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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는 어부 김영현 씨 아버지의 바다 아버지의 노래
1만 명의 시인이 산다는 대한민국에서 1년에 시집 한 권 읽는 게 어렵지만, 그의 시는 꼭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부의 눈으로 바다를 노래한 그의 시는 홍역 같은 삶을 산 우리 아버지의 노래 같기 때문입니다.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그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인, 아버지의 노래입니다. 이 글을 읽으며 시 읽는 마음을, 그리고 아버지를 그리는 마음을 되찾기를 바랍니다.

‘내 어렸을 때 아버지는 이름난 뱃꾼이라 / 운수 좋으나 싫으나 밖으로만 맴도시니 / 바다 험하게 기침하는 날이면 / 만날 수 없었다 / 항상 파도에 묻혀 떠나시고 / 뱃머리를 떠다니시고 / 목로를 떠다니시고 / 돌아오신 기척에 방문을 열면 / 구들장 가득 둥둥 떠다니신다 / 절은 풍상 다 패었어도 / 떠내려가는 내 손목 잡고 / 길목을 잡고 가슴을 잡고 / 물질 속살 갈라 빗장 풀어내는 소리 / 눈으로 가르치셨다 / 나는 험한 세상 항해하는 곳에도 / 아버지 떠다니시던 황망한 난바다에도 / 가보지 못한 채 / 흐드러진 파도를 기웃거리고 / 뱃머리를 기웃거리고 / 목로를 기웃거리고 / 돌아와 방문을 걸어 빗장을 치고 / 곤히 잠든 내 아이에게 / 아버지가 일러주시던 항해법을 / 가르치고 가르치고.

’그의 시 ‘아버지’를 읽다 마음이 허기진 저녁,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돌 맴돕니다. 태아처럼 리모컨을 꼭 쥔 채 웅크리고 잠든 아버지, 이불 덮어주러 온 딸년 때문에 일부러 코를 고는 우리 아버지 생각이 나서 눈물이 맴돕니다. 주문진에 가면 시 쓰는 어부가 있다고, 십수 년 동안 인터뷰한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손석희 교수가 브론즈 마우스(MBC 라디오를 10년 동안 이끈 진행자에게 수여하는 상) 수상 때 한 인터뷰를 보고 무작정 그를 찾아 나섰습니다(서릿발 같은 이성을 가진 손석희 교수의 가슴을 녹인 이가 대체 누구일까 궁금했습니다). 소도시 강릉의 고적한 공기 속, 빈약한 나무들의 병풍에 둘러싸인 5층짜리 아파트에 그가 살고 있었습니다. 누렁이 한 마리 짖지 않는 홀아비의 집, 그 집 차디찬 냉골에 주저앉는 내게 그가 아버지처럼 물었습니다.
“밥은 먹고 다니냐?” 그의 집에도 방마다 그득그득 자식과 친구들로 넘쳐나던 때가, 그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그들의 늦잠을 채근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만 덩그러니 이 집에 남았습니다. 혼자인 그가 검버섯 가득한 손으로 다독이는 건 떠나고, 떠나서는 돌아올 줄 모르는 이들입니다. 시집간 큰딸, 헤어진 마누라, 엄마 옆에서 사는 작은딸, 빈손이 된 그를 떠나간 벗들…. 3년 전, 갑작스럽게 사업(광어 가두리 양식업)을 접고 졸지에 빈손이 된 그는 혼자 남았습니다. 그 마음의 울화와 술은 구슬픈 육체를 묶어버렸고, 신장・복막・대장・심장・혈관 곳곳에 병증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마룻바닥에 고목 쓰러지는 소리를 내며 쓰러진 그는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진 후에야 이 쓸쓸한 거실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홀로 앉아 가난의 먼지 닦아내야 하는 이 작은 거실에서 그는 시를 씁니다. 새벽이고 한밤중이고 떠오르는 한 줄 시상을 종이에 옮기다 보면 마음의 울화도 시가 되고, 해물국숫집에서 만난 오랍들이(‘이웃’의 강원도 사투리) 이야기도, 봄날 물잡이 나갔다 공치고 돌아온 어부들 푸념도 시가 됩니다. 라디오만 그 곁에서 덤덤히 봄 소식을 전합니다.

