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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기울여들어보니]지휘자 함신익씨의 인생경영 모든 구름은 햇빛을 숨기고 있다
‘한국 최초의 예일대 교수’라는 성공의 면류관을 쓴 지휘자 함신익. 그는 말한다. 가난과 결핍과 열망이야말로 인생 50년을 이끈 터빈 엔진이라고. 자신의 책 <예일대 명물 교수, 함토벤>을 들고 잠시 고향에 돌아온 그를 엄동설한 세찬 바람 속, 서울 하늘 아래 첫 동네에서 만났다.


CEO 리더십으로 자신의 인생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 함신익. 의상은 모두 장광효 카루소, 슈즈는 꼬르넬리아니 제품 .

어젯밤 하늘이 검은빛으로 꾸물거리더니 겨울비가 잠시 울고 갔습니다. 여전히 두껍게 가라앉은 공기가 하늘 저편으로 검게 이랑을 내고 있습니다. 이런 날엔 흰 눈이라도 내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저 흰 눈이 쌀밥이었으면 하는 허기진 사람들 어깨에도, 달빛 속에 몸을 포갠 연인들에게도 축복처럼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고 잠시 생각합니다.
골목과 골목이 들러붙어 새끼를 친 삼선동 고갯길,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성곽 위에 그가 섰습니다. 엄동설한 세찬 바람에 그를 이리로 이끈 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유년과 청년 시절의 함신익은 이곳처럼 달과 가까운 높은 동네, 삼양동에서 살았습니다. 삼양동에서 정릉으로 이어지는 산 중턱 ‘김선녀 씨네’ 방 한 칸을 세내어 여섯 식구가 살던 개척 교회 목사님 가족. 군용 천막으로 임시 막사 교회당을 만들고 빈 가스통으로 교회 종을 대신했던 삼양교회가 그의 유년의 터전입니다. 1960년대 초 삼양동은 집을 잃은 이재민, 철거민, 실패하고 좌절한 사람들이 밀집한 ‘달동네’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기억 속 삼양동은 암울한 빈민촌이 아니라, 동네 이름처럼 ‘삼각산 남쪽 아래 양지 바른’ 놀이터였습니다. 김일 선수의 레슬링 경기가 있는 날이면 만화 가게(일명 ‘테레비 보는 집’)에서 한 시간에 5원씩 내고 텔레비전을 보고, “예수가 밥 먹여주냐?”며 시도 때도 없이 천막을 뜯어 가버리는 불량배 형들을 욕하고, 도시락이 없어서 소풍을 못 간 날 슬픔이 뭔지 아슴푸레 느끼고, 등굣길에 공동묘지 옆 무 밭에서 차고 달고 맵고 아삭아삭한 무를 뚝뚝 베어 먹던 찡하니 상쾌한 늦가을 아침….
무엇보다 이 산꼭대기는 천태만상의 삶을 높은 데서 그리고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는 세상 공부의 터전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하꼬방’이라 부르는 판잣집도, 그 집에서 밥보다 못한 것을 끓여 먹고 사는 사람들 모습도, 성북동의 으리으리한 집들도 그저 조금씩 다른 삶의 모습에 지나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 <예일대 명물 교수, 함토벤>에서 이 시절을 추억합니다. “삼양동은 나로 하여금 화창하고, 짓궂고, 매섭고, 유머러스하고, 때로는 눈물이 울컥 치솟는 삶의 수많은 얼굴을 일찍부터 골고루 다 마주치며 자랄 수 있게 해준 공간이다. 형언할 수 없는 인간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해내야 하는 오늘의 나에게 삼양동은 어떤 고급의 문화 체험보다도 값진 양분을 제공해주었다. (중략) 풍요로운 문화 환경을 일찍부터 누렸더라면 나의 음악적 성취가 지금보다 더 빨랐을까? 음악에서 그 어떤 절실함도 갈증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일찍 싫증을 느껴 다른 일에 빠지지는 않았을까?” 이제 막 오십 줄에 접어든 그는 삼양동 달동네를 더 그리워하게 됐답니다. 말끝에 그가 슬며시 미소 짓습니다. 그 미소 한 귀퉁이에 슬픔의 수분이 있는 것 같다고, 나 혼자 생각합니다.

