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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실직]중년 실직을 두 번 경험한 인생 선배의 조언 볏단처럼 서로 기대어 겨울을 난다면
유미자 씨의 남편은 IMF 위기로 일터를 잃었다. 그 뒤 다시 일어섰지만 이번 경제 한파로 또 휘청거린다. 실직은 한 번 겪었더라도 초연해지기 어렵다. 그래도 ‘당신’ 덕분에 이 겨울을 난다.
소규모 건설 회사 오너인 남편은 이번 경제 한파로 일터를 잃었다. 건축주가 은행에 대출을 신청했고 공사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는데, 결국 지난여름부터 추진해온 공사는 첫 삽도 뜨지 못하고 무산되었다. 경제가 나빠지면 제일 먼저 건축 시장이 직격탄을 맞는다. 그의 얼굴은 담담해 보였지만 그 속을 왜 모르랴. 몇 날 며칠 설계도면과 씨름하고 견적을 뽑으며 전전긍긍하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았잖은가.
그간 남편은 조간신문이 도착하기 전에 출근했다. 오너이지만, 현장소장으로 불러주기를 더 바랐다. 인부들보다 먼저 출근한다는 원칙을 사수하는 사람이었다. 쉼 없는 성실함은 남편 손에 쇠못 같은 굳은살을 새겼다. 남편은 아침 식사도 현장 부근의 식당에서 인부들과 함께 했었다. 집에서 식사를 할 수도 있었지만 직원들과 동고동락하기 위해서였다. 더 이상 졸린 눈을 비비며 남편을 배웅하지 않아도 되었고 새벽길 운전에 조마조마하지 않아도 되었다.
남편의 실직이 처음은 아니다. IMF 외환 위기가 닥치기 전, 그 당시 남편은 독립을 해서 조그만 건설 회사를 꾸려가고 있었다. 그즈음 나는 간에 적신호가 와서 직장을 그만두었다. 남편은 “집에서 글 쓰면서 내 일이나 조금씩 도와줘”라며 어느 때보다 의욕에 차 있었다. 막 발돋움을 하려는데 IMF 외환 위기가 남편을 한순간에 주저앉혔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두 아이는 아빠가 주부처럼 집안일을 하는 걸 불만스러워했다. 남편은 ‘곧 좋아지겠지’하며 스스로를 다잡았지만 상황은 더 악화되어갔다. 일감이 대폭 줄어들면서 가계를 꾸리기 힘들어졌다. 당장 아이들 학원비가 걱정되었다. 나는 집 근처의 작은 어린이집에 일자리를 얻었다. 젊은 교사들의 틈바구니에서 내세울 경력도 없었다. 다만 그들보다 더 열심히 일할 뿐. 오전 수업을 마치고 오후에는 격일제로 종일반을 돌보았다. 의사가 과로와 스트레스를 조심하라고 했지만 내 몸을 돌볼 형편이 아니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돌아보니 어느새 IMF 외환 위기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리고 10여 년 후, 또다시 경제 위기가 왔다. 그때의 일들이 악몽처럼 떠오른다. 우선 대학생인 두 아이를 앉히고 찬찬히 일렀다. “당분간은 너희들 용돈도 제대로 줄 수 없을 거야. IMF 때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고 오래 견뎌야 할지 몰라.” 말을 마치자 큰아이는 “엄마, 저 군 입대 지원했어요” 한다. 군대는 대학을 졸업하고 갈 거라며 자기 진로를 똑 부러지게 말하던 아이였는데 갑자기 계획을 바꾼 것이다. “엄마, 10년 전엔 저희가 어렸지만 지금은 알아서 이겨나갈 수 있어요.” 옆에 있던 딸아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 말에 ‘이제 다 컸구나’ 하고 마음이 놓이면서도 부모로서 제 역할을 못한 것 같아 속상했다. 한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보다도 남편의 압박감이 더 클 것임이 분명했다. 남편한테 일은 생계 수단이기도 하지만 살아가는 이유이니 말이다.
하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언 땅을 뚫고 새싹이 돋아나겠지. 볏단처럼 서로에게 기대어 당신 덕분에 겨울을 날 수 있었다고 고백할 날이 오겠지. 10년 전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는다 해도 두렵지 않다. 집에서 책 읽으며 글을 쓰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지만 조금 늦어지면 어떤가. 넘어진 사람만이 일어설 수 있고 다시 걸을 수 있듯 또다시 시작하는 것뿐이리라. 남편과 아이들의 손을 잡고 걸을 수 있다면, 세파에 휩쓸릴지는 몰라도 인생에서는 결코 패배하지 않으리라.
생활 정보 신문을 이리저리 뒤적이는 내게 남편이 조심스레 말했다. “당신은 옆에 있기만 하면 돼.” ‘당신, 옆’. 이 평범하고 단순한 말 한마디에 내 목울대가 꿈틀했다.

유미자(수필가)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