이름을 날리던 은행가 집안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왕 아래에서 정부를 위해 자금을 융통해주고 세금을 운용한 카몽도 가문은 엄청난 규모의 부동산을 소유한 동유럽의 거부였다. 당시 사람들은 카몽도 가문을 ‘동쪽의 로스차일드’(프랑스,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에서 은행 사업으로 부를 일군 유대인 가문, 로스차일드)라고 불렀다. 수에즈 운하 건설에 자금을 대며 승승장구하던 카몽도 가문이 파리로 이주를 감행한 것은 1869년이다. 터키에서 파리까지 전세 열차를 세내어 온 유럽을 떠들썩하게 한 카몽도 가문의 파리 이주에는 속사정이 있었다. 19세기 중반부터 다민족이 모여 살게 된 터키에서 유대인들은 점점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터키 일대에 반유대 정서가 심해지자 카몽도 가문은 서둘러 짐을 싼 것이다.


1 장바티스트 우드리 Jean-Baptiste Oudry의 그림 ‘루이 15세의 사냥’을 주제로 꾸민 작은 서재. 마리 앙투아네트가 퐁텐블로 성과 생클루 성에서 직접 사용하던 가구로 채워져 있다.
2 청나라 도자기에 프랑스식 브론즈 장식을 더한 18세기 도자기가 전원생활을 주제로 한 장바티스트 위에의 그림과 조화를 이룬다.



3 프랑스 왕실 도자기 작업장에서 만든 식기 세트는 모든 구성품이 보존된 희귀 작품이다. 이 식기 세트에 대해서만 10권 이상의 책이 출간될 만큼 아주 가치가 높다.
4 바로 이 식당에서 모이즈는 박물관 관계자와 회합을 가졌다.


여타의 유대인 집안과 달리 카몽도 가문은 자손이 귀했다. 선조 격인 살로몬 Salomon Rapha él Camondo에게는 아브라함 Abraham과 니심 1세라는 두 아들이 있었고, 이들에게는 각각 이삭 Issac과 모이즈라는 아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삭과 모이즈는 사촌 형제 지간으로 카몽도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는 셈이다. 18세와 9세에 파리에 도착한 두 사촌 형제는 여러모로 아버지 세대와 달랐다. 아버지 아브라함과 니심 1세는 겉으로는 세련된 유럽의 귀족과 다를 바 없었지만, 집안에서는 전형적인 유대인 가문의 수장답게 전통 유대교 규율과 예법을 지켰다. 유럽 상류 사교계에서 인간관계가 사업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단번에 파악한 이 두 가장은 사교계 명사들만 가입하는 조커 클럽에 회원으로 가입했고, 언론에서 ‘파리의 루이 15세’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로 가장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그러나 뿌리를 잊지 않았던 이들은 율법에 따라 유대교 명절을 지키고, 유대 교회인 시나고그를 건설하는 데 많은 돈을 기부했으며,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웠다. 결코 돈을 허투루 쓰지 않았으며 사업에 몰두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생활을 추억하는 아버지 세대에 비해 파리에서 자란 이삭과 모이즈는 뼛속까지 프랑스인이었다. 대부호의 휴양지인 비시에서 여름을 보내고, 문인과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자란 이들에게는 율법을 강요하던 아버지 그리고 사업이란 진저리 나는 기억일 뿐이었다. 특히 작곡가를 지망한 이삭은 집안의 상속자로서 당연한 의무 중 하나인 결혼을 거부했다. 엄격한 분위기에서 자란 고지식한 유대인 여자, 그것도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할 게 뻔한 정략결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오페라 댄서로 드가의 그림에 자주 등장한 마틸드 살 Mathilde Salle과 사랑에 빠져 자식을 두기도 했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
두 아버지가 1년 차이로 연달아 세상을 떠난 뒤에야 이삭은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 클래식 작곡가로 활동하며 파리 오페라 좌를 후원했고, 샹젤리제 극장을 혼자 힘으로 설립했다. 재미난 사실 중 하나는 이삭이 바그너의 예찬자였다는 점이다. 하필 독일의 영광을 예찬해 훗날 독일 제국주의의 표상이 되기도 했던 바그너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1 철두철미한 탐미주의자였던 모이즈는 계단 장식 하나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18세기 조각가 장 바티스트 피갈 Jean Baptiste Pigalle의 작품을 배치한 18세기풍 계단. 계단은 가족의 개인 공간이 있는 3층으로 통한다. 2 1927년 이삭이 구입한 이 분수대는 몽모랑시 숲의 샹티이 성에 소장되어 있던 분수대로 로코코 스타일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하인들이 드나들던 부엌 쪽 복도에 풍요를 상징하는 분수를 배치한 것은 식당에 분수가 필수이던 18세기 전통을 따른 것이다.


