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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사진 찍는 사진작가 박재완 씨 우리가 남겨두고 온 것들에 대하여
지하철역 무료 영정 사진 촬영소에 모인 어르신들에게로,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에게로 다니며 ‘장수 사진’ 찍는 박재완 씨. 그가 이 ‘기쁨의 사진’으로 봉사하며 만난 건 바로 우리가 남겨두고 온, 잊고 살았던 우리 피붙이들이었다.


공연히 봄비는 내리는데, 버들개지 흰 눈처럼 봄바람에 날리는데 늙은 어머니들 낡은 의자에 앉아, 그날이 오면 들고 갈 사진 한 방 박습니다. ‘염라대왕 선볼 사진’이라며 모처럼 다려놓은 한복 입고, 진달래색 입술연지 곱게 칠하고 그보다 더 붉은 뺨으로 웃는 어머니. 곤색 ‘가다마이’ 쭉 뽑으시고 머리에 만 원짜리 새 모자 얹은, 멋을 쓰신 아버지. 이 어머니, 아버지들 얼굴에서 자꾸 내 어머니를 봅니다. 오랜 병치레 후 봄만 되면 아무래도 올해가 마지막인지도 모르겠다며, 고추장 담가뒀다고 전화하는 내 어머니 생각나, 자꾸 하늘만 쳐다봅니다.
매달 둘째, 넷째 주 화요일 오후 2시가 되면 남광주 지하철역 한 귀퉁이에서 사진작가 박재완 씨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영정 사진 무료 촬영’이라는 플래카드 앞에 둘러앉은 노인들 틈으로 그가 보입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 숨차고 애달픈 생애 뒤에 꽃놀이 가듯 가시라고 사진 박아드리는 그. 한세상 열심히 살다 가시면서 마지막 남기는 사진이니 웃는 게 당연하지 않겠냐며 ‘김치’ ‘위스키’를 외치는 그가 보입니다. 아침 8시부터 번호표 쥐고 대여섯 시간 기다린 어머니, 아버지들은 별반 차이 없는데도 연신 화장을 고치고, 이를 절대 드러내지 않으려고 입을 앙다물기도 합니다.
“사람이 영정 사진 준비해야 하는 나이가 되면 부처님께 밥 한 그릇 올려야 한다고 안 합니까. 먼저 산 사람들이 남겨진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이고 축복이니 ‘영정 사진’ 대신 ‘장수 사진’이라 불러야지요. 이렇게 고운 사진이 또 어디 있을라고. 언젠가 눈에 백태가 들어앉아 허옇게 변한 엄니 한 분을 찍는데, 그 초점 잃은 눈동자를 보면서 이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채화다, 싶데요.” 한세상 잘 견뎌낸 사람의 귀한 얼굴 찍어주는 사진작가 박재완 씨. 그의 나직한 이야기 뒤로 엄니들이 당신들의 쓸쓸한 노래 한 곡조 풀어냅니다. “발끼이를 돌리려고 바람 부는 대로 걸어도 돌아써어지 안는 거어쓴 미련인가 아씨움인가아… 가씀에 이 가쓰으메 심어둔 그 싸아랑이….”
