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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에서 한복 입고 사는 독일인 베르너 사세 독일인 선비, 세상과 通하다
보리밭과 대나무와 빛나는 햇살이 곳곳에 벌여져 있는 전라도 담양 땅에 뼈를 묻겠다며 독일에서 은퇴하고 건너온 한 남자가 있다. 개량 한복만 입고 수묵화 그리며 가사 문학을 탐구하는 베르너 사세의 토종 한국식 슬로 라이프.


창평 고씨 집성촌이자 슬로시티로 지정된 이 작은 마을에서 그는 여느 촌로처럼 느긋하게 늙어가고 있다.

남도의 가난한 들에 바람이 흐르고 보리밭에 물기가 돕니다. 반백의 한 사내가 보리밭 사이로 휘적휘적 걷습니다. 미끈한 포장도로에서 걷는 양 ‘뚜벅뚜벅’이 아니라, 밭도랑에 온몸을 맡기고 ‘휘적휘적’ 걸어갑니다. 그 뒤 수풀 속에서 새가 여름 기운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아양을 떨며 울어댑니다. 아, 이 여름은 미치게 아름답습니다.
이 사람, 베르너 사세 Werner Sasse. 정년 퇴임 후 독일에서 전라도 담양 창평의 삼지천마을로 날아와 오래된 한옥에 세 들어 살고 있습니다. 이 집에서 심심파적을 넘어선 그림을 그리고, 시조를 읊조리고, 마당에 모란꽃이 만발할 무렵이면 달이 기울도록 밤바람 속을 거닐며 삽니다. 이런 그에게 누군가 ‘독일인 선비’라는 별명을 붙여줬습니다.
그는 독일 보쿰 대학교와 함부르크 대학교에서 한국학과 교수로 몇십 년을 보냈고, 유럽한국학협회 회장으로 유럽에서 매년 한국학 세미나를 주도한 학자입니다. 그가 독일에서 받은 박사 논문 제목은 ‘계림유사에 나타난 고려 방언’이었고, 교수 시험 통과 논문은 ‘향가 해석 방법론’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습니다. 이 한옥에서 그가 요즘 연구하는 것도 한국 가사 문학입니다. 그리고 주중에 이틀은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석좌교수로 살고 있습니다.
“노인이 되어가면서 ‘앞으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겠다’고 결심했어요. 한 가지는 내가 좋아하는 연구, 한 가지는 다시 그림을 시작하는 것.” 정말 자신이 원해서 가는 길인지를 묻지 않고 가는 길은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공허할 뿐이라는 게 그의 신념이었습니다. 그저 시간에 따라 상투적인 삶에 이르고 늙고 병드는, 그리하여 후회투성이로 눈감는 굴복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 그는 은퇴 한 달 후 독일을 떠나 담양의 작은 마을, 창평 고씨 집성촌에 들어왔습니다. 가족도, 독일 맥주도, 개 한 마리도 없는 이 집에서 산 지 2년 반이 훌쩍 넘었습니다. 콩고물 쏟아지는 소리처럼 정겨운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지만, 홀아비 혼자 밥 끓여 먹고 살지만 그는 이 집에서 촌로의 얼굴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조금만 걸어가면 술 고프고 사람 고픈 길손을 받아들이는 밥집이 즐비하고, 특히 그가 좋아하는 ‘처갓집 양념통닭’집이 있는 동네. 그 통닭집 알전구 불빛 아래 건주정 부리는 사내들 틈에 끼어 한국 맥주 한잔 시원스레 들이켜는 날이 많습니다. 그는 이렇게 시골 마을에서 개량 한복 입은 또 한 명의 촌로로 살고 있습니다. “혼자 사는 양코배기가 있다니까 여자 두 분이 호기심에 집에 들어와서 둘레둘레 구경하더니 어떻게 사냐, 마누라도 없고 며느리도 없는데 늙기까지 했으니 살기가 여간 귀찮스럽지 않냐, 김치도 잡숫냐, 이것저것 묻데요. 그러더니 다음 날 또 와서 김치 통을 턱 안기고 갔어요. 이젠 동네 사람들이 날 ‘우리 마을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다듬지 않아 잡초처럼 우묵한 수염 사이로 웃음이 배어 나옵니다. 그는 지금 슬로시티(담양과 장흥, 완도, 신안 등 4개 지역이 동시에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지정됐는데, 창평면이 그중 한 곳에 속한다)에서, 슬로 하우스에 세 들어, 느긋하게 늙어가는 슬로 라이프를 즐기는 중입니다.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고재욱 씨의 80년 된 한옥에 세 들어 사는 베르너 사세. 그는 대청마루를 서재로 삼아 한국 가사 문학 연구에 심취해 있다.