미술에 대한 취향에서도 이삭은 여느 대부호들과 달랐다. 그는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앞서간 인상파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어릴 때부터 미술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일본 판화를 400점 넘게 모으기도 한 그는 1892년 ‘드가의 부케를 든 발레리나’를 시작으로 드가 작품 30점을 연달아 사들였다. 드가가 소문난 반유대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지만, 자신을 유대인으로 생각하지 않은 이삭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지금은 오르세 박물관에 걸려 있는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과 모네의 ‘4개의 대성당’ 시리즈는 모두 이삭의 소유였다. 원예에도 해박한 지식을 자랑한 이삭은 모네의 집을 자주 방문해 정원 가꾸기에 대한 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세잔을 처음 알아본 인물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 이름도 유명한 인상파 전문 화상 볼라를 통해 세잔과 마티스, 고흐의 작품을 구입했다. 루브르의 후원자이자 아르데코 박물관의 후원자이기도 했던 이삭이 말년에 유언장을 통해 자신의 컬렉션을 루브르에 기증하기로 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부자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행동을 경멸하던 이삭은 사회적 영예가 따르는 루브르 후원회장 자리도 거절할 정도였으며, 그의 성격답게 컬렉션을 기증하는 데 일체의 조건을 붙이지 않았다. 박물관 내에 꼭 가문의 이름이 붙은 방을 만들고, 작품 옆에도 기증 현판을 달아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 로스차일드 가문과는 여러모로 비교되는 일이다. 사실 이삭의 이름이 미술사적으로 로스차일드만큼 유명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오르세 박물관의 유명한 인상파 작품이 이삭의 컬렉션에서 나왔지만, 이삭의 이름을 기억하는 관람객은 거의 없다.
이삭의 죽음으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이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며 이삭을 동경했던 그의 사촌 동생 모이즈였다. 모이즈와 이삭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장난기 넘치고 창조적이었던 이삭에 비해 모이즈는 온건하고 보수적 성격의 소유자였다. 컬렉션은 아무래도 컬렉터의 성격을 따라가기 마련인지라 이삭이 인상파 그림을 사들이는 동안, 모이즈는 루이 16세 시대의 가구와 도자기를 모았다. 사실 가업인 은행을 이어받을 만큼 건실한 아들이었던 모이즈가 본격적인 컬렉터의 길로 들어선 데에는 개인적인 불행이 큰 역할을 했다. 모이즈는 1872년 31세의 나이로 프랑스의 정통 유대인 귀족 집안 출신 이렌 Irene Cahen d’Anvers과 결혼했다. 물론 정략결혼이었지만 그들은 서로 사랑했다. 특히 모이즈는 19세의 아름다운 신부에게 부쉐론의 보석과 레이스, 모피를 아낌없이 사주었다. 신문에 보도되기까지 한 떠들썩한 결혼식 이후 이 세기의 커플은 칸, 로마, 몬테카를로를 넘나들며 화려한 시절을 보냈다. 아이도 연달아 태어났다. 장인의 소유였던 샬롱쉬르마른 성에서 아들 니심 2세와 딸 베아트리스는 처음으로 망아지를 탔고, 어른들은 사냥에 나섰다. 망아지와 개, 친구들, 아름다운 부인과 사랑스러운 아이들. 영원할 것만 같았던 행복하던 시절이 갑작스럽게 끝난 것은 부인 이렌 때문이었다. 이렌이 이탈리아 귀족이자 소문난 바람둥이였던 상피에리 남작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바람 피는 남편은 있어도 바람 피는 부인은 있을 수 없었던 보수적인 시대에 부인이 바람이 나다니. 더구나 소문난 부자인 카몽도의 부인이, 그것도 정통 귀족 출신인 당베르 집안의 딸이! 이들의 이혼은 당시 상류사회의 엄청난 스캔들이었고, 모이즈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였다. 큰 키에 우아한 말투, 다소 냉정한 듯한 태도, 한눈에도 남들과 다른 분위기를 풍기던 젊은 모이즈는 이 사건을 계기로 위엄 있고, 엄격하며, 타인과 거리를 두는 보수적인 남자가 되었다.

