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여류화가 시리즈]삶을 예술로 산 여성들 나는 살기 위해 자화상을 그렸다
늘 열세였던 여성이 예술을 하려면 남자보다 훨씬 과감한 모험을 해야 했다. 모험은 파란만장했다. 척박한 땅에서 나무가 뿌리를 깊게 내리듯, 그들은 척박한 세상에 더욱 열렬하게 예술을 심었다. 필부 匹婦로 살아온 우리도 그들이 삶을 헤쳐나간 자세를 배우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여성 미술가의 삶과 예술을 조망해 오늘의 삶을 비옥하게 하는 시리즈를 기획했다. 첫 번째 시리즈로 자화상을 그린 여성 미술가들을 추적해본다. 미술사에 기록된 최초의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자신을 그린 케테 콜비츠, 임신한 자신의 나체를 그린 파울라 모더존-베커, 전쟁처럼 지독한 사랑의 흔적을 그린 프리다 칼로. 자화상은 이렇듯 극적인 삶을 견디기 위한 극약 처방이었다고 한다. 미술평론가 유경희 씨가 무덤에서 잠든 그들을 깨워 시공을 초월한 가상 인터뷰를 했다.

유경희 시공을 뛰어넘는 저의 초대에 응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여러분은 여자도 남자도 자신의 동지가 되어줄 수 없는 세상에서 짱짱하게 살아남은 예술가들입니다. 아 참! 살아온 시공이 다른 여러분은 서로 인사를 나눈 적이 없으시겠네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프리다 칼로, 케테 콜비츠, 파울라 모더존-베커를 소개합니다.

주홍글씨로 자유를 그린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유경희
자극적인 얘기입니다만,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당신은 자화상을 남자에 대한 복수의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평을 듣지 않았나요?
젠틸레스키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 제가 그림을 복수의 도구로 쓴 매우 과격하고 졸렬한 여자 같네요. 나는 열아홉 살 때, 화가인 아버지의 친구이자 내게 그림을 가르쳐준 아고스티노 티시라는 남자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아버지가 그를 고소했고 이 사건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어요. 어쨌거나 17세기에 강간 사건으로 유명해진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지요. 여자로서의 삶을 포기했다는 의미죠.
유경희 미술사에서 당신은 그저 당대의 화가 카라바조의 아류 정도로 여기는 것 같더군요. 우리는 은연중에 남성 중심의 시각으로 여성미술가의 작품을 보고 있었던 거예요. 여성은 진정 위대하고 독창적인 작품을 창조한 적이 없다는 것을 정설로 여기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당신의 작품을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남성 중심 사회에서 너무도 당당하게 자신의 독창적인 세계를 펼쳐냈더군요. 특히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연작이 그렇지요.

(위) ‘자화상을 그리는 마르시아’, 작자 미상, 1402

(왼쪽) ‘자화상’,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1635~1637
(오른쪽)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1620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Artemisia Gentileschi
1593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난 그는 서양 최초의 여성 화가로 기록되어 있다. 화가인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의 영향으로 일찍이 그림을 그렸다. 스승인 아고스티노 티시에게 강간당한 기억이 그의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성서의 한 장면인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시리즈로 그의 독창적인 시각과 재능을 세상에 알렸다.

젠틸레스키 이 작품은 강간 사건의 소송 중 고통스러울 때 그렸어요. 이 그림을 두고 제가 강간에 대한 보복을 했다는 해석이 많습니다.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지요. 홀로페르네스(성서 속 인물로 이스라엘 민족을 침략한 아시리아의 장군)에 티시의 얼굴을 그려 넣었고, 유디트(이스라엘 민족을 구하려고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해 목을 벤 여인)의 행동을 통해 나의 심정을 말한 것은 사실이니까요.
유경희 남성과 여성 예술가가 그린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는 많이 다르지요. 특히 당신이 그린 유디트는 여느 유디트와 달리 신선해요. 남성들은 유디트의 순결과 순종의 미덕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적장을 유혹할 만한 미모를 부각해 에로틱하고 선정적으로 그려냈죠. 반면 당신의 유디트는 결코 아름답지 않아요. 이미 당신은 복수를 감행하고 있는 무서운 여자로 변해 있더란 말입니다.
젠틸레스키 잘 보셨어요. 저는 저를 여성스럽게 그리는 것을 혐오했어요. 내가 만약 화가가 아니었더라면, 그리하여 이런 방식으로 그리지 않았더라면 고통을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 그림이 나를 절대적으로 치유했지요. 미스 유, 그 시절 여성 작가들의 자화상이 어땠는지 알아요? 요조숙녀 혹은 교양 있는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악기나 책을 들고 있는 자화상, 화가로서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붓을 들고 있는 자화상이 교과서였지요. 나 역시 붓을 든 자화상을 그렸지만, 화면과 적극적으로 대결하는 과감한 구도를 시도했죠.
유경희 이 작품에는 함께 살인하는 파트너인 시종이 등장해요. 그의 비중 또한 만만치 않은데, 이유가 뭔가요?
젠틸레스키 아, 사정이 있답니다. 제가 법정에 섰을 때 거짓 진술한 한 친구의 배반으로 죽을 만큼 괴롭고 외로웠죠. 그림에서나마 나와 뜻을 같이하는 동지(sisterhood)를 만들었다고 보시면 돼요.
유경희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마음, 혐오하는 마음, 분노하는 마음, 즉 파괴와 파탄으로 가득 찬 마음이 예술의 원동력이라고 해요. 외람된 이야기지만 당신 가슴에 새겨진 주홍글씨가 오히려 당신을 자유롭게 한 것이 아닌가 싶군요.

