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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초이가 바라본 우리 시대의 명사 영혼의 가난을 몰아낸 제주도의 성자 맥그린치 신부
스물다섯의 나이에 제주 땅에 들어와 50년 넘게 제주 사람으로 살아온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 맥그린치 신부는 아직 한라산에도 오르지 못했다. 제주 사람을 위해 반평생 헌신하느라 초 단위로 세월을 산 때문이다. 제주 사람들을 물질의 가난뿐만 아니라 영혼의 가난에서도 벗어나게 한 여든두 살의 신부는 요즘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물질하다 뭍으로 올라온 해녀들이 맥그린치 신부를 만나 수줍고 다감한 인사를 나눈다.
그는 대단한 교육열과 사랑을 가진 제주의 어머니를 존경한다고 한다. 제주 명예 도민 2호이기도 한 그의 한국 이름은 ‘임피제’다.


몽돌처럼 둥실둥실한 몸피의 아낙들이 파도를 끌고 하아, 하아 숨차게 헤엄쳐 나옵니다. 파도 소리도 심드렁, 갈매기 울음소리도 무덤덤한데, 나는 왜 그 풍경 앞에서 자꾸 눈시울이 젖는 걸까요. 시인 고은은 제주 바다를 가리켜 ‘아름다운 여자를 잉태한 젊은 어머니의 바다’라고 했다지만, 나는 이 바다가 ‘가슴에 멍이 든 늙은 아낙의 바다’ 같습니다. 제주 아낙들은 저 시린 바다를 집처럼 드나들며, ‘물질’로 자식 공부시키고 시부모 공양도 해냈습니다. 대대손손 먹여 살려주는 어머니 같은 바다라며, 두통약 한 줌 챙겨 먹고 바다에 들어가 대여섯 시간 만에 뭍으로 나오곤 했습니다.
아낙들의 사투리가 물 능선에 가득 찰 즈음, 푸른 눈의 신부님이 그들 앞에 섰습니다. 아낙들은 하늘에서 만나(여호와가 하늘에서 날마다 내려주었다는 기적의 음식)가 쏟아지는 것 같은 표정을 짓습니다. 품에 안는 듯한 표정으로 신부님이 웃습니다.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 Patrick James Mcglinchey. 1954년 제주 땅에 도착해 55년 동안 제주 바람 맞으며 살아온 신부님, 이젠 길거리의 외국인을 신기한 듯 구경하다가 “아, 나도 외국인이지” 깨닫고 깔깔거리는 제주 명예 도민 2호 ‘임피제 씨’입니다. 185cm가 훌쩍 넘는 키, 산다는 건 제 몸속에 길을 내는 것임을 깨우쳐주는 주름살, 잇새가 수줍게 벌어지는 웃음…. 심령이 가난한 자를 품어 안는 그와 그의 몸피는 어그러진 듯도 어울리는 듯도 합니다.
어쩌면 수도자의 시간에 개입한다는 건 수월치 않은 일인지 모릅니다. 그들의 시간은 밀폐돼 있고, 평범한 삶의 몇 가지 목록과 무관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제주도의 성자’로 불리는 그의 시간을 잠시 들여다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욕심을 부려봅니다. 올해로 제주 생활 56년째를 맞이한 여든두 살 신부의 겨울 이야기입니다.

1928년 아일랜드에서 수의사 아버지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난 맥그린치, 감자가 목에 걸린 소를 살려낸 열 살짜리 꼬마 수의사, 청빈한 아버지의 삶을 따라 살고 싶었던 신실한 소년, 하느님의 은총에 보답하는 길은 신부가 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택한 사제의 길…. 신께 용납된 사람, 맥그린치 신부의 인생 전반전입니다.
한국 전쟁의 끄트머리인 1953년, 강원도에 파견된 골롬반 선교회 신부 7명이 총살되면서, 이들을 대신해 5명의 사제가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의 일입니다. 그 후 그는 50년 넘게 제주도에 살면서 신용협동조합 운동을 일으켰고, 4H 클럽을 조직했으며,‘이시돌목장’을 세우고, 성이시돌의원·양로원·호스피스 병원·청소년센터·유치원·피정의 집·수녀원 등을 설립했습니다. 이런 그에게 사람들은 ‘제주도 근대화의 선구자’라는 별칭을 보탰습니다. 세상은 그에게 막사이사이상, 석탑산업훈장, 5·16 민족상이라는 양명의 훈장을 선사했습니다. 제주의 품 안에 안긴 맥그린치 신부의 인생 후반전입니다.
“처음 제주도에 왔을 때 사람들이 ‘미국 놈’ ‘미국 놈’ 하고 불렀어요. 나는 그 사람들에게 ‘저 아일랜드 놈이에요’라고 했죠. 제주도는 아일랜드와 풍토가 비슷해서, 이곳에 왔을 때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았어요. 돌담도, 바람도 많고, 풍습도 비슷해요. 그 당시만 해도 학교, 우체국 빼고는 죄다 초가집이었지요. 다들 살림이 궁핍해 겨우 보리밥 먹고 살면서도 아낙들은 달걀, 닭을 가져다주며 파란 눈의 사제를 굶기지 않았죠.”