3 일주일에 오로지 두 번만 내부를 공개하는 이 책상은 클로드 샤를 소니에 Claude Charle Saunier라는 18세기 장인의 작품으로 내부에 수많은 비밀 서랍을 숨기고 있는 신기한 작품이다. 뒤쪽으로 보이는 타피스트리는 루이 15세 시대의 걸출한 화가였던 부셰 Boucher의 그림을 바탕으로 왕실 작업장인 오브송Aubousson에서 제작한 것.


1 잘 보존된 카몽도가의 부엌. 석탄을 넣어 달구는 엄청난 크기의 레인지와 수많은 냄비가 이 집의 살림 규모를 보여준다.

그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몽소 길 63번지의 저택을 허물고 그 자리에 18세기식 저택을 새로 지은 것이 이 무렵이다. 살롱, 서재, 사무실, 작은 살롱 등 모든 방을 루이 16세 시대의 왕실 장인들의 작품으로 꾸몄다. 동시대의 다른 컬렉터들처럼 옛날 가구 옆에 자신의 초상화를 걸어두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저택에 완벽하게 18세기를 재현하고 싶어 했다. 저택에 놓일 가구의 위치와 작은 장식품 하나의 위치까지 직접 정했다.
웨지우드산 포슬렌이 붙은 카를랑의 작품은 작은 살롱에 놓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가이던 르브룅의 그림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쓰던 의자가 놓인 방에 걸었다. 루이 16세의 형 아르투아 백작의 의자, 마담 퐁파두르가 소유하던 18세기 도자기와 루이 15세가 주문한 외벤의 책상, 베르사유 소장품인 세네의 의자 세트 등 모이즈의 집은 박물관보다 화려한 컬렉션의 집합지였다. 이혼 스캔들 이후 일체의 사교 활동을 접고 진지한 컬렉터의 길로 들어선 모이즈는 한 달에 한 번 이 고고한 성채에서 친구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베르사유 박물관의 가스통 브리에르, 카르나발레 박물관의 마낭, 루브르의 드레이퓌스, 아르데코 박물관의 메트만 등 그의 새 친구들은 호사스러운 상류 사교계의 일원이 아니라, 국립박물관에서 일하는 진지한 미술사학자들이었다. 그 외에 그가 유일하게 얼굴 가득 웃음을 담을 때는 오로지 아들딸과 함께 보 내는 시간뿐이었다. 모이즈는 당시로서는 다소 혁명적인 아버지였다. 가정교사를 통한 엄격한 훈육과 아이의 자유로운 사고를 억누르는 획일적인 교육이 일반적이던 그 시절에 자식을 직접 챙겼다. 니니라는 애칭으로 불렀던 니심 2세와는 파리-베를린을 왕복하는 자동차 경주에 도전했고, 딸 베아트리스와는 말을 탔다. 특히 니심 2세와 모이즈는 둘 다 기계를 좋아해서 당시로서는 드물게 집안에 자동차 정비사까지 두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친구 같은 아버지였다. “나의 자식들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자유롭게 살아갈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비행사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겠다는 니심 2세를 말리지 않은 이유였을 것이다. 프랑스를 지키기 위해 참전한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오매불망 걱정하며 쓴 모이즈와 니심 2세의 서신은 눈물겹다. 시작은 늘 이렇다. ‘사랑하는 아빠’, ‘보고 싶은 나의 니니’. 모이즈는 매주 손수 아들에게 군대에서 필요한 온갖 일상용품을 챙겨 보냈다. 그 덕분에 니니는 언제나 군대 동료들 사이에서 스타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2 모이즈의 아들이자 이 집의 마지막 주인인 니심 2세의 초상 사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들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3 요즘 화장실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만큼 고급스러운 도기 제품과 타일이 돋보이는 욕실. 