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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렉터의 집_파리 바빌론가의 입생로랑저택 세기의 컬렉터 입생 로랑을 추억하다
다시는 이 집을, 이 집에 가득 들어찬 미술 작품과 가구 컬렉션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2009년 2월, 이 저택의 미술품과 가구 경매가 치러지고 나면 ‘세기의 컬렉터’ 입생 로랑의 소장품은 새 주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기 때문이다.“최고가 아니면 최고를 살 수 있을 때까지 돈을 모으자”라는 신조를 가졌던 입생 로랑의 컬렉션을 엿볼 수 있는 ‘세기의 구경’이 독점 중계된다.

사업 파트너이자 평생 동지인 피에르 베르제와 서재에서 포즈를 취한 입생로랑. 생전에 바빌론가의 집을 공개하지 않았던 그가 유일하게 집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는 화이트 큐브 공간에 작품을 여기저기 전시하는 과시형 인테리어 대신, 오랜 시간을 들여 작품을 하나씩 수집하고 생활 가까이에서 즐기는 우아한 취향의 컬렉터였다.

“자네는 이렇게 말했지. 그래, 우리 같이 가보자. 친구여, 자네가 나를 이끌어주게.” 울음 섞인 피에르 베르제 Pierre Berg의 목소리가 생호쉬 성당 아래 울려 퍼졌다. 약관 21세의 나이로 크리스찬 디올로부터 직접 디올 하우스를 물려받아 근 50년을 이끌어온 입생 로랑, 2008년 6월 1일 세상을 떠난 패션계 제왕의 장례식이었다. 프랑스 정재계, 문화계 인사들과 영화배우들로 발디딜 틈 없었던 장례식이 끝난 후 사람들의 눈길은 파리 바빌론가에 있는 입생 로랑의 저택에 모아졌다.
그전부터 소문은 무성했다. 애당초 이 집은 입생 로랑과 그의 사업 파트너이자 평생 동지였던 피에르 베르제가 이사하기 전부터 전설적인 장소였다. 미술 애호가이자 르네상스 시대의 타피스리 연구로 이름 높았던 마리 쿠톨리 Marie Cuttoli의 집이었기 때문이다. 피카소나 페르낭 레제, 마티스, 르코르뷔지에 등 세기의 거장들과 절친한 친구 사이로 지냈던 쿠톨리는 클레, 브라크, 마티스, 미로, 뒤피 등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다. 1972년 입생 로랑과 피에르 베르제가 이 집으로 이사하기로 결정했을 때 미술품에 대한 입생 로랑의 사랑을 익히 알고 있었던 몇몇 사람들은 이 집에 또 하나의 전설이 더해질 것을 예감했다.
사실 칼 라거펠트, 위베르 지방시를 비롯해 미술 컬렉터로 유명한 디자이너는 많다. 그러나 취향이 바뀔 때마다 자신의 컬렉션을 경매로 처분하는 칼 라거펠트나 18세기 프랑스 오브제와 가구 컬렉터로 미술 잡지 기자들에게까지 전문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는 지방시에 비해 입생 로랑의 컬렉션은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굉장한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을 듯한데 그게 뭔지 알 수 없는 소문만 무성했다. 가장 큰 이유는 입생 로랑이 집에 사람을 초대해 컬렉션을 자랑하는 일반적인 스타일의 컬렉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신경증이라고 할 정도로 예민했던 입생 로랑은 사소한 변화에도 민감해 웬만해서는 사무실과 집에 사람을 초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라케시에 있는 마조렐 Majorelle의 정원을 사서 보존할 만큼 미술에 관심이 많고 해박한 지식을 지닌 입생 로랑이 어떤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아는 인사가 드물었던 것이다.


1 현관을 열자마자 마주치는 복도에는 기원전 1세기 로마 시대의 조각 작품인 남자의 토르소가 놓여 있다. 복도 인테리어는 프랑스의 유명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클로드 랄란 Calude Lalane의 손길을 거쳤다.
2 바로크 양식에 심취했던 입생 로랑은 베르사유의 ‘거울의 방’을 본떠 바로크 스타일을 재창조했다. 아래가 대리석으로 된 스탠드는 장 미셸 프랑크와 자코메티의 작품이며 서랍장은 17세기 이탈리아 앤티크 대리석을 붙인 것이다. 삭스 공작의 유명한 컬렉션 중 일부인 상아 장식품과 장볼로냐의 조각 작품이 서랍장 위에 어우러져 있다. 벽에 걸린 르네상스 시대 작품 옆으로 모딜리아니의 장 콕토 초상화가 보인다.