내 고향은 전라도 은퇴까지 하고 한국에 뼈 묻으러 왔다는 그 마음 앞에서, 외국 공항 앞에 선 문맹처럼 허둥대게 됩니다. “도대체 왜?”라고 자꾸 묻고 싶어집니다. “한국 사람에겐 융통성이라는 게 있어요. 그게 좋아요. 엄격하고 정확하게 사는 독일 사회가 기계적이라면 한국은 인간적인 맛이 나는 곳입니다. 독일에서 만약 차선을 갑자기 바꾸면 예외 없이 사고가 나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정신에도 습도라는 게 있다면 개념과 논리의 마른 정신보다는, 감성으로 채워진 젖은 정신으로 사는 한국 사람, 그 모습에 반했던 것입니다.
그가 스물여섯 살 때인 1966년, 장인(독일인)이 전라도 나주에 비료 공장을 세우고 나주기술학교를 열면서 이 학교 교사로 온 것이 한국과의 첫 인연입니다. 그 후 2년 동안 나주와 익산, 여수에서, 다시 2년 동안 서울에서 살면서 서울대학교 어학반을 다녔습니다 ‘한국미’에 매료된 그는 독일로 돌아가 보쿰 대학교 일본학과에서(그때만 해도 독일에 한국학과가 개설된 대학교가 없어서 그는 일본학과에 적을 둔 채 대학 내 아시아문화센터에서 한국학을 공부했다) 한글, 한문, 일본어를 함께 연구했습니다. 신열에 들뜬 것처럼 파고든 그의 학업 속도는 무섭도록 빨라 5년 만에 대학, 대학원 과정을 마쳤습니다. 그 후 독일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학 박사 학위를 받고 유럽에 한국학을 전파하는 ‘한국학 전도사’로 수십 년을 살았습니다.
“어쩌면 나는 독일에 유배된 것이었는지도 몰라요. 독일에 살면서도 계속 한국 문화를 공부하고 책 쓰고, 아침에 일어나면 인터넷으로 한국 신문부터 챙겨 보고, 1년에 한두 달씩 꼭 한국 와서 지내다 가고. 그리고 한국 가사 문학에 빠져 일생 동안 재미나게 공부해온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까 앞으로도 그걸 하겠다, 이 말이죠. 근데 제일 좋은 게 여기 와서 직접 하는 거잖아요. 태어나긴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내 인생의 뿌리가 어디냐고 한다면, 여기, 한국이에요. 고향은 어디냐고 물으면, 전라도. 나는 지금 사는 이 한옥에서 산소 갈 때까지 살고 싶습니다.” 사세 思世, ‘세상을 생각한다’는 한국 이름까지 지은 한국 나이 69세의 할아버지. 공허가 목욕탕 수증기처럼 자욱한 세상에서, 이렇게 자기 확신에 가득 찬 삶을 살아간다는 건 축복이라고, 나는 조용히 속말을 건넵니다.


그는 20년 전 시작한 먹 채색화를 이 집에서 사는 생의 또 다른 기쁨으로 꼽는다. 수묵화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양 수채화 기법을 먹과 동양 화법으로 바꾼 먹 수묵화다.

한옥, 수묵화, 시조 그리고 선비 이 한옥에 처음 들어섰을 때의 풍경입니다. 그의 전처(이혼 뒤 친구처럼 지내는 독일인 전 부인은 간간이 이 집을 찾아 며칠씩 묵고 간다고 한다)가 한옥 툇마루에 앉아 뜨개질하고 있는 옆모습. 오후 4시의 햇살에 노곤해진 한옥은 금방 구워낸 빵 같은 온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동아일보 주필과 사장을 지낸 고재욱 씨의 집인 이 한옥은 80년이라는 세월의 더께를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뜰에는 청청한 소나무 두 그루와 80살 먹은 철쭉, 모과나무, 무화과나무가 무성합니다. 그는 이 고즈넉한 한옥의 안채 대청마루를 서재로, 방 하나는 화실로, 사랑채는 주방과 온돌방으로, 창고로 쓰던 아래채는 욕실과 화장실로 요긴하게 쓰고 있습니다. 하루에 수도 없이 안채・사랑채・아래채를 오가며 마루・댓돌・토방・마당을 오르내리고, 아궁이에 불까지 때며, 그 흔한 침대 하나 두지 않고 아랫목에 요 깔고 살지만, 불편하지 않느냐 물으면 “왜요?”라고 되묻습니다. “나무, 흙, 종이만으로 지은 집이 어떻게 바람의 방향과 습도, 온도를 적당히 조절할 수 있는지 참 신기합니다. 마치 자연 속에 그냥 사는 거 같잖아요.” 세상 없는 절경이라 해도 도회적 의미로 청결하지 못하면 혐오감을 감추지 못하는 우리에게 독일 할아버지가 세 들어 사는 한옥이란 얼마나 다른 세상 이야기 같은지요. 그는 지나가는 객들 맘껏 구경들 하시라고 대문 하나 안 달고, 문고리도 제대로 안 채운 채 살고 있습니다.




돌담과 한옥, 보리밭, 정자,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가 어우러진 그림 같은 동네에서 그는 선비처럼 청신하게 살고 있다. 전라도 사람들의 뜨끈한 인정은 그가 이곳에서 만난 또 하나의 보물이다.