“엄니들이 역무실에 사진 찾으러 와서 ‘아이고, 이렇게 마나님처럼 꾸며주셨네. 검버섯도 다 지우고. 그라제, 짜글짜글한 것보다 더 낫제. 목걸이도 걸은 거 봐라야. 기술이 좋긴 좋은갑다.’ 큰애기맹키로 웃을 때, 앞니 서너 개 빠진 노인네들 얼굴에서 미소를 봤을 때, 그런 게 행복 아니겄어요. 언젠가 한번은 오십 더 먹은 중늙은이가 위에는 와이셔츠 입고, 아래는 환자복 입고 여길 찾아왔어요. ‘나는 요 앞 조선대병원에 있는 중환자다, 언제 갈지 모르는데 사진 좀 찍어줄 수 있겠느냐, 65세 넘어야 찍어준다던데 그래도 한번 와봤다’고 합디다. 공들여 찍어줬지요. 역무실에 맡긴 사진이 안 보이는 걸로 봐서 찾아간 건데. 글쎄, 국화꽃으로 장식이 됐는지, 아니면 그이가 건강해져서 집에 보기 좋게 걸려 있을지…. 내 생각은 그냥 방 벽에 걸려 있으면 좋겠지.” 오늘 찍는 이 사진이 다 낡고 낡아져 새로 찍어야 할 그날까지, 우리 어머니들 아버지들 오래오래 이 세상에 함께 계셔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추운 곡절 끝에 우리에게 돌아온 그들 3년 전 그의 몸에 치주암이라는 병증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모든 꿈을 꺼버린 듯 길에서 방황했습니다. 술로 삶을 내팽개치고 싶기도 했습니다. “첨엔 ‘너 총 맞아!’ 이러는 거 같습디다. 근데 맘을 비우니깐 되데요. 그냥 다 잊어져. 가는 놈은 어차피 갈 건데 왜 그거에 연연해요? 좌우당간 싸돌아다니면서 나를 잊자, 그런 맘으로 항암 치료받을 때도 사진기 매달고 중앙아시아로, 동남아시아 오지로 나가고 했어요. 그 덕분에 나를 많이 잊었어요. 그러니까 좀 살게 되더라고.”
그는 수많은 복병에도 불구하고 30년 이상 한 울타리를 지켜온 남편이자, 수십 년간 밥벌이를 감당했던 아버지였습니다. 공기업의 전기 엔지니어로, IMF 칼바람에 스스로 물러나 자회사의 홍보실 직원으로, 다시 사보 편집장으로(취미로 시작한 사진이 그의 인생 2막을 열어주었답니다) 살았습니다. 세상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가쁘게 뛰어온 그날들을 뒤로하고, 은퇴 후의 삶에 충실하던 그에게 병마가 찾아온 것입니다. 아랫니 반쪽을 모두 들어내고 마비됐지만, 그는 그 ‘바보 같은 비움, 바보 같은 낙관’으로 또 다른 삶을 채웠습니다. 소명의식으로 무장했다기보다는 삶이 덤으로 준 또 다른 ‘자신의 길’에서 열심히 사는 또 한 명의 아버지. “카메라 메고 돌아다니는 거 마누라가 처음엔 많이 말렸죠. 하지만 나 이렇게 좀 살다 가게끔 해주라, 내가 나가서 못된 짓 안 하고 그래도 좀 보람 있는 일 하니까 ‘에이, 미친놈’ 하면서 그냥 놔두는 거예요. 허허허.”
그는 2002년부터 고려인들을 위해 영정 사진과 가족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러시아 연해주로 촬영 여행 떠난 길에 만난 고려인들이 빛바랜 사진으로 장례 치르는 모습을 보고, 둥 하니 가슴에 북소리가 울렸습니다. 그 후로 시민단체가 고려인 거주 지역을 방문한다는 소식만 들리면 장비를 챙겨 함께 떠납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뽑아줄 수 있게 포토프린터까지 준비하고 나섭니다. 정작 찍힌 사람은 볼 수 없는 사진을 그 ‘주인’에게 돌려주고 싶었답니다. “사진 한번 찍으려면 온 가족이 하루 품을 버리고 도시로 나가야 하는 데다, 한국 관광객들이 그 사람들 사진 찍어도 우리 안에 갇힌 전시물로밖에 안 본단 말예요. ‘왜 남조선 아이들은 사진을 찍어만 가고 주지를 않느냐’고 할머니들에게 된통 당했어요.” 꼭 돌려주겠다는 그 약속을 그는 7년 가까이 지키고 있습니다. 허파에 새벽 바람이 잔뜩 침입한 그 표정으로 한 해 두세 번씩 무거운 여행 가방을 꾸립니다.