예순셋의 나이에 첫 시집 <바다의 일생>을 펴낸 시인은 홀로 사는 이 집에서 밤마다 시를 쓴다. 그건 모두 바다와 어부의 이야기. 그래서 유일한 ‘어부 시’라고 할 만하다.

‘바다 잘 보이는 언덕 / 등대길 따라 다닥다닥 붙은 / 동해 바닷가 집들이 / 군데군데 이빨 빠진 듯 / 텅 비었어 / 숭숭 뚫린 벽 구멍 사이 / 소금 잔뜩 움켜쥔 / 바람만 살아 좁은 방 곳곳 / 두런두런 속삭이고 있어 / 바다로 고기잡이 떠난 아들 / 행여 길 잃어 집 못 찾을까 / 늙어 찌드러진 어미가 / 사립문 열어놓고 넓게 높이.’(‘동해 바닷가 집’) 그의 시엔 물 빠진 모래 둔덕처럼 주름 깊은 어부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그가 보고 듣고 견뎌낸 건 어부의 찢어진 그물뿐이기 때문입니다. 주문진에서 나고 자라 주문진수산고등학교 어로과(지금은 강원도립대가 된)를 졸업한 그는 1년에 몇 번씩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곤 했습니다. 잡아온 고기를 받아다 장사하는 일도 했지만, 벌이가 잘되지 않아 그는 다시 바다로 떠났습니다. 한 번 나가면 40일씩 걸리는 배를 타고 시베리아 테화테라는 어장에 가서 오징어 2천~3천 마리를 잡아오곤 했습니다.

뱃길에서 생애 가장 무서운 태풍도 만났습니다. 배가 폭풍에 밀려 북한 경계선까지 들어가고, 사람도 많이 죽고, 그래서 그 일 이후 공포가 생겨서 배를 안 탄 사람도 많았다는군요. 그렇게 몇 년 바다에서 보낸 그는 가두리 양식장을 하면서 육지에 눌러앉게 되었습니다. 전국에서 두 번째로 시작한 광어 가두리 양식업은 바닷물을 육지로 끌어 올려서 광어 치어를 1년 반 정도 키워 파는 일이었습니다. 20년 넘게 양식업을 하며 주문진의 알부자가 됐고, 필리핀에 섬도 하나 샀다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3년 전, 갑작스럽게 모든 사업을 접고 빈손이 된 그는 평생을 살아온 주문진을 떠나 강릉의 아파트에 철새처럼 깃들였습니다. “태풍 오기 전의 바다가 얼마나 고요한지 알아요? 그릇에 물 떠놓은 것 같아요. 아주 작은 소리로 ‘야’ 이러는데도 천 리 밖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바늘 하나 떨어뜨려도 달그락거릴 것 같은데, 그다음 날엔 난리가 나죠. 3년 전까지의 내 인생, 아마도 태풍 전이었나 봐.” 실패의 시간 후 삶의 끝자락까지 걸어본 김영현 시인. 병마를 훌훌 털고 그동안 써두었던 시편들을 다듬기 시작했습니다. 구멍 난 그물을 손질하는 마음으로, 깊은 바다에 던져놓았던 그물을 건져 올리는 강인함으로 시를 단속했습니다. 그렇게 모인 그의 글은 단지 시라기보다 바다에 운명을 맡긴 어부들의 다큐멘터리라고 봐야 옳을 것 같습니다. “주문진에서 태어나 한번도 고향을 떠나지 않고 물 냄새만 맡고 살아온 가슴. 내게 바다는 생활이고, 전쟁터지요. 내가 보고 들은 걸 기교 부리지 않고 말하듯이 썼는데, 그 속에 어부의 인생, 사람의 인생이 앙금처럼 사리처럼 가라앉았다고 봐주면 감사하지, 뭘.” 그래서 평론가들은 그의 시를 유일한 어부 시라고 봐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그러고 보니 세상에 농민 시는 많고도 많고, 바다를 노래한 시도 많지만 어부의 삶을 노래한 ‘어부 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것 같네요). 그의 시는 ‘쓴 시’가 아니라 ‘쓰여진 시’라고 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육화된 시라고 할까요. 가슴 속살 생채기까지 할퀴는 태풍 이야기, 물고기 씨가 말라 이제 출항해도 호황을 누릴 수 없게 된 바다 이야기, 머구리(잠수부) 친구 두옵 씨의 넋두리까지 진물 같은 눈물이 나는 어부 이야기가 시가 됩니다.