역경과 결핍은 내 인생의 터빈 엔진 삼양동 소년 함신익은 이미 그때, 삶이란 칼 쓴 춘향이처럼 가여운 것이면서도 또 눈처럼 축복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답니다. 그의 과거를 듣다 보면 왠지 인상적인 단편 소설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의 직업란에 ‘목사’라고 쓰지 않는 게 큰 소원이었던 목사님 댁 막내아들, 어머니가(식구들 끼니 걱정에서 놓여날 날 없던 분이!) 단지 교회에서 아름답게 성가 반주하는 아들을 보고 싶어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가르친 피아노, ‘너는 이 구석에서 썩기 아깝다’며 누군가 뒤를 밀어주는 그런 드라마는 일어나지 않은 유년, 애를 둘러업은 선생님이 가르치는 동네 레슨을 받으면서도 ‘사람들도 나처럼 피아노를 치면서 속으로 울고, 웃고, 그 속에서 솟아오르는 감격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어 할까?’ 생각한 시절, ‘가난한 목사 아들이 발 들이기엔 너무 동떨어진 세계가 아닐까?’ 고민하다 뒤늦게 시작한 음대 입시 준비, 그리고 건국대 음대 수석 합격의 영광, 주변에서 ‘손이 굳었다’ ‘체계 없이 배워서 기본이 허술하다’ ‘네가 다니는 그 학교 음대는 비주류다’라고 찔러댈 때도 ‘내 안에는 터뜨릴 폭탄이 너무 많다’ 외치던 청년 함신익.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입이 버쩍버쩍 마르는 열정의 시간입니다. “결핍이 오히려 삶의 양분이 된다니 인생은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어린 시절의 가난과 결핍과 열망이야말로 내 인생 50년을 이끈 터빈 엔진입니다.”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문득 이렇게 외치고 싶습니다. ‘꿈과 이상으로 남자가 유지된다!’

(위) 막 오십 줄을 넘어선 지금에서야 겨우 지휘가 좀 보인다며, 자존심과 너그러움이 섞인 표정으로 그가 웃었다. 그는 ‘강마에 스타일’의 원조다. 터틀넥은 타임 옴므, 코트는 질샌더 제품.

그가 보여주는 삶의 밀도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한국의 음악대학에 지휘 전공이 없던 시절 단돈 2백 달러를 들고 미국에 도착한 유학생으로, 지압사?냉동 트럭 운전기사?웨이터를 넘나들며 생활비를 벌어 쓰던 고학생으로, 재학생보다 우수한 청강생으로 인정받아 당당히 입성한 남부 사립 명문 라이스 대학의 장학생으로, 강의실 의자에 쪼그린 채 토막 잠을 자는 날이 계속되다 학교 경찰에게 붙잡혀간 상습범으로, 맨 처음 미국 가서 Titan을 ‘티탄’이라 읽었던 그가 시간당 3달러라는 어마어마한(가난한 고학생에겐) 수업료를 내며 성악과 학생에게 영어 집중 과외를 받는 동급생으로…. 그야말로 이 인생은 ‘열정 시대’입니다. “여기에 테니스공이 있어요. 이 공을 튀어 오르게 하는 건 ‘에어’죠. 인생에서 그 에어가 바로 열정입니다. 삶을 반동시켜주고 새롭게 튀어 오르게 하는 에어. 마음을 비우고 내 에어를 만들려고 노력하면 다 되는데, 누구도 안 도와준다, 괴롭다 푸념만 하면 그 공은 튀어 오르지 않죠. 원래 인생엔 도와주는 사람 같은 건 없어요. 외로운 게 인생이라고 인정하고 해결책을 찾는 사람은 열정 있게 사는 거고, 주위 환경 핑계를 대면 비겁자가 되는 거고.” 이 근사하고 확신에 가득 찬 음성 앞에서 감히 오만이라는 딴지는 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구름 속에도 한 줄기 햇살이 숨어 있음을 이 손이 말한다. 희망을 온몸으로 보여준 그의 인생 이야기는 김영사에서 출간한 <예일대 명물 교수, 함토벤>에서 만날 수 있다.