위생에 민감하던 모이즈는 다른 부분은 18세기풍을 따랐으면서도 욕실과 부엌만큼은 당시 최첨단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니니, 하나뿐인 카몽도 가문의 상속자는 1917년 비행기 사고로 죽음을 맞았다. 모이즈의 나이 57세. 혹시라도 아들이 살아 있을까 싶어 연줄을 총동원해 사고 지점을 수색한 모이즈에게 니니의 장례식은 뼈아픈 슬픔이었다. 어쩌면 모이즈가 평생을 통해 모은 완벽에 가까운 컬렉션과 저택을 통째로 국가에 기증하면서 ‘니심 카몽도’라는 아들의 이름을 붙여주길 바란 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는 사람들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아들을 기억해주기를 바랐다. 이 컬렉션들을 통해 니심 2세의 이름이 잊히지 않기를.
카몽도 가문의 불행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모이즈 사후, 그의 하나뿐인 딸 베아트리스와 사위 레옹 Leon Reinach , 손자 손녀 파니 Fanny Reinach와 베르트랑 Bertrand Reinach은 모두 제2차 세계대전 중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람들은 나치의 위협이 다가오는데도 태연히 파리에 머물러 있던 베아트리스의 행적에 의문을 표시하곤 한다. 다른 유대인 가문이 앞다투어 미국으로 망명을 신청할 때조차 베아트리스는 한 점의 의심이나 불안감을 갖지 않았다. 아버지 모이즈와 큰아버지 이삭은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프랑스에 엄청난 컬렉션을 기증했다. 오빠는 슈발리에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를 위해 싸우다 전사했다. 베아트리스 자신은 유대인이기 이전에 프랑스인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사랑한 나라, 가문의 최후 정착지인 프랑스는 카몽도 가를 배신했다. 비시 정권은 이 가문의 명단이 포함된 유대인 명단을 독일에 넘겼고, 베아트리스 가족은 그들의 집에서 체포되었다.
지금은 세상에서 사라진 카몽도 가문의 저택, 컬렉션만 가득한 채 인적이 없는 그곳에서 나는 신사의 뒤를 따라간다. 신사는 2층의 구석진 방에서 식사를 한다. 프랑스 왕가의 도자기 작업장이던 세브르에서 만든 도자기 시리즈가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늘 그러하듯 그는 홀로 앉아 작품을 바라본다. 창 너머로 몽소 공원이 내려다보인다. 흩날리는 꽃잎 아래로 솜사탕을 든 아이들, 유모차를 끌고 나선 가족들, 잔디에 누워 책을 보는 연인들이 눈에 띈다. 살아간다는 것은 이토록 찬란하구나. 어쩌면 이것이 이 수많은 작품을 남겨주고 간 모이즈 카몽도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4 작은 트리아농 궁이라고 불릴 만큼 고전적 외관을 자랑하는 카몽도 저택. 앞마당으로 나가면 바로 몽소 공원과 연결돼 공원을 마당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5 현관에 들어서면 ‘비너스와 사랑’이라는 조각품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계단 중간에는 일본 자개를 붙여 만든 리센베르크의 콘솔이 놓여 있다.


파리 방문 계획이 있다면 시간 속으로 사라진 이 컬렉터의 저택에 들러보시길 바란다. 니심 카몽도 박물관 Musee Nissim de Camondo은 현재 프랑스 아르데코 박물관 산하에 소속되어 있다. 주소 63 rue de monceau 75008 paris 연락처 01-44-55-57-50 입장료 6유로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