‘마흔 줄 우리 친구 두옵 부랄 발게 / 세발 날창 들곡 우암 돌틈 헤집어 / 물질할라치면 우럭 돌삼치 잡는 / 도사로 정평 났지 // 육십 년대 전방 군대 한 삼 년 치르고 / 고향소돌 돌아와 머구리 되었지 / 일등 머구리 몫에 반짓거리 덤 합쳐 / 쏠쏠한 물질 덕 돈냥께나 벌었지 / (중략) / 스물 서른 발물질 오삭신 다 녹아 / 중늙은이 통머구리 되었네 / 마음 청춘이라 발가락 물질 사루어 / 소돌바위 모래톱 다 쓸어 안간힘 쓰지만 / 버거운 자맥질 힘들어 쉬는 날 더 많네 / (중략) / 선주 몫 선중 몫 기름값 떼고 손에 찬 / 일당 기만 원 지기미 씨부우랄.’(‘두옵 氏’ 중)
세상엔 감옥과 공상과 타협, 이 세 가지 길밖에 없다고 믿는 젊은 날이 그에게도 있었고, 그날들엔 <해륙 문화>라는 다소 진보적인 사회 비평지의 ‘주간’이라는 레터르가 얹혀 있었습니다. 문학 공부를 따로 하지 않았는데도 그의 재능을 알아본 은사의 부탁으로 3년 가까이 ‘잉크 밥’을 먹었습니다. 문학이 삶을 세우는 무기라고, 비인간적이고 불평등한 억압에 대항하는 최선의 무기라고 믿었던 시절입니다.

(왼쪽) 주문진을 한번도 떠나지 않은 바다 사람, 그는 한때 바닷일 대신 사회비평지의 주간으로 잉크 밥 먹으며 살았다. 하지만 그조차 어부들과 함께한 세월이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어부의 삶이 ‘육화된’ 시다.

하지만 한 가계의 가장이라는 짠 내 나는 진실은 그를 먹고사는 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그렇게 다시 물 냄새 맡고 살면서도 한밤중 이부자리 앞에선 시를 썼습니다. 시망바리, 잡어바리, 고대구리, 뒷바치기, 통머구리, 오랍드리, 놀래기, 물목, 뱃장, 시울… 어촌 고유의 언어들이 숨어 빛나고 있는 시를 써 내려갔습니다.
또 문화 무크지 <새벽들> 창간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젊은 날에나, 늙은 지금에나, 부유한 시절에나, 가난한 지금에나 여전한 건 ‘삶은 개차반인데 시가 아름답다면 그건 가짜’라는 믿음입니다. 그의 시엔 폼 잡는 시인 묵객들이 ‘파도여, 바다여’ 읊어대는 서 푼짜리 감상 대신, 어부의 홍역 같은 삶이 담겨 있습니다. 이 시처럼. ‘소형 선박 영어 자금 대출은 소액이다 / 소형 선주 영어 자금 대출이 서투르다 / 뭘 알아야지 / 대형 선박 출어 자금 대출은 고액이다 / 대형 선주 출어 자금 대출에 민감하다 / 몰라도 밀어붙여 / 선박 없이도 어업 자금 대출하는 길 안다 / 아하 귀신이라니까 / (중략) / 양복 윗도리 가슴엔 부정 어업 근절 / 연안 자원 보호 리본 달고 / 어판장 구석구석 헤매다가 / 목로 술집에서 택택이 선장 만났다 / 아줌마 여기 빵게 한 접시 / 택택이 선장 감독지도원이 알딸딸 / 취했다.’(‘어떤 복지 어촌’ 중) 시는 머리에서 나오는 재주가 아님을, 오래 걸어온 발바닥의 굳은살이나 개울을 건너다 넘어져 생긴 상처에서 나오는 것임을 그의 시가 말합니다. 재작년, 예순셋의 나이에 그는 첫 시집 <바다의 일생>을 세상에 내보냈습니다. 지역 동인지나 신문에 간간이 기고하긴 했지만 책으로 묶여 나온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원래 등단이란 건 육십 넘어서 하는 거라고. 인생 좀 보일 때.” 그동안은 권유를 받아도 사양했지만, 큰딸 결혼 선물로 크게 결심한 것이랍니다. 횟집에서 출판기념회도 열었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후배 시인들은 그 자신도 써놓고 잊었던 그의 시를 낭독했습니다. “어, 저걸 어디서 찾았지, 싶대요.