3 제임스 엔소르의 그림 아래로 18세기 프랑스 가구가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살롱. 의자 뒤로 프랑스 왕가의 가구 장인이었던 아담 와이즈와일러의 콘솔이 보인다.

또한 그는 보통 컬렉터들이 작품을 수집하는 장소인 경매장에 일체 출입하지 않았다. 경매장에서 작품을 구입할 경우 비밀로 부쳐도 대부분 그 소장가가 누군인지 호사가들의 입을 통해 밝혀지기 마련인데, 어떤 경매 기록부에도 입생 로랑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다. 입생 로랑은 지극히 신중하며 까다로운 컬렉터였다. 그는 작품의 출처와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는데(그의 컬렉션 신조에서 알 수 있듯이) 아직도 그 이름이 다 밝혀지지 않은 몇몇 개인 화상들에게서만 작품을 구입했다.
개중에 이름이 공개된 개인 화상들의 명단은 그의 컬렉션 수준을 어림짐작하게 해준다. 먼저, 카비네 드 퀴리오지테 cabinet de curiosit(온갖 광물이며 자연물을 모아놓는 과학실과 그 내부에 채워야 하는 온갖 기묘한 오브제)에 관해서는 세계 최고라는 ‘쿠겔 갤러리 Kugel Gallery’는 입생 로랑의 단골 출입처였다. 그는 불상이 놓인 개인 과학실을 꾸미기 위해 상아와 보석, 카메오, 르네상스 시대의 은 조각 작품 등을 쿠겔 갤러리에서 구입했다. 또 개인적인 친분으로 신뢰할 만한 중개인을 통해 작품을 구입하기도 했다.


1 거실에 놓인 작품들은 일일이 나열하기에 벅찰 정도다. 이 가구들은 모두 아르데코 시대의 유명 가구 디자이너들의 손에서 나왔다. 르그랭, 아일린 그레이, 마셸 프랭크, 장 뒤낭, 하토 같은 전설적인 사람들이 만든 가구 사이사이로 제리코, 앵그르, 레제, 피카소의 작품이 보인다.

매스 미디어에 자주 오르내리지는 않지만 실력파이며 동시에 은밀하게 작품을 구해주는 것으로 정평이 난 알랭 타리카 Alain Tarica도 입생 로랑이 자주 찾았던 화상이다. 여기에는 유명한 작품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생전의 페르낭 레제는 브랑쿠시의 조각품을 하나 가지고 있다가 조각품을 유난히 탐내는 지인에게 그것을 주고 대신 그림을 하나 받았다. 레제가 사망한 후 그의 미망인은 페르낭 레제 박물관 건립을 위해 이 그림을 팔기로 결정했는데, 우선 입이 무거운 데다 친분이 있었던 타리카에게 자문을 구했음은 물론이다. 타리카는 금세 이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았다. 이 작품은 역시 유명 컬렉터인 킬리 밀러 Killy Miller 부인이 일 년에 6개월만 메트로폴리탄에 대여해주는 고야 그림과 똑같은 화풍으로 그린 고야의 전성기 작품이었다. 타리카의 중개로 피에르 베르제가 이 작품을 구입했고 입생 로랑은 ‘기절할 만큼’ 이 작품을 사랑했다고 한다. 입생 로랑 사망 후 이 작품은 피에르 베르제와 입생 로랑 파운데이션의 이름으로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했다. 입생 로랑은 패션쇼를 할 때마다 긴장을 풀기 위해 거의 오락 수준으로 단골 갤러리를 찾아갔다. 무언가를 사면서 긴장을 푸는 쇼핑 테라피가 입생 로랑에게는 미술품 컬렉션으로 발전했고, 이 컬렉션이 그의 활동에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입생 로랑은 몬드리안 작품 세 점을 구입해 서재에 걸어두었는데 이 그림들은 패션 교과서마다 실린 1965년의 그 유명한 입생 로랑 패션쇼, 몬드리안에게 바치는 경의나 다름없는 몬드라인 모티프의 원피스를 떠올리게 한다.

2 영국 초상 작가로 유명한 토머스 게인즈버러의 덴두치 초상화.

