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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류화가 시리즈] 삶을 예술로 산 여성들의 사랑 이야기
예술가에게 연인은 어떤 존재일까? 남성 화가들의 사랑은 영감의 원천이라지만, 여성 화가들의 사랑은 복잡하게 해석된다. 특히 여성이 억압받던 시절, 성공한 남자와의 염문은 덫이고 늪이었다. 사랑이 뜨고 지는 동안 그들이 겪은 소란스러운 일대기를 들어본다. 미술평론가 유경희 씨가 카미유 클로델, 오노 요코, 나혜석, 조지아 오키프를 초대해 시공 초월 인터뷰를 청했다.
남자로 예술을 시작하고 남자로 예술을 마감하다, 카미유 클로델
유경희
많은 여성 작가들은 성공한 남자를 엘리베이터 삼아 예술계에 입문하고 자기 꿈을 이루기도 했는데요. 그런데 클로델, 당신을 생각하면 울컥합니다. 당신의 최후를 보고 당신이 사랑받는 인간인 동시에 성공해야 마땅할 예술가가 되지 못했음에 통탄했습니다. 당신이 좀 더 늦은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요.
클로델 후세 사람들이 절 불쌍한 여자로 생각한다면서요?(쓴웃음) 그렇지요. 로댕과 결별 후 전시회에 실패하고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등 제정신이 아니었지요. 작업실에만 틀어박혀 지냈는데, 어느 날 건장한 남자 둘이 와서 날 정신병원으로 데려갔지요. 날 유독 사랑했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족들이 날 가두기로 한 거예요. 어머닌 내가 당신 맏아들을 잡아먹고 태어난 몹쓸 아이로 생각했어요. 게다가 난 아버지뻘 되는 남자의 정부였지, 그 시대엔 창녀와 다를 바 없는 조각가였지…. 집안 망신시키는 눈엣가시였을 겁니다.
유경희 로댕은 카미유에게 어떤 존재였나요? 오히려 그는 당신이 조각가가 되는 데 걸림돌이었잖아요. 그에겐 다른 연인도 많았고요! 당신같이 똑똑하고 자존심 센 여자는 그를 독차지하고 싶었을 텐데요.
클로델 로댕은 내가 원하던 남자의 총체였어요. 아버지인 동시에 친구, 연인, 형제와도 같은 남자. 무엇보다 그는 예술가로서의 나, 여성으로서의 나를 발견하게 해준 사람입니다. 로댕에게 저와 로즈 뵈레(로댕의 집 가정부이자 로댕에게 동물적 충성심을 지닌 본처 같은 여자. 로댕은 그가 죽기 몇 주 전 혼인신고를 해주었다) 중 양자택일하라고 종용했어요. 그런데 로댕은 로즈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며 결혼을 거부하고 날 멀리했지요.

카미유 클로델(1864~1943) 로댕의 연인으로 유명한 조각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예술가였으며 로댕의 작품에 깊은 영감을 준 작가였다. 로댕과 결별한 뒤 과대망상과 편집증 진단을 받고 30년간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가 가족의 무관심으로 다시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쓸쓸히 죽었다.

유경희 로댕의 뮤즈로 머물기에 당신은 지나칠 정도로 자존심이 강하고 예술가로서의 소명과 자기 확신에 찬 사람이니까요. 당신의 ‘사쿤탈라’는 특별한 작품이라고 봅니다. 당신과 로댕과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 같았어요.
클로델 1888년에 처음 발표한 그 작품으로 극찬을 받으며 전도유망한 조각가로 주목받았어요. 이 작품은 로댕과 내가 함께한 시간을 압축해 보여주는 결정체지요. 로댕이 날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제가 치명적인 존재임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유경희 로댕은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당신을 보며 슬퍼했던 것 같아요. 로댕은 당신을 멀리서 오랫동안 지켜보았는데, 당신이 모든 지원을 거절하고 장벽을 치려 할 때마다 그러지 말라고 얘기했어요. 로댕은 당신에게 기자와 미래의 컬렉터를 보내주기도 했잖아요. 심지어 타인의 이름으로 당신 작품을 구입하기도 했어요. 알고 있었나요?
클로델 저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 같아요. 로댕이 내 작품을 표절하고 날 매장시키려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다시 그런 상황에 처한다 해도 그렇게밖에는 하지 못할 겁니다.