맥그린치 신부가 1961년 중산간 지대의 황무지를 개간해 만든 이시돌목장. 1백50만 평의 부지에 경주마 1백여 두, 비육 소 2천여 두, 젖소 7백여 두를 키우고 있다. 특히 이시돌목장에서 생산하는 ‘이시돌우유’는 유기농 인증과 함께 한국에서는 최초로 국제유기운동연맹 인증을 받았다.

가난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 이 땅에 정착한 신부는 제주 도민의 가난을 몰아내는 데 반평생을 보냈습니다. 한국전쟁과 4・3 항쟁이 훑고 지나간 섬에서 그가 본 제주 사람들은 정직하고 교육열이 높지만 인생에 실족한 이들이었습니다. 한 달에 4~5%짜리 이자로 돈을 빌려 근근이 살다 자포자기하고 자살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곗돈 떼여 고통받는 이들을 보며 그는 신용협동조합을 만들고 무담보 대출로 그들을 도왔습니다(현재 32개의 협동조합, 15만 명의 조합원으로 성장).
부산으로 돈 벌러 갔던 순임 씨가 물통에 빠져 한 줌 재로 돌아온 일에 가슴을 친 그는 제주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줄 요량으로 ‘한림수직’을 설립했습니다. 고향의 아버지가 보내준 물레로 양털을 꼬아 털양말을 짜는 것부터 시작한 한림수직은 한때 제주 여성 1천3백 명의 밥벌이(한 가구당 4~5인 가족으로 셈하면 어림잡아 7천~8천 명)와 결혼 비용 마련을 책임지기도 했습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기, 이 비범한 능력은 제주 사람들의 삶을 보듬는 것에서 시작해, 그들의 삶을 041일으켜 세우는 것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성경에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잖아요. 제주도에 와서 가장 먼저 이웃에 무엇이 필요한가, 그걸 찾았죠. 영혼의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물질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걸 알았어요.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실정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믿었죠.” 사람들이 사적 체험에 실족해 있을 때 그는 사이즈가 큰 세계로 그들을 안내했습니다.

1960년대 초 ‘황무지에 무슨 목장을 만드냐’는 주위의 만류에도 제주 중산간 지대의 황무지를 개간해 돼지, 소, 양을 기르는 이시돌목장을 만들었습니다. 목축이 번성한 아일랜드에서 자랐기 때문에 제주도의 중산간 지대가 목축에 잘 맞는 땅임을 알아본 것입니다. 농민에게 목초지 개간법과 가축 기르는 방법을 가르치고, 4H 클럽을 조직해 회원에게 조건 없이 돼지와 병아리를 분양했습니다. 물론 돼지가 새끼를 낳으면 두 마리, 암탉이 달걀을 낳으면 열 개만 가져오게 해 다른 회원에게 또다시 분양할 수 있게 했습니다. 화산재로 가득해 물이 고이지 않는 중산간 지대에서 목초지와 동물의 식수에 쓸 물을 구하기 위해 저수지를 파고 밑바닥을 찰흙으로 메워 물을 모았습니다. 18km나 떨어진 수원지까지 수도관을 묻어 물을 끌어오기도 했습니다. 이런 그를 두고 사람들은 “한림성당 신부 미친 모양이라. 아무것도 없는 산에다 목장을 만들었주. 얼마 없어 손을 들게 될 거우다” 하며 혀를 찼습니다. 그는 묵묵히 돌밭을 일궈 목초 씨를 뿌릴 뿐이었지요. 이 이시돌목장은 곧 제주의 축산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 후 그는 중산간 지대에 사료 공장, 우유와 치즈 공장도 세웠습니다.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이 제주 축산의 부흥을 위해 만든 송당목장조차 실패하자 “이시돌목장은 되는데, 왜 송당목장은 안 되느냐”며 대통령이 호통을 쳤다는 후문입니다. “우리 자원, 있는 자원 쓰자. 외국에서 자꾸 도움받아봤자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우리 손으로 하자. 사람들에게 이걸 깨닫게 하고 싶었어요.”