 
(왼쪽) ‘자화상’, 파울라 모더존-베커, 1906
(오른쪽) ‘자화상’, 케테 콜비츠, 1891



‘자화상’, 케테 콜비츠, 1924

케테 콜비츠 Kathe Schmidt Kollwitz
1867년 독일에서 태어난 그를 이야기하려면 우선 목 판화 작업을 소개해야 한다. 판화 작업을 택한 이유는 작품을 손쉽게 복제해서 고통받는 민중을 위무하기 위해서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는 동안 판화와 목탄화를 통해 여성의 눈으로 본 참혹한 세상을 그렸다.

파울라 모더존-베커 Paula Modersohn-Becker
1876년 독일에서 태어난 표현주의 작가. 파리 외딴방에서 작업에 몰두하던 그는 결혼 6주년을 기념해 자화상을 그렸는데 임신부도 아니면서 자신을 임신부로 묘사하고, 더군다나 반나체였다. 질박한 색감으로 모성애를 다룬 작품을 많이 그렸으며, 둘째 딸을 낳다가 서른한 살의 나이에 산후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잃은 어미의 자화상, 케테 콜비츠
유경희 저쪽 구석에 과묵하게 앉아 계신 케테 콜비츠! 당신은 무척 조용하고 말을 아끼시는 것 같네요. 자화상도 참 음울해 보여요.
케테 콜비츠 음…, 전 1891년 의사와 결혼한 뒤 베를린의 가난한 노동자 지역에서 살았어요. 불안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가난한 노동자, 억압을 감내하는 부녀자들, 의지할 곳 없는 어린이들을 그렸지요. 그중에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아들 페터가 전사한 뒤에 그린 목탄 자화상이 있어요. 자식에 대한 연민과 삶의 회한이 범벅된 시절이었어요.
유경희 전쟁의 참상이나 가족의 죽음이 직접 드러나지 않은 작품도 참 우울한 느낌이 들어요.전쟁이 휩쓸고 간 그 시대에 낙관주의자가 되기란 어렵겠지만요. 저는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미를 그린 소묘 드로잉을 좋아하는데, 그 그림도 당신의 자화상처럼 느껴집니다. 그 어미의 통곡이 제 몸에 뭉클하게 전해져 옵니다.
임신한 여자를 찬미한 파울라 모더존-베커
유경희 콜비츠와 거의 동시대 작가인 파울라 모더존-베커의 임신한 자화상도 잊히지 않습니다. 실물 크기의 나체 자화상이라니! 파울라, 당신은 임신하지 않았을 때도 임신한 자화상을 그렸다고 들었어요. 모성에 천착한 건가요?
모더존-베커 저는 예술가로서의 자기표현과 아내로서의 책임감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했어요. 그러다 여성 예술가로서 나만이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매우 소중하다는 결론을 내렸죠. 특히 임신과 수유 같은 여성성에 희열을 느꼈답니다. 그래서 제 작품은 비판적이지 않고 소박하며 천진하다는 평도 받습니다.아마 저의 반누드 자화상을 보면 여기 계신 세 분들은 저를 못마땅하게 여기실 겁니다.
유경희 그래서 자화상에서 강박관념이나 통렬한 풍자가 보이지 않는군요. 불행히도 서른한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딸을 낳은 지 3주 후 산후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이 남긴 독창적인 자화상은 20세기가 낳은 가장 뛰어난 자화상 중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음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왼쪽) ‘멕시코와 미국 간 경계선 위의 자화상’(부분), 프리다 칼로, 1932
(오른쪽) ‘디에고와 나’, 프리다 칼로, 1946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1907년 멕시코에서 태어난 그는 현실주의, 초현실주의, 상징주의와 멕시코 토속 문화를 결합한 작품을 제작했다. 열렬한 공산주의 지지자였으며, 멕시코의 국민 화가이자 혁명가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였다. 여섯 살 때 소아마비에 걸리고, 열여덟 살 때 그가 탄 버스가 기차와 충돌하는 사고를 당해 척추에 철골을 넣는 대수술을 받았다. 생전에 그린 총 1백43점의 작품 중 55점이 자화상일 정도로 그는 자신의 초상을 통해 불안정한 시대 정황을, 자신의 인생과 사랑을 그려냈다.