(위) 치주암으로 아랫니 반쪽을 들어냈을 때도 그는 마스크를 한 채 광주공원에 나와 사람을 찍었다. 우리의 ‘앞모습’이자 ‘뒷모습’인 노인들의 사진이었다. 고초의 시간을 이겨낸 그의 맑은 미소.

어쩌면 고려인들은 우리를 아프게, 부끄럽게 하는 삶의 흉터 자국입니다. 좀 길지만, 꼭 들여다봐야 할 이 흉터 자국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1937년 강제이주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고려인의 후손 55만여 명이 지금 그 땅에 살고 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에 19만여 명, 카자흐스탄에 10만여 명, 그리고 러시아 등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타고난 근면과 성실로 소련 연방이 자랑하는 노력 영웅 중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충실한 삶을 꾸렸습니다. 하지만 1991년 소련 붕괴 후 회교도분리주의(민족주의)로 돌아간 중앙아시아인들에게 많은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공용 언어였던 러시아어의 폐지와 자국 민족어 사용, 공공 비용의 차별 책정 등). 이로 인해 제2의 고향인 연해주로 다시 이주하는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키르키즈스탄에 가서 최마리아란 할머니를 만났는데, 모스코바 유학까지 마친 엘리트 출신이 지금은 땔감 찾으러 쓰레기통을 뒤지며 살고 있어요. 남편도 고급 관리직이었다는데 회교도 민족 정책으로 직장을 잃고, 외아들이 재산 탕진하고 마약에 빠져버려 인생이 엉망진창이 된 거지. 한겨울에 영하 40℃까지 내려가는 곳인데, 혹한을 버텨낼 연료로 종이 상자를 줍고 다닌다 말입니다. 집은 땔감으로 쓸 쓰레기 더미로 가득 차 앉을 데가 없어요.” 박재완 씨 방 벽에는 최마리아 할머니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가뭄 못자리처럼 쪼글쪼글한 살가죽, 허공을 헤매는 듯한 눈동자. 썩은 풀더미 같은 세월 끝에 우리에게 돌아온 그들의 얼굴입니다.


격주 화요일 2시, 남광주역 한 귀퉁이에 임시 설치하는 사진 촬영소. 어머니들은 아침 8시부터 기다리다 사진 한 방 박고 가신다. 이날만은 새색시처럼 곱게 화장도 하고 한복도 입으신다. 가끔 바지에 저고리를 입은 어머니도 계시지만.

“고려인 중엔 그렇게 힘들게 사는 이들이 수두룩한데 그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죽기 전에 고국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거예요. 그런데 더 문제는 이 고려인들이 ‘국적 불명’이라 그 말입니다. 여러 번 이주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고 만 거라. 우리가 그들에게 해준 건 겨우 3년짜리 비자야. 그것도 옛날에는 6개월짜리였다데.” 이 역시 우리에게 돌아온 그들의 얼굴입니다. 지금도 그들은 ‘아버지 나라’에게서 자신들이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잠시 길을 잃은 것뿐이라고 믿어주는지도 모릅니다.
“1.5세대 정도까지만 겨우 우리 말 안다 말입니다. 2세대 이후 후손들은 러시아 말 쓰고 그 나라 문화 방식으로 살기 때문에, 하바로스크 시내에 우리 유적이 지천에 있어도 ‘광개토대왕’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돼가고 있어요. 우리가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 세대에 해준 게 없으니 그 아들딸, 손자 세대의 소원이라도 들어줘야 하지 않나? 자기 뿌리라도 확인하게 맹글어줘야지.” 그는 요즘 그 잊혀진 사람들의 기록을 담기 위해 6mm 카메라 촬영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들까지 저 세상 돌아간 후 담는 역사는 왜곡된 역사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나직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는 따뜻한 온수처럼 가슴에 오래 고여 있을 것 같습니다.


1 키르키즈스탄에서 폐지 줍고 사는 고려인 최마리아 할머니.


2 러시아인들이 전기 시설물과 계단의 철 난간까지 모두 뜯어 간 건물에 사는 고려인도 많다. 그 앞에서 고려인 가족의 ‘행복 사진’을 찍었다.