나혜석(1896~1948)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문인. 도쿄 유학, 약혼자였던 최승구의 죽음, 이광수와의 이별, 변호사였던 김우영과의 결혼과 세계일주, 최린과의 연애 사건, 이혼 등 보수적인 근대 사회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풍문의 주인공이었다.

결혼은 타협하듯 사랑은 불나방처럼, 나혜석
유경희나혜석, 수원 갑부의 딸인 당신은 태생부터 유명 인사였다죠. 당신의 출생이 신문에 실릴 정도였다고요.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이 기사화된 걸 보면 꽤 잘나가는 스타였나 봐요. 그런데 경성을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이 터졌죠. 당신의 이혼 고백서 ‘정조는 취미다’라는 글이 1934년 잡지 <삼천리>에 게재된 일 말예요. 그리고 1년 후 더 파격적인 주장을 했다던데요?
나혜석 이혼 고백서에서 내 결혼 생활과 이혼 후의 삶을 공개했습니다. 1년 후에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이다”(<신생활에 들면서> 1935년 2월호)라고 주장했지요. 그게 난리가 난 거죠. 속으로는 쾌재를 부른 여성들도 있었겠지만 사실 내 적은 여자들이었어요. 여자들이 나의 파격적인 삶을 외면했어요. 난 억압된 조선 여성을 대변하고 새로운 여성상을 만들려던 건데 말이지요.
유경희 당신은 선망의 대상이었으니 관심과 질투라는 모순된 상황에 처한 게 당연합니다. 다시 결혼 생활로 돌아가서 남편 김우영은 당신에게 그림 그리기를 종용하며 ‘남에게 존경받는 아내의 남편은 행복하다’고 했다죠?
나혜석 내 결혼은 전적으로 타협이었어요. 약혼자 최승구(시인)가 요절한 뒤 나보다 열 살이나 많고 돈 걱정 없는 변호사 김우영과 살면 그림은 그릴 수 있겠거니 싶었지요. 그는 미술대전 기사를 오려다 주며 그림을 그리라고 채근했어요. 당시 난 그림 그리기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는데, 그는 내 근원적인 고민도 모르고 내가 미술대전에서 상 받는 것만 뿌듯해했지요. 여하튼 그 남자는 내 예술 세계를 이해하진 못했지만 적극적으로 지지해줬어요.
유경희 그러니까 남편은 아내가 주목받는 여자인 동시에 현모양처인 여자로 이중고를 짊어지길 바랐네요. 시대의 희생양이었군요. 당신은 가정생활도 권태롭고, 작품 생활에도 한계를 느낄 때 1년 넘게 구미 여행을 다녀왔지요. 남편과 동행한 이 여행에서 당신은 남편 소개로 최린(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웅변술이 뛰어난 정치가이자 풍류를 아는 호걸)을 만났고요. 당신은 최린을 자신과 공명되는 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와 파리에서 만난 뒤 7년이 지난 다음에 고소장을 썼어요. 왜죠? 당신 같은 여자가 강간을 당했을 리는 없을 테고, 당시 파리지엔들이 성적 표현을 하는 걸 본 소감을 쓴 글을 보면, 당신은 그의 유혹을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 같은데.
나혜석 최린이 원망스러웠어요. 벼랑 끝에서 날 지키기 위한 피치 못할 시위였어요. 내 어려운 처지를 논의코자 쓴 편지가 들통 나서 남편이 이혼을 요구했어요. 사실 난 이혼 의사가 없었지만 결국 이혼했죠. 이혼 후 내가 겪는 정신적·물질적 고통과 풍파를 외면한 최린에게 위자료 청구 소송을 낸 거지요. 나의 처지를 강 건너 물 보듯 한 파렴치한!
유경희 아!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당신은 말년에 파킨슨병에 걸린 상태에서도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잖아요.
나혜석 이혼 후 제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그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혼의 충격도, 아이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충격도 견딜 수 없었지만, 더욱더 나를 절망에 빠뜨린 건 금강산에서 그린 그림이 전부 불탔을 때 받은 충격입니다. 그때부터 수전증이 생겼죠.
유경희 당신의 솔직한 비판과 항의는 사회 통념에 대한 도전이었어요. 남편에게 청구한 재산분할청구권은 선각자 역할을 한 걸 아나요? 그 덕분에 오늘날 이 법이 유효하게 됐으니까요.