전쟁 같은 사랑을 그린 프리다 칼로
유경희 오늘도 의상이 독특하군요. 움직이는 설치 미술품 같다고나 할까! 자화상 하면 프리다 칼로 당신이지요. 이만큼 대중을 강력하게 흡입한 자화상은 전무후무할 겁니다. 프리다! 왜 자화상을 그리죠?
칼로 뭐…, 특별히 자화상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지요. 과일이든 원숭이든 모두 나를 표현하고 있으니까 전부가 자화상인 셈이죠. 이유라…! 나는 혼자이며, ‘나’란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기 때문이죠.
유경희 당신의 작품은 직접 겪은 감정과 사건을 곁들인 초상화, 좀 더 확대된 의미에서의 자화상이죠.특별히 애정이 가는 작품이 있나요?
칼로 에이, 그런 거 없어요. 좀 더 기억에 남는 자화상이라면 남성복을 입고 머리를 자른 자화상! 아시다시피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바람기는 유명했죠. 내 분신과도 같은 친여동생 크리스티나하고까지 관계를 맺었으니 말이에요.‘머리를 자른 자화상’에는 “보세요.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머리 때문이지요. 이제 당신이 대머리니까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라고 썼지요. 나는 여기에서 긴 머리도, 치렁치렁한 의상도 벗어던졌어요. 쓸모없어진 내 여성성을 비참하게 거세해버린 거죠. 제가 남성복에 어울리지 않는 여성용 구두와 귀고리를 착용하고 있는 것도 눈치 채셨죠? 이제 여성도 남성도 아닌 존재가 되기로 한 것입니다.
유경희 맞아요. 당신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어요. 당신이 어떤 젊은 여인과 테라스에서 묘한 분위기로 대화하더니, 마치 사랑을 나누러 떠나는 여자처럼 들뜬 표정으로 카메라를 살짝 의식하면서 문 닫는 모습을 보았죠. 어찌나 황홀하던지! 영화 <프리다>에서도 당신이 등을 화끈하게 드러낸 드레스를 입은 연인 티나 모도티(애슐리 주드가 연기)와 탱고를 추는 장면이 나오는데, 남녀의 탱고보다 훨씬 더 기묘한 에로티시즘을 느꼈어요.
칼로 하하! 영화는 과장되기 마련인데, 그렇다 해도 영화가 극적인 내 삶을 따라오지 못할 겁니다. 그 질곡의 시대에 예술을 하겠다고 모인 사람들의 열정, 얼마나 엄청났겠어요? 극단만 있고 중간은 없었죠.
유경희 뭐니 뭐니 해도 백미는 디에고의 얼굴을 당신의 이마에 그려 넣은 자화상이 아닐까요.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를 신처럼 묘사한 거죠?
칼로 내 작품은 그냥 드러난 그대로예요. ‘디에고와 나’라는 작품에서는 디에고를 지혜의 눈이 있는 신화적 존재로 묘사했지요. 그리고 저는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보았자 디에고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유경희 자, 여러분의 자화상을 보면서 확실히 정리되는 게 딱 하나 있네요. 당신들의 삶과 예술이 일치되어 있다는 것! 니체가 그랬죠. ‘오로지 하나의 세계가 있나니 그것은 체험의 세계’라고요. 여러분은 어떤 화가보다 처절하리만큼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죠. 삶이 고통과 상처로 점철되었지만, 연금술처럼 승화되어 예술의 원동력이 되었고요. 여러분에게 힘겨웠던 인생은 세기에 남을 예술의 비옥한 밑거름이었고, 그 예술은 우리 보통 사람들의 버거운 삶을 어루만지는 엄청난 치유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글을 쓴 유경희 씨는 미술 잡지 기자와 큐레이터를 거쳐 현재 미술평론가이자 전업 글쟁이로 일한다. 예술을 미학과 정신분석학 관점에서 접근한 글을 쓰고 강의를 한다. 책 <테마가 있는 미술 여행> <예술가의 뮤즈>를 통해 동전의 양면 같은 인생과 예술을 이야기한다.

나도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