집 안 여기저기에 방치된 시를 놀러 온 후배 시인들이 ‘그거 나 줘요. 내가 챙겨놓을게’ 하고 모았더라고.” 수건처럼 곱게 접은 그의 손이 첫 시집 <바다의 일생>을 쓰다듬습니다. ‘…망망대해의 길 / 서둘러 가야 할 일 없고 / 조급할 이유도 없다 / 닻 내리는 곳이 내 필생의 일터 / 하루를 건져내는 텃밭이려니 / 깃발 바람 타 찢어져 반쯤 남아도 / 세월 가는 소리 쉼 없이 펄럭인다 /(후략)’(‘소망의 바다’ 중) 그의 부쩍 마른 정강이를 봤습니다.
늦은 밤 발 씻는 우리 아버지 곁에 앉아 있다, 말라가는 정강이를 본 기억이 떠오릅니다. 차령산맥이거나 낭림산맥인 줄 알았는데, 이제 산비탈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본 날이었습니다. 지난날 어린 자식이 모르고 지나친 세월이 차라리 부럽다고 일기장에 끼적였지요. 그 기억이 떠올라 황망해하는 내게 그가 시 한 편을 읽어줍니다.

‘내 아버지는 가슴앓이 절름발이 선장 / 물어물어 귀동냥 들은 바 / 배도 없고 그물도 없는 아버지 / (중략) / 바다로만 떠돌다 바다로 돌아간 / 아버지 선장 / 물 거슬러 휘적휘적 배 저으며 / 가시는 얼굴 안에 / 아버지 닮아가는 내 얼굴이 / 지금 저 바다 한가운데 있다.’(‘아버지 선장’ 중) 원래 시란 그런 것 아닌가요.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기. 삶과 시간 속에 묶인 인간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 “시를 쓰면서 정말로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한 적은 거의 없어요. 나의 한계는 그것이지. 행복하다기보다, 시는 아무리 힘들 때도 쓰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는 삶의 위안 같은 거. 어부들도 이 시를 읽고 나면 누군가 어부의 삶을 알아주고 있구나, 대변해주고 있구나 위안이라도 얻었으면 좋겠고.” 그의 시집 서문엔 “다소 어눌한 사람의 부자연한 의사 표현을 공감할 줄 아는 것도 또 다른 사랑법이다. 아는 건 바다뿐. 그래도 조촐하나마 차렸다. 어부들 가슴속에 조금쯤은 어눌한 이 바다 이야기가 기억되길 원한다”는 글이 쓰여 있습니다. 가슴을 쿵 치는 그의 시. 술보다 독한 눈물이 흐르는 어부의 인생이 담긴 그의 시. 그 안에서 홍역 같은 삶을 산 우리 아버지의 노래를 발견합니다.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그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인, 아버지의 노래. 그래서 자꾸 그의 시가 내 마음에 앙금처럼, 녹처럼 가라앉나 봅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시인이었던 적은 없었어. 다만 썼어요. 엊저녁에도 썼어요. 오늘도 쓸 것이고. 그래도 욕심 좀 보태자면, 가능하면 사는 것과 시가 비슷해지면 행운이겠지?”그가 내 그릇에 물곰국 한 국자 퍼서 담아주는데, 또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회 좋아하는 김 서방 주라며, 거듭 맛있다며, 젓가락으로 음식을 추슬러 냉장고에 넣어두시고는 한걸음에 서둘러 가시곤 하던 우리 아버지, 떠오릅니다. 국그릇에 눈물 한 방울 떨어집니다. 뜨거운 물곰국 한 국자에 들쭉날쭉 허기진 내 마음은 어느새 배가 부릅니다.

(오른쪽) 이웃의 희로애락은 그의 희로애락이기도 하다. 자신이 살아온 터전, 삶의 이야기를 담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시를 ‘쓴 시’가 아니라 ‘쓰여진 시’라고 부른다.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 이루어진 석호(개천) ‘순개’를 보고 그가 지은 시 ‘순개’. 이렇게 바다를 둘러싼 자연,
물고기 씨가 마른 바다 이야기, 잠수부 친구의 넋두리, 배 위에서 태풍에 쓸려간 이웃까지 그는 모두 시에 담았다.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