나의 예술이 남자를 완성시켰다, 오노 요코
유경희 저는 오노 요코의 성공 전략이 가장 직접적이고 도발적이었다고 봐요. 당신은 자신이 선택한 사람을 전화로 추적하고 수많은 편지를 보낸 것으로 유명하지요? 존 레넌을 만났을 때도 그랬고요. 그것도 모자라 존의 집 앞에서 팬들과 함께 그를 기다리기도 했었다던데.
요코 첫 만남은 1966년 영국 아방가르드 갤러리 ‘인디카’에서 열린 제 전시 때였어요. 당시 비틀스의 인기는 예수를 넘어설 정도였죠. 이 전시 후 난 영화 제작 등 예술 프로젝트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후원자가 필요했죠. 무작정 그를 찾아가 도와달라고 했어요.
유경희 요코! 당신은 세기의 연인을 가로챈 파렴치한 여자로 낙인찍혔죠. 대중은 왜 그렇게 당신을 싫어한 걸까요? 비틀스 멤버들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고 들었어요.
요코 동양 여자라서? 엄청난 행운을 거머쥐고도 냉소적인 나의 태도 때문에? 그를 쥐락펴락하고 비틀스에서 탈퇴하게 만들어서? 뭐 대중은 어떤 것 하나도 맘에 안 들었겠지요.
유경희 존 레넌은 예민하고 글쓰기 좋아하는 반항아로 알려져 있지요. 제 생각엔 그가 자신의 예술적 감수성을 앞지르는 당신의 정신적·지적 능력에 매혹된 것 같아요. 매료를 넘어선 ‘사로잡힌 영혼’ 정도가 되겠죠. 대중은 존을 ‘악마에 사로잡힌 가련한 영혼’으로 생각했을 겁니다만. 대중은 당신이 존을 이용한다고 봤지만, 사실은 존 레넌의 철저한 뮤즈였다고 생각되는데. 당신 덕에 존 레넌의 삶과 예술이 업그레이드된 것 아닌가요?

오노 요코(1933~) 존 레넌의 부인이자 개념미술가. 오랜 세월 동안 비틀스를 해체시킨 주범으로, 요부이자 마녀로 세간에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는 현존하는 어떤 예술가보다도 실험적인 예술로써 세계적으로 부상한 개념미술가이다.


조지아 오키프(1887~1986) 미국 모더니즘 화단의 독보적인 여성 화가이며, 전설적인 사진들을 남긴 앨프리드 스티글리츠와 함께 20세기 미술사의 주요 인물이다. 사진가이자 화상인 남편 스티글리츠의 모델로 먼저 세상에 알려진 탓에 그의 작품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었다.

요코 어머, 당신은 대중예술을 아주 저급하게 평가하는군요. 그렇게 볼 일은 아니에요. 존은 내가 보낸 편지와 작품을 통해 제 불가지 不可知의 세계, 메타포와 알레고리의 세계, 비의적 세계, 동양적 사상에 대해 궁금했을 거예요. 그 때문에 날 거부할 수 없었을 겁니다.
유경희 어쨌든 인정합니다. 둘은 확실히 물 만난 고기처럼 서로의 철학과 육체를 탐닉하며 사회를 향한 도발적인 퍼포먼스를 계속했으니까요. 둘의 해프닝과 퍼포먼스는 모두 당신의 발상이었죠? 그의 명성을 당신의 예술을 개진하는 데 매우 전략적으로 이용했다지요?
요코 존이 나를 ‘멘토’라 불렀다는 걸 잊었나요? 우리가 서로를 이용했다 칩시다. 서로 상생한다면 좋은 거 아니에요? 우리 영혼이 추구한 욕망은 일치했어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실험정신은 우릴 따라올 자가 없었지요. 날 만난 뒤 그의 전쟁과 자유에 대한 세계관은 훨씬 깊어졌어요. 음악뿐 아니라 다방면에 걸쳐서 말이지요.