사정이 이러하니 입생 로랑의 컬렉션이 경매에 부쳐진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호사가들이 얼마나 흥분했는지는 굳이 이야기할 필요도 없겠다. 크리스티, 소더비, 필립스 등 유명한 경매 회사들이 막후에서 치열한 로비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마침내 공개된 컬렉션은 기대 이상이었다.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들도 금세 알아볼 수 있을 만한 피카소, 몬드리안, 마티스, 앵그르 등의 대작들은 제쳐두고라도 가구 하나, 소품 하나도 범상한 것이 없었다. 복도 한편에 놓여 있던 장 뒤낭의 도자기가 대표적인 예다. 이 도자기는 1925년 만국박람회에 출품했던 것으로 아르데코 시대의 유명한 컬렉터이자 자산가였던 자크 두세가 소장하고 있다가 그가 죽은 뒤 아무도 그 행방을 알지 못했던 작품이다.
그러나 이렇게 긴 작품들의 목록보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 모든 작품들이 실내에 아주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바빌론가에 있는 입생 로랑의 빌라는 파리의 다른 고급 빌라에 비해 규모가 작고, 습기가 바로 올라올 수 있어 다들 피하는 일층인 데다 입구가 좁아 입지 조건이 좋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일단 현관문을 열고 복도로 들어서면 놀라운 세계가 펼쳐진다. 비밀스러운 안뜰을 둘러싸고 긴 복도로 이어진 방방마다 고급스러운 취향을 결정체를 엿볼 수 있다. 입생 로랑 사망 후 처음으로 그의 집에 들어갔던 감정 전문가들은 애석함을 금치 못했다. 작품 하나하나가 문제가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를 비롯해 18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온갖 작품들이 역시 문화재급의 가구들과 뒤섞여 배치된 실내의 조화를 차마 깨뜨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3 입생 로랑의 과학실은 명나라 시대의 불상을 비롯하여 삭스 공작의 소유물이었던 라피즈 라즐리를 비롯한 다양한 광물과 보석, 은 제품 컬렉션을 전시하기 위한 공간으로 쓰였다. 인테리어를 담당했던 자크 그랑주 Jacque Grange의 클래식 모던 스타일이 돋보인다.


4 컬렉션의 일부인 마티스의 ‘레 쿠쿠 Les Coucous’와 앵그르의 ‘라뤼 부인의 초상’. 이 중 마티스의 작품은 1억 8천만 유로라는 감정가를 기록했다.

입생 로랑은 작품을 중시한 나머지 집을 갤러리 스타일, 즉 화이트 큐브 스타일로 치장하고 작품을 여기저기 걸어 전시하는 과시형 인테리어를 경멸했다. 그는 자자손손 메세나를 실천했던 프랑스의 노아유 Noailles 가문의 저택을 이상형으로 여겼다.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 작품들을 하나씩 수집하고, 그것을 마치 우리가 여행 기념품을 정리하며 기쁨을 느끼듯 생활 가까이에 두고 즐기는 우아한 취향을 배우기 위해 애썼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18세기 프랑스 왕가의 가구 장인이었던 아담 와이즈와일러 Adam Weisweiler의 콘솔 위에 마티스의 그림이 무심하게 걸려 있고,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가 바티스타의 라오콘 조각이 아일린 그레이의 장식장 한쪽에 놓여 있으며, 명나라 시대 불상이 자크 그랑주 Jacque Grange의 세련된 인테리어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그 자체로 완벽한 집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더 이상 이 집을 볼 수도, 방문할 수도, 그의 정련된 컬렉션을 구경할 수도 없다. 이 집은 2008년 6월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입생 로랑과 함께 사라졌다. 당장 2009년 2월부터 그랑 팔레에서 열리는 입생 로랑 컬렉션 전시를 위해 이미 작품은 모두 옮겨졌으며 2월 말에는 ‘세기의 경매’라는 이름이 붙은 컬렉션 경매가 열릴 것이다. 세기의 경매답게 경매를 주관하는 크리스티 측에서는 판매를 위한 일반적인 카탈로그를 제작하는 관행을 버리고 세 권으로 된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카탈로그를 발매하며 오로지 소수의 예약자들에게만 카탈로그를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수천만 유로가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 경매 수익금은 입생 로랑의 유지에 따라 모두 에이즈 치료를 위한 기금으로 기부하게 된다. 이쯤 되면 입에서 절로 감탄이 나올 만하다. 피에르 베르제의 애도사처럼 “무슈 입생 로랑, 과연 당신은 영광과 함께 살아갔으며 죽어서도 영예로운 사람입니다.”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