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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사진의 거장, 유섭 카쉬 전 카메라 앞에서 짓는 그들의 웃음은 우리 쪽을 향한 게 아니었다
사람만 한 풍경이 어디 있으랴. 사람만큼 만만치 않은 존재 이유와 미감을 지닌 피사체가 어디 있으랴. 사람이라는 피사체는 단지 물리적 존재를 뛰어넘는 ‘정신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인물 초상 사진으로 이름 높은 유섭 카쉬 Yousuf Karsh(1908~2002). 그는 1930년대부터 총 1만 5천3백12명, 특히 매킨지 킹 이후의 모든 캐나다 수상, 드골 대통령 이후의 모든 프랑스 대통령, 처칠 이후의 모든 영국 수상, 허버트 후버 이후의 모든 미국 대통령, 왕실 가족, 종교 지도자, 예술가 등을 찍은 명실상부한 인물 사진의 거장이다. 인물이 사는 공간으로 찾아가 인물을 둘러싼 시대적 환경까지 전하려 한 그의 사진에서 우리는 그들 삶의 극적인 다큐멘터리, 얼굴에 담긴 정신을 발견한다. 묘하게도 그들의 눈빛과 웃음은 우리 쪽이 아닌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 같다. 거울 앞에 선 자신만의 포즈라고 할까. 그가 우리에게 선물한 또 하나의 감흥이다. <유섭 카쉬>전에서는 그가 카메라에 담은 유명인의 초상 4천여 작품 중 90여 점을 선보인다. 특히 카쉬가 직접 만든 빈티지 필름을 공개하는데, 보스턴 미술관 큐레이터가 화물칸에 함께 탑승해 들여올 정도로 귀한 작품들이다. 3월 4일부터 5월 8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문의 1544-1681

(왼쪽)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악몽과도 같았다.” 피카소를 촬영하기 위해 그의 저택을 방문했던 카쉬의 고백이다.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캔버스가 가득한 방들을 누비고 다니는 집이었기 때문에 그는 집에서의 촬영을 포기했다. 대신 미술관에서
촬영하기 위해 90kg이 넘는 장비를 끌고 도착하자 미술관 관계자들은 “피카소는 절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피카소는 약속한 시간에, 새로 산 셔츠까지 입고 나타났다. 게다가 렌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알아서 구도까지 잡아 앉아주는 ‘젠틀맨’ 피카소.
(사진) Yousuf Karsh, Pablo Picasso, 1954, gelatin silver print


(왼쪽) 소피아 로렌 Sophia Loren
“소피아 로렌처럼 지성과 프로 근성, 아름다움을 갖춘 여배우를 촬영하는 건 매우 즐거운 작업이다.” 1981년 소피아 로렌을 촬영한 카쉬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진은 소피아 로렌의 파리 아파트에서 이른 오후에 찍은 작품이다. 작업이 끝나갈 무렵 학교에서 아이들이 돌아왔고, 모자간에 강물처럼 넘쳐나는 사랑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고 술회한다.
(사진) Yousuf Karsh, Sophia Loren, 1957, chromogenic print

(오른쪽) 파블로 카잘스 Pablo Casals
1954년 카쉬는 프랑스 남부 도시의 수도원에서 세계적인 첼로 거장 파블로 카잘스를 만났다. 그의 바흐 연주가 너무나 감동스러워 잠시 촬영을 잊었을 정도로 심취한 카쉬는 “지금까지 자신을 등지고 있는 사람을 찍은 적이 없지만, 카잘스에게는 왠지 그런 구도가 맞는 것 같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국에서 추방당한 예술가는 텅 빈 방에서 카메라를 등진 채 파인더 안에 담겼다. 몇 년 후 보스턴 박물관에 매일같이 카잘스의 사진을 보러 오는 노신사가 있었는데, 이유를 묻는 큐레이터에게 노신사는 한마디만 남겼다.
“조용히 하시게. 지금 내가 음악을 듣고 있는 것이 안 보이는가!”
(사진) Yousuf Karsh, Pablo Casals, 1954, gelatin silver print


(왼쪽) 윈스턴 처칠 Winston Churchill
1941년, 후원자인 캐나다 수상의 주선으로 캐나다 방문 중인 처칠을 찍었다. 카쉬는 “처칠이 영감을 준 순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 싸우기로 한 영국의 결정에 대해 프랑스 장교가 ‘교전 3주 내에 영국은 병아리
모가지처럼 비틀어질 것이다’라고 한 발언 이후 그의 반응이었다. ‘웬 병아리, 웬 모가지!’라는 도전적인 표정에서 영감을 얻었다”라고 썼다. 카쉬는 촬영 중 담배를 내려놓지 않는 처칠에게 다가가 용서를 구하며 시가를 빼앗았다. 화가 치민 듯한 표정의 처칠을 보고 카쉬는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적막 후 처칠의 한마디는 “한 장 더 찍게. 당신은 으르렁거리는 사자도 가만히 사진을 찍게 할 수 있군.” 작품 제목은 ‘으르렁거리는 사자’로 정해졌다.
(사진) Yousuf Karsh, Winston Churchill, 1957, gelatin silver print

(오른쪽) 오드리 헵번 Audrey Hepburn
1956년 미국 할리우드에서 처음 만난 카쉬와 오드리 헵번. “당신의 내면에는 상처받기 쉬운 연약함이 보입니다”라고 카쉬가 이야기하자, 헵번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자신이 겪은 어두운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헵번의 이미지 이면에 담긴 모습을 포착한 카쉬의 작품이 공개된 후, 한 유명인이 오드리 헵번만큼 자신도 아름답게 촬영해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는 일화도 있다.
(사진) Yousuf Karsh, Audrey Hepburn, 1957, gelatin silver print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