그림 그리기 위해 남자와 거래했다, 조지아 오키프
유경희 조지아 오키프 당신은 유명한 사진가이자 화상이자 당시 뉴욕 미술계를 주름잡던 유부남 스티글리츠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 아닙니까? 그때 스물세 살이었던 당신은 연상인 스티글리츠 말고도 세 명의 남자로부터 구애받고 있었다던데.
오키프 난 미국 위스콘신 촌구석 몰락한 집 딸이었어요. 정신적·경제적으로 헐벗었지만 그림에 대한 열망은 강렬했지요. 예술가들의 구원자 격이던 스티글리츠의 연인이 되면 고통을 보상받을 것 같았어요. 그는 내게 아이를 낳게 해줄 순 없지만, 화가의 꿈을 이루게 해줄 수 있을 듯했어요.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누구보다도 나랑 잘 통했던 폴 스트랜드(스티글리츠에 견줄 만한 유명 사진가)는 내 재능을 키워주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날 스티글리츠에게 양보했어요.
유경희 그러니까 그건 사랑이라기보다 거래였군요.
오키프 음… 부정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강렬하고 어둡고 파괴적인 내가 가장 높고 밝게 빛나는 별과 맺어진 거지요. 난 스티글리츠가 나의 메시아가 되길 열망했어요, 강력히!
요코 (불쑥 끼어들며) 그건 거래라기보다는 당신의 ‘작품’으로 봐야죠. 당신이 스티글리츠를 선택한 건 내가 존 레넌을 만난 것처럼 ‘발견’이에요. 내게 상상력과 영감을 줄 어떤 존재에 대한 발견! 개념미술에서 발견이란 곧 작품이지요.
유경희 그럴 수 있겠네요. 예술가의 삶은 일반인들이 잣대로 두는 도덕을 초월해서 해석해야 할 것 같아요. 어쨌거나 스티글리츠는 조지아 당신에게 홀딱 반했지요. 당신에 대해서 ‘호불호가 분명하고, 자유롭고 거침없으며, 섬뜩할 정도로 아름답고, 때론 위험하며, 영혼의 맥박이 펄떡이는 여자’라고 말하던걸요. 이 관계가 영적인 결합으로 비쳐지길 바랐고, 당신을 순수하고 직관력 있는 이상적인 여인으로 소개했죠. 특히 사진 작품을 통해서요.
클로델 그럼 스티글리츠의 직업 모델 역할을 한 것 같은데, 자존심이 없었던 것 아닌가요? 그렇게 거대한 예술가 밑에서 살아가느니, 나처럼 정신병원에 갇혀 꽃에 물 주다 죽는 편이 낫겠어요.
오키프 카미유 당신이 로댕의 모든 지원을 거부하고 독립한 것에 비하면 난 유부남의 보호를 받는 신세에 불과할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난 당신이 생각한 것처럼 문란한 여자는 아니었어요. 오히려 보수적인 성향이 내 힘의 원천이었다고 생각해요.
유경희 그런데 아이가 없었던 당신은 말년에 만난 젊은 조각가 해밀턴에게 그 많은 유산을 상속했지요? 그는 당신에게 어떤 존재였나요?
오키프 시력을 잃어가고 나날이 의기소침해져 가는 내 인생에 그의 등장은 신비한 행운이었어요. 화가로서의 삶을 지속할 수 있게 한 그가 고마웠어요. 그는 내가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자서전을 쓰도록 응원했어요. 여간 까칠한 남자가 아니었는데도 그를 참아낼 수 있겠더군요. 하지만 나는 그를 선택한 대신 친구와 동료를 잃었지요.
유경희 여성 화가에게 남자는 예술에 이르게 한 엘리베이터였지만, 결국 얻은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잃은 것도 아니겠군요. 사랑은 예술의 씨앗이었으니까요. 개인적으로 오노 요코가 참 부럽군요. 사랑하는 남자를 통해 자기가 이루고 싶은 것을 다 이루고, 세계인과 소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잖아요.

글을 쓴 유경희 씨는 미술 잡지 기자와 큐레이터를 거쳐 현재 미술평론가이자 전업 작가로 일한다. 예술을 미학과 정신분석학 관점에서 접근한 글을 쓰고 강의를 한다. 책 <테마가 있는 미술 여행> <예술가의 뮤즈>를 통해 동전의 양면 같은 인생과 예술을 이야기한다.


나도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