(왼쪽) 제주에서 55년을 살면서 그의 얼굴엔 어느새 주름이 내려앉았다. 산다는 건 제몸 속에 길을 내는 것임을 깨우쳐주는 눈 밑 주름살이 마음을 끈다. 
(오른쪽) 정맥이 비칠 듯한사색적인 손등.


그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두려움 없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후합니다. 부모 세대에서 가난과 정을 상속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렇게 용기 안에 거하면서 제주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난 늘 돈이 없었어요. 돈 많은 미국 놈이 아니라 섬나라에서 날아온 아일랜드 놈이니까요. 근데 돈이 필요하면 기적적으로 어떻게 어떻게 돈이 모였어요. 처음에 돼지를 키울 땐 아일랜드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매일같이 편지를 썼어요. ‘저는 제주도만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제주도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곳입니다. 축산업이 유망한 섬이지만 자본이 없어 땅을 놀리고 있으니 조금만 도와주면 이 땅이 가난에서 해방될 것’이라고요. 미국 농무성 같은 단체를 돌면서 기금을 모으고, 고향에 가서 미사 집전을 하면서 기금을 모았어요.” 항상 불평 많은 삶만 바라보다 오랜만에 그처럼 웃는 얼굴을 오래 쳐다봅니다. 수도자에게도 인생은 늘 장밋빛은 아니었을 텐데요. 그는 그저 실천하는 삶을 살았을 뿐이라며 겸손히 손사래를 칩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마다 제주 사람들은 늘 ‘해보나 마나 안 됩니다’ ‘일본 사람도 실패했으니 불가능합니다’ 이런 말로 반대를 했어요. 4・3 항쟁, 한국전쟁으로 가난과 실패에 젖어 있던 이곳 사람들은 조그만 일에도 쉽게 자포자기했지요. 영혼의 가난이 육신의 가난을 불러온 겁니다. 이런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등 떼밀어, 노력하면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다는 진리를 깨우쳐줬어요. 가난도 마음의 문제, 의지의 문제잖아요.” 이것이 그의 진정한 공로입니다. 영혼의 가난을 몰아내는 데 힘쓴 선한 사마리아인. 그렇게 사느라 제주에 있으면서 한라산 한번 오르지 못한, 제주에서 가장 이름이 긴 도민이 됐습니다. 피아노 치며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를 구성지게 부르는 여든두 살의 임피제 씨. 낮은 목숨들이 죄다 그의 누이・형・동생이었던 사람, 그래서 다른 이를 돕는 손은 기도하는 입술보다 성스럽다고 생각한 사람의 일대기입니다.

‘제주도 근대화의 선구자’ ‘제주의 개혁자’로 불리는 맥그린치 신부. 풍력발전소 앞 억새밭에 섰다.

어제부터 계속 몰아치는 한파와 눈보라가 걱정스러워 이리저리 뒤척이다 결국 한숨도 못 자고 일어나 앉았다. 그러곤 한참을 기도드렸다. 현지 로케이션 헌터도 날씨가 신경 쓰였는지 촬영이 가능하냐고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몇 년 만에 있을까 말까 한 한파가 하필 왜 이때…. 비구름, 강풍 그리고 폭설!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1950년대 전쟁으로 굶주리던 제주도에 나타난 잘생긴 파란 눈의 성직자. 지난 50여 년간 제주 도민과 함께했을 삶의 희로애락 그리고 지금 하늘에서 펼쳐지고 있는 눈보라, 먹장구름, 그러다가 순간순간 비치는 햇살과의 어우러짐이 마치 한 편의 오케스트라 연주 같았다. 맥그린치 신부님을 표현하는 데 꼭 맞는 날씨가 바로 이런 날씨다! 그의 성스러운 삶을 잘 표현하라는 하늘의 말씀을 사진가는 가슴으로 듣고 있었다.
해변에서 만난 해녀 중 한 분의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신부님 덕분에 저희가 잘살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와의 헤어짐이 못내 아쉬웠는지 작별 악수를 하던 중 나도 모르게 그의 손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차이점을 일러주었다. _사진가 준초이


초창기에 돼지를 키우던 축사. 원래 일본 군인이 주둔하던 막사였는데, 판자와 가마니로 지붕을 만들고 돼지를 들여놓았다. ‘성이시돌 중앙 실습 목장’이라는 간판도 달았다.