‘오케스트라 CEO 리더십’으로 인생을 경영하라 상처를 상처로만 드러내지 않고 그 상처를 자신의 존재감으로 거듭나게 한 청년 함신익. 그는 성공이라는 개선문 앞에 섰습니다. 이스트먼 음악 학교 박사 과정을 거쳐 그레고르 피텔베르크 콩쿠르에서 은상 수상, 애벌린 필하모닉과 그린베이 심포니처럼 걸출한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활동, ‘미국 오케스트라를 이끌어갈 차세대 지휘자 5인’ 선정, 1995년엔 한국인 최초로 예일대 교수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함신익이 뛰어들면 음악이 도시를 살려낸다’는 뜻의 ‘오케스트라 부흥사’란 별명도 얻었습니다. “어떤 오케스트라를 맡든 ‘마이 오케스트라’라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일 거예요. ‘잇츠 유어 오케스트라, 뭘 좀 도와줄까?’ 이렇게 다가가는 지휘자들과는 달랐으니까. 미국에서도 많은 오케스트라가 경영난에 시달리다 문을 닫아요. 그래서 지휘자는 음악의 리더일 뿐 아니라 조직을 이끄는 CEO라고 생각하고 일했죠. ‘오케스트라 CEO 리더십’이라고 할까요? 기업을 찾아다니며 ‘우리 오케스트라를 살리자(SOS: Save Our Orchestra)’ 캠페인도 벌이고, 발이 닳도록 돌아다니며 후원금도 모으고…. 일이라는 건 열심히 해도 불평하는 사람이 생기고 열심히 안 해도 비난받죠. 기왕이면 열심히 하고 욕을 먹자, 이런 맘으로 했어요.”
그는 경제학의 ‘20 대 80 법칙(전체 결과의 80%는 전체 원인 중 20%에서 비롯됐다’라는 이론. 국민의 20%가 전체 부의 80%를 차지하고, 직장에서 20%의 근로자가 80%의 일을 도맡아 한다는 게 그 예다)’에 따라 20%의 열혈 음악 팬을 위해 ‘바흐스 런치(지휘자, 단원, 청중이 샌드위치를 먹으며 곡 해설을 듣는 행사)’, ‘연주 직전 모임(공연 한 시간 전 그날 연주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모임)’을 열었습니다. 또 청바지 차림으로 공연장에 오는 ‘청바지의 밤’, 40세 미만 입장가의 공연 ‘Under Forty’처럼 또 다른 20%에 집중했습니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애벌린 필하모닉 공연으로 애벌린 중심가가 되살아나면서 애벌린 시는 ‘함신익의 날’을 선포했습니다.
클래식을 동시대인들에게 외면받는 ‘가련한 음악’으로 가두고 싶지 않은 마음은 그가 대전 시향 상임 지휘자 시절 보여준 ‘튀는’ 이벤트에서 드러납니다. ‘교육 수준 한국 1위, 반면 문화적 불모의 도시’로 불리던 대전의 시립 교향악단을 맡으면서 ‘악기들의 올림픽’ 공연에 댄스 그룹 ‘쥬얼리’를 뮤직 캐스터로 내세우고, 단원들과 축구복 차림(동대문 지하상가에서 직접 고른 운동복에 ‘함신익’ 이름도 새겨 넣었다)으로 무대에 오르고, 힙합에 빠진 청소년을 위해 클래식 춤곡만 모아 ‘댄스, 댄스, 댄스’ 공연도 열고, 청중을 직접 찾아가는 음악회도 열었습니다. 음악이란 즐겁고 쉬운 거라 이야기해주고 싶었답니다. 덕분에 “클래식 공연장의 문턱을 낮췄다”는 칭찬도 받았습니다.
그는 고국에서도 명성을 드날리는 지휘자가 됐지만, 인생은 자신의 지휘에 맞춰 노래하는 예의 바른 성가대원 같지 않았습니다. ‘지휘자의 돌출 행위에 불과하다’ ‘이런 충격 요법은 정통 클래식 인구 확장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일회성 이벤트에 불과하다’는 비판의 소리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건, 그의 여러 실험은 클래식 음악가들이 “보통 집에서 소나타만 들어요”하는 소리만 듣다가 송대관의 ‘네 박자’를 연주하는 걸 훔쳐본 것처럼 후련했다는 겁니다.
2006년, 단원들과의 갈등으로 재계약을 못한 채 그는 “한국 오케스트라는 잘하든 못하든 똑같은 대우를 받으려는 사회주의 불치병에 걸렸다”는 쓴소리를 남기고 6년 만에 대전 시향을 떠났습니다. “난 지지 않으려는 못된 성격이 있어요. 아마도 힘들게 살아 목표 위주의 인간형이 됐나 봐요. 또 돌이켜 생각하니 그땐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 음악을 하나, 지휘봉을 흔드는 게 날 위한 건가? 이런 것에 대한 정체성이 없었어요. 그냥 한 거지. 몰두해서. 이제야 겨우 지휘가 조금 보여요. 우리 아버지가 67세에 목사 은퇴를 하시고 소요산 텃밭 가꾸며 사시는데, 그렇게 20년쯤 멀찍이 떨어져서 보니까 지금 목회 하면 잘하시겠다데. 그 마음과 비슷하죠. 이제 지휘가 뭔지 알겠다는 게 아니라, 다만 그때 내 성공을 위해 오케스트라를 이용하지 않았나, 정직하지 못한 지휘자는 아니었나, 돌아보는 여유가 생겼다는 거죠. 이젠 카리스마로 뭉친 독선적인 지휘자가 아니라 모든 사람과 어울려 맛있는 음악을, 품위 있는 음악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마음 정도 갖게 됐어요.” 깨달음은 늘 이렇게 상처 후에 오는 법일까요? 우린 그동안 그가 관대한 본능을 잃어버린 스파르타적인 사람이라고 오해한지도 모릅니다.