사립문 주변을 천천히 거닐고, 대청마루에 앉아 시를 읊조리는 그의 뒷모습을 보자니 퇴계 선생의 시 구절이 떠오릅니다. “늘그막에 집 하나 얽어 / 그 가운데 누워서 / 한가로운 정취 절반은 / 들사슴과 나누어 갖네 (중략) 그윽한 은자 꿈에 선경에서 노니네 / 시 이루어져 불러서 서로 화답하니 / 아득히 먼 곳의 학 울음소리 듣는 듯하네.”(퇴계 이황의 <도산잡영> 중) 그가 이 집에서 꿈꾸는 삶, 앞으로 남겨진 삶도 선비의 청신한 삶이 아니었을까요? 성실한 농사꾼처럼 책을 읽고, 마음을 닦고, 깨달음을 구하는. 어쩌면 그에게 이 오래된 한옥은 선비의 청정 도량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군살이 하나도 없는 야윈 몸매에 눈빛만 빛나는 그는 조선 선비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이 한옥 안채에서 그는 수묵으로 그림 그리는 재미에 푹 빠져 있습니다. 한지에 그린 수묵화로 두 번의 전시도 열었습니다. 서양 수채화의 물감과 기법을 먹과 동양 화법으로 바꾼 그의 먹 수채화. 그는 자신의 그림을 동양화도 서양화도 아닌 그냥 추상화라고 부릅니다. “내 그림은 붓과 내가 나누는 대화입니다. 붓이 닿아 획이 되면 획이 내게 질문을 하고 또 내가 대답하면서 방향과 모양이 만들어집니다.” 그림이란 붓과 작가가 정을 통하고 혼을 나눠야 나오는 것이라는 이 생각은 영락없이 한국 사람의 그것입니다. 그는 산 사람 병든 영혼이라도 잠 깨울 수 있는 기의 작품을 그리겠다, 이런 헛된 꿈은 꾸지 않습니다. 단지 좋아서, 한가로이 난 치는 선비처럼 그립니다. 그는 앞으로 먹이 아닌 흙으로 그림을 그려볼 생각이라고 합니다.
구들장을 깔고 앉아서 벗하는 또 하나의 친구는 그의 평생의 업이기도 했던 한국 가사 문학입니다. 그는 대청마루 서재에 앉아 샤머니즘, 유불선이 공존하는 한국 가사 문학의 비밀을 캐고 있습니다. 그는 2002년 <월인천강지곡>을 번역해 유럽에 처음 알리기도 했는데, 그 번역 작업에만 5년의 시간을 들였습니다. 거듭 읽고 고치고 또 그다음을 쓰다 보니 작품이 끝날 때쯤 조사 하나까지, 페이지까지 깡그리 외우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2007년에는 전남대학교 민주인권평화센터에서 5・18 민주항쟁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한국의 민간 정원 양식인 소쇄원 연구’라는 주제의 논문도 발표할 예정입니다. 내가 버린 걸 남이 제대로 찾아내 닦고 기름 치고 있는 것 같아 왠지 자꾸 부끄러워집니다. 세종대왕이 참 훌륭한 시인이었다는 그의 말 앞에서 <월인천강지곡>의 첫머리도 떠올리지 못하는 내가 청맹과니 같기만 합니다.


청산도 절로 절로 송홧가루가 날려 하늘이 금빛으로 번쩍입니다. 들을 바라보던 그가 갑자기 시조 한 수 읊어나갑니다. “청산도 절로 절로 / 녹수 綠水도 절로 절로 / 산 절로 수 절로 / 산수 간에 나도 절로 /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 늙기 절로 하리라.”(푸른 산도 자연 그대로이며 흐르는 물도 자연 그대로라. 이와 같이 산과 물이 자연의 뜻을 따르니 산수 사이에 묻혀 사는 나도 역시 자연 그대로이다. 이렇듯 자연 속에서 절로 자란 몸이 늙어가는 것도 자연의 순리대로 따라가리라.)_김인후의 ‘청산도 절로 절로’
이제 명예나 재물에 대해 원도 없는 나이가 된 남자. 태어난 땅이 아니라 마음의 고향으로 들어와 조용히 먹을 가는 자처럼 그렇게 살고 있는 남자. 나는 아직도 그가 담양 삼지천마을까지 내려와서, 아니 그가 인생의 길에서 찾는 게 무언지 백 점짜리 답은 못 얻었습니다. 하지만 숙제 같은 인생이 바로 축제라는 걸, 그는 그 숙제를 즐거이 풀고 있는 중이라는 걸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독일인 선비의 풍류에 빠져 보낸 하루가 기울고 있습니다. 집 앞 보리밭에서 막걸리처럼 구수한 냄새 피어오르고, 바람결에 소쩍새가 한 목청 싣고 울어댑니다. 아, 이 여름은 미치게 아름답습니다.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