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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통문화를 배우는 주부들]자수 명장 김현희 선생의 제자 김은정 씨 바늘을 벗 삼아 나를 찾은 아름다운 시간
김은정 씨는 우울증과 권태기라는 인생의 고비를 자수를 배우면서 가뿐히 넘겼다. 바느질을 배우면서 비로소 꼭 맞는 옷을 찾은 것 같다는 그가 더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자수 명장 김현희 선생과의 만남이다.
첫아이를 낳았을 때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하나 감동의 순간은 잠시, 호환 마마보다 무섭다는 출산 우울증이 그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아이 낳고 밥하려고 비싼 돈 들여가며 공부했나 싶은 허망함, 이젠 정말 쓸모없는 사람 같다는 상실감이 몰려왔다. 다시 취직을 해볼까도 했지만 경력이 단절된 애 엄마를 반기는 곳은 딱히 없어 보였다. 그야말로 자신감이 바닥을 쳤다. 뭐라도 배워야겠다고 결심하고 문화센터 자수 강좌에 등록했다. 바느질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조각보나 소품 만드는 재미가 생각보다 쏠쏠했다. 그렇게 1년 정도 지났을까. 강사는 기본 테크닉은 다 배웠으니 이제 집에서 혼자 해보라고 권했다. 이제야말로 제대로 한번 배워보겠노라 욕심이 생긴 무렵이어서 그쯤에서 멈출 수가 없었다. 그때 강사의 추천으로 김현희 선생을 알게 되어 6년째 선생에게 자수와 보자기를 배우고 있다.
“TV에 나온 선생님을 보면서 저런 선생님에게 배우려면 청소부터 해야 하는 줄 알았어요. 더구나 나같이 평범한 주부가 선생님께 배울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그런데 공예학교에 가니까 선생님 같은 대가에게도 배울 수 있더라고요. 정말 신기했어요. 선생님한테 제대로 배우는 것이 왜 중요한지도 알았고요. 바느질 종류나 방법은 책에도 잘 나와 있지만 감각은 직접 보고 배워야 해요. 얼마나 깊게 바늘땀을 뜨느냐, 어떤 색깔 실을 쓰느냐에 따라 결과가 확연히 달라지거든요.”

(왼쪽) 왼쪽에 앉은 사람이 자수 명장 김현희 선생. 그리고 그의 제자 김은정 씨다.

자수와 보자기는 주부들이 관심을 갖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김현희 선생의 제자 중에도 주부가 적지 않은데, 선생은 이들에게 적잖은 자극을 주며 자신감을 북돋워준다. “내가 만든 조각보나 자수 작품을 보고는 ‘와 대단하다. 그런데 이런 걸 내가 어떻게 하겠어? 난 못할 거 같아’ 이런 말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어요. 그럴 땐 따끔하게 혼내죠. 바느질도 결국엔 사람이 하는 건데 못할 게 뭐 있어요. 혼자 하려고 끙끙대니까 괴롭죠. 그러니까 배우는 거예요. 배우면 쉬워지니까. 기초반에선 여섯 폭짜리 병풍부터 가르치는데, 처음부터 너무 어려운 걸 한다고 겁내다가도 막상 완성하고 나면 다들 자신감을 가져요. 그리고 주부들은 수강료 아까워서라도 더 열심히 배우려고 하는 것 같아요.”
똑같은 색깔의 조각 천을 가지고도 색을 배열하는 방법에 따라 전혀 다른 작품이 나오는 것이 조각보이다. 전통적인 것에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접목하기 때문에 같은 방법으로 반복하는 십자수와 달리 성취감 또한 크다고 한다. 조각보, 수 보자기, 예단보, 흉배, 돌띠, 바늘집, 베갯모까지 선생의 작품과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 역시 바늘과 실만 있으면 만들지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런 재미를 좇아 진득하게 배우다 보니 ‘김현희 자수보자기연구회’의 일원이 되었고, 존경하는 스승과 함께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뜻밖의 행운이고 기쁨이었다.

1 조각 천과 유리 공예 작품을 활용해 만든 장신구는 김현희 선생의 작품이다. 
2 조각 천을 조합해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조각보의 멋이다. 김은정 씨는 수 보자기, 예단보 등 갖가지 조각보를 만들며 행복해한다. 
3 고운 색실만 보고 있어도 주부의 시름은 달아난다.


좋은 스승 만나 신명 나게 바느질하다 보니 출산 우울증도 사라졌다. 둘째를 낳았을 때는 우울증 대신 바느질이 하고 싶어 몸살이 날 정도였고, 결혼 5년 차쯤 찾아온 권태기도 지혜롭게 넘길 수 있었다. 그사이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자괴감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그 과정엔 남편의 외조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남편은 자수 배우는 아내를 자랑스러워하는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김은정 씨만큼이나 김현희 선생을 따르는 사람도 남편이다.
“가족에게 쏟아야 할 시간을 나를 위해 쓸 수 있도록 도와주니 늘 감사한 마음이에요. 자수를 배우면서 돈보다 소중한 나의 정체성을 찾았고, 그로 인해 남편이나 아이들에게 종속된 삶이 아니라 ‘내 생활’이라는 게 생겼어요. 내 몸에 제일 잘 맞는 옷을 찾은 느낌이랄까요. 만약 그만두라고 한다면 벌거벗고 세상에 버려진 것 같은 기분일 거예요.”
사실 몰입할 대상이 없을 때는 온 신경이 ‘나’가 아닌 남편과 아이들에게 집중되어 갈등과 다툼도 적지 않았다. 남편이 늦는 날이면 애꿎은 시계만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안달복달했지만, 이제는 바늘땀을 뜨며 그 시간을 자유롭게 누린다. 집에 작업 공간도 만들었다. 그 안에 있을 때만큼은 남편도 두 아들도 그의 시간과 공간을 존중해준다.
“자수를 배우지 않았더라면 아이들 잘 키워 좋은 대학 보내고 결혼시키는 것을 지상 최대 과제로 알고 살았을지 몰라요. 어쩌면 지금 저는 나를 위한 노후 준비를 하고 있는 거예요. 늙어서 재미 붙이고 할 수 있는 일을 배워두는 것도 중요한 노후 준비니까요. 할머니가 되었을 때 계 모임이나 하면서 시간 보내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한결 풍요로운 삶일 거예요.”
김은정 씨는 젊은이들과 즐겁게 소통하면서 다양한 인연을 만들어가는 김현희 선생을 보면서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설사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바늘을 벗 삼아 살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자수 명장 김현희 선생의 자수·보자기 공예 강좌는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www.kous.or.kr)에 개설되어 있다. 기본 수와 병풍, 가리개, 바늘꽂이, 예단보, 조각보, 수 보자기 등 다채로운 작품을 직접 배울 수 있다. 기초반, 연구반, 전문반이 있으며 각 반은 거의 1년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매년 1월 수강 신청을 받는다. 문의 02-555-9337~8

유은혜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