그가 꿈꾸는 음악은 즐겁고 쉬운 음악, 그래서 아이도 마음으로 행복해 할 수 있는 음악이다. 함신익 씨는 ‘오케스트라 N의 신년음악회’(2009년 1월 7일 오후 7시,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에서) 공연을 앞두고 있다. 해외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젊은 연주자들이 만든 ‘오케스트라 N’을 위해 그는 딸과 보내는 크리스마스를 처음으로 반납했다.

가족, 돌아와 쉬게 만드는 항구 음악의 십계명에 철저하리라 다짐하는 그에게도 숨통이 있습니다. 바로 가족. 홀로서기에 체했던 어느 날, 결혼을 결심하고 미국 ‘순회 선’을 보러 다니다 만난 아내, 굳이 연애가 필요 없는 사람이다 싶어 만난 지 두 번 만에 약혼, 다시 초스피드로 결혼했습니다. “아내를 만났으니까 오늘의 내가 있지. 딴 사람 만났더라면 식당 매니저나 하고 있을 거예요. 다른 여자들은 돈 벌어오라고 닦달하는데 아내는 날 믿고 내 일을 하게 해준 사람이에요.” 그리고 딸 멜로디. “멜로디가 유치원에서 발레 발표를 하는 날인데 텍사스에서 초청이 왔어요. 멜로디 혼자 하는 발표회도 아니고 겨우 2분 정도 하는 거였지만, 고민할 것도 없이 텍사스의 초청을 거절했지요. 내게도 가족은 음악보다 더 소중해요.” 그 멜로디는 내년에 대학생이 되는 말쑥한 숙녀로 성장했다지요. 가족, 돌아와 쉬게 만드는 항구. 그리고 정원 가꾸기. “뉴저지에 살 때 딸과 함께 동네를 어슬렁거리면서 그 집 정원에 점수 매기는 게 놀이였어요. 어떤 집은 A+, 어떤 집은 D-, 우리 집은 늘 A였어요. 난 특히 루드베키아 그리고 릴리? 수선화인가? 아, 백합. 그런 꽃들 좋아해요. 그런데 마누라는 특기가 꽃을 죽이는 거야. 내가 한참 집을 비우면 꽃이 죄다 죽어 있어. 그럼 ‘꽃 죽으면 당신도 죽는다~!’ 농담하지.” 이 예민한 예술가의 심장에서 소금기를 걷어낸 건 가족인 것 같습니다. 그의 표정이 털 뭉치처럼 변하네요.
촘촘한 밀도로 산 그의 인생을 설명하려니, 이거 위인의 일대기처럼 된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하지만 “이루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일을 이뤄내는 것, 삶이란 바로 그런 과정의 연속 아니겠냐”며 삶으로 연설해준 그 앞에 다른 문장은 들이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어둠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은, 아픔도 없이 겨울을 보낸 사람은 인생의 맛을 모르는 법이라고 중뿔나게 쓰고 싶습니다. 어느 날, 깊이 숨은 소중한 상처를 꺼내어 가만히 햇볕에 말리는 그의 뒷모습을, 뜨거운 눈물로 어루만지는 모습을 한번 들여다보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 살 냄새가 물씬 밴 음악을 하고 싶다는 그에게 시 한 구절로 인사를 보내며 돌아섭니다. 검게 이랑 낸 하늘 사이로 햇살이 언뜻 비친 것 같습니다.
“사랑하며 살아가면 봄 눈이 온다 / 눈 맞으며 기다리던 기다림 만나 / 눈 맞으며 그리웁던 기다림 만나 / 얼씨구나 부등켜안고 웃어보아라 / 절씨구나 뺨 부비며 울어보아라.”-정호승의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중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