“나는 제주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그들의 독립적인 성격, 어려운 가운데서도 희망을 절대 내려놓지 않는 의지를 존경해요. 특히 제주도의 여자, 어머니는 대단합니다. 못 입고 못 먹으면서도 물질과 밭일로 자식을 위해 헌신해온 제주 여성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제주도 사람들은 그에게 기적을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한림성당을 지을 때, 배가 좌초되는 바람에 제주에 머무르던 미국 화물선에서 나무를 구해온 일이 있습니다. 알고 보니 선장이 아일랜드 사람이었어요. 워싱턴에서 사고 조사를 나오기 전에 4일 동안 가져갈 수 있는 대로 가져가라는데, 신도는 25명밖에 되지 않고, 그조차도 어린아이가 대부분이었지요. 그저 기도만 열심히 했는데, 다음 날 아침 배 주위에 수백 명의 남자들이 모여 있었어요. 신도가 아닌데도 소문을 듣고 도우려고 온 거죠. 그 어마어마한 양의 목재를 다 운반해 성당도 짓고, 강당, 사제당도 지었어요. 이들은 사제인 나도 생각지 못한 기적을 행한 겁니다.” 이 말을 전하는 그의 눈은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 기쁨에 종교의 문턱이란 없는 듯합니다.
“제주도 사람들에게 ‘예수님 믿으십시오’라고 직접 전도하진 않았어요. 왼손 모르게 오른손으로 하라고 하느님이 말씀하셨죠. 조용히 삶으로 실천하며 사는 거죠. 그러면 사람들이 감화되는 것 같아요.” 이시돌농촌개발협회가 축산과 사료 공장 등을 통해 얻는 수익은 성이시돌의원, 양로원, 경로당, 노인학교, 유치원, 농촌노인복지회관, 어린이집 등 복지 사업에 모두 쓰고 있습니다. 6년 전부터는 말기암 환자를 위한 호스피스 병원을 무료로 운영하고 있고, 요양원도 독거노인이나 무의탁 노인에게 무료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말한 ‘조용히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왼쪽) 그가 꾸는 새로운 꿈은 제주의 환경을 돕는 일이다. 목장에서 나오는 동물들의 배설물 가스를 모으고, 바람 많은 초지에 풍차를 세우고, 태양 에너지를 모아 친환경 에너지를 생산할 생각이다. 
(오른쪽) 이시돌목장의 초지. 친환경 농산물 인증을 받은 초지에 젖소를 방목하고 있다. 물이 잘 고이지 않는 제주의 토양에서 동물들을 키우기 위해 그는 저수지를 파고 밑바닥을 진흙으로 메워 물을 모았다. 그의 의지는 제주의 척박한 토양까지 극복해냈다.


“우리나라는 자꾸 발전, 발전, 경제적인 발전, 문화적인 발전을 강조하는데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발전은 사랑입니다. 그 발전을 위해선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사랑을 받아야 해요. 제대로 사랑을 받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려워요. 제대로 사랑받았을 때 더 소중한 것을 상대방에게 되돌려줄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또 하나. 나눔만이 나뉨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 모르스 부호 같은 고백과 격려 앞에서 그동안 잔뜩 헝클어졌던 내 심사는 잘 빤 옥양목 같아졌습니다. “나의 체온은 다른 이와 맞닿아야 비로소 제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는 그의 다음 말이 둔기처럼 가슴을 칩니다.
늙는다는 건 쓸쓸한 일이 아닙니다. 다른 종류의 기쁨이 갈피마다 남아 있으니.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 진리를 알게 됩니다. 앞으로 환경 사업을 시작할 거라고, 목장에서 나오는 동물들의 배설물 가스를 모으고, 풍차를 세우고, 태양 에너지를 합해 친환경 에너지를 만들어볼 참이라고 합니다. 여든두 살의 이 할아버지는 어디로 더 흘러가고 싶은 걸까요. “나는 편히 지내기 위해 신부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한국에 거름이 되기 위해 왔습니다. 나는 목축을 통해 제주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눈감을 때까지 이시돌목장을 통해 제주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려고 노력할 겁니다.”
발에 밟히는 시든 꽃잎에도 영광이 깃들었다고 믿게 하는 그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왜 사람들은 힘겨운 날들 속에서도 종말까지 견디는 걸까, 그 답을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이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이제 저 각다귀판 같은 세상 속으로 밀려 들어가야겠지요. 그와 작별 인사를 나누는데 바람 속에서, 누군가의 등에 업혔던 순간의 그리운 냄새가 훅 끼쳐옵니다. 고무 옷 입은 해녀들은 그때까지 그의 손을 부여잡고 있습니다. 그가 자기 몸처럼 사랑하려고 애쓴 제주 사람, 그리하여 드디어 영혼의 가난을 물리친 그들이 이 파란 눈의 신부에게 마음의 훈기를 전하는 중입니다. 그들 뒤로 눈시울이 붉어진 해가 주춤주춤 산을 넘고 있습니다.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