남도 아니지만 나는 더더욱 아닌, 우리 그가 카메라 렌즈에 담는 또 다른 우리의 얼굴은 바로 코피노 Kophino(한국인과 필리핀의 혼혈)입니다. 한국인이 쾌락을 좇다 떠난 자리에 버려진, 이 필리핀 판 ‘어둠의 자식들’은 미혼모 밑에서 교육도 받지 못한 채 길거리에 방기되고 있습니다. 공식적인 통계는 없지만 1만 명 정도의 코피노가 있는 것으로 헤아려집니다. “내가 만난 한 미혼모는 아이가 셋인데, 아이 아빠가 모두 다르고, 그들은 모두 한국 남성이었어요. 그 미혼모는 한국 남자를, 그 아이들은 아버지 나라를 어떻게 볼까? 바람둥이 나라? 우린 뭘 해줘야지?” 남도 아니지만 나는 더더욱 아닌, 고맙지도 사랑하지도 않고 미치겠지도 않은 이들. 하지만 이들도 내 손 닿지 못할 곳으로 가버렸을 때 그제야 둔중한 슬픔을 느끼게 될 우리 피붙이입니다.
“현지에 파견된 한국 단체들이 그 사람들을 돕긴 하지만, 그 도움이란 게 쌀 한 됫박, 두 됫박씩 퍼주는 거야. 그건 누가 봐도 거지 양성소 아닌가. 나는 돈 생기면 필리핀이나 중앙아시아에 사진 기술학교 만들어가지고 6개월이고 1년이고 아이들 데려다가 가르쳐 자립하게 만들고 싶어요. 필리핀 미혼모들에게 사진 가르치면 웨딩 포토 같은 거 하면서 카메라 한 대로 한 가족은 먹고사는 거잖아. 우리나라 열 사람이 한 오십만 원씩만 모아주면 중고 카메라 다섯 개는 사거든. 거기에 한 백오십, 이백만 원이면 웬만한 촬영 세트 만들어요. 그렇게 기술학교 같은 거 만들어서 장기투자를 해야지. 돈 천 원, 쌀 한 됫박 줄 게 아니라.” 동사무소 주사처럼 낙진낙진한 그의 말투에 갑자기 쇳소리가 스쳐 갑니다.


3 그는 이 영정 사진이 죽음을 재촉하는 사진이 아니라 죽음 이후 남겨지는 자신의 모습을 준비하고 오랫동안 건강하라는 뜻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장수 사진’이라고 부른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는데, 인상이 고약한 어른은 온화하고 선한 인상으로 만들어주려고 포토샵 작업에 공을 들인다.
4 최근 그는 고려인과 코피노들의 사진을 모아 전시를 열었는데, 우리 얼이 담긴 한지에 우리가 잠시 잊고 산 그들의 사진을 인화했다. 모자는 영정 사진을 찍은 고려인이 그에게 선물한 것.



5 광주공원에서 봄볕에 해바라기하는 어르신들도 그의 카메라 렌즈에 담긴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사이는 삶과 죽음을 함께하는 사이라지요? 부모에게 생명을 받아 삶을 이어온 자식, 그 자식에게 자기 육신을, 죽음을 맡긴 부모 같은. 남광주역 한 귀퉁이에서, 중앙아시아 우스리스크의 산기슭에서, 필리핀의 바닷가에서 그는 바로 세상에서 가장 깊은 사이, 피붙이를 만난 겁니다. 우리가 잊고 산 동안 찬 바람에 홑겹의 살을 죄다 물어뜯긴 우리 피붙이들.
이야기가 끝이 났습니다. 해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어느새 산허리를 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돌아온 그들’을 보듬는 그 앞에, 새경도 없이 묵묵히 밭을 가는 농부처럼 사진 찍는 그 앞에 빨간 양탄자라도 깔아주고 싶습니다. 여전히 더 기쁜 사진을 내놓고 싶어 포토샵 기술을 연마하며 6mm 카메라 촬영술을 배우는 그 쉰아홉 살의 정열에.
그의 뜨거운 카메라 앞에 앉은 어머니들, 한복 허리께 밑으로 비단 치마 대신 고쟁이 몸뻬가 드러난 어머니들을 바라보자니, 또 내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눈이 빨개지도록 산철쭉 흐드러지던 지난봄, 장수 사진 한 방 박고 오셨다는 내 어머니. “나 죽거든 울 거 없다. 나 영정 사진 속에서 웃을 테니까 그거 보면서 너도 웃어라” 하던, “조문 오는 사람들한테도 ‘엄마 웃으시는 거 보면서 울지 마시랬어요’ 하고 전하라던 우리 어머니 생각 납니다. 오늘도 나는 그저 습관처럼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별일 없냐는 싱거운 안부로 끝을 맺